그림자
친구야, 우리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함께 노래하며 걸을 때 작은 내 키만큼 낮은 네 목소리와 큰 네 키만큼 높은 내 목소리 곱게 섞이어 푸른 하늘로 울려 퍼지고 네 뒤를 따라다니는 긴 그림자와 내 뒤에 붙어다니는 짧은 그림자 하나로 포개어지는 걸 넌 본 적이 있니? 친구야, 그렇게 포개어진 그림자가 우리 손 흔들며 헤어질 때 서로 바뀌어 내 그림자를 너희 집으로 네 그림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는 걸 알고 있니? 떨어져 있어 보고픈 동안 우린 서로 바뀐 그림자를 가진다는 걸 난 오늘에야 알았단다.-10쪽
연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 연필 칼로 한 겹 한 겹 깎아 내도 여전히 잠만 잔다. 까만 심이 쪼끔 드러나자 그때서야 바스스 눈을 뜨고, 심을 뾰족이 갈고 손에 꼭 쥐니 나릿나릿 기지개를 켠다. 흰 종이에 가져가자 눈부신 듯 눈을 깜작거리다가는 종이와 닿는 순간, 비로소 소스라쳐 깨어난다.-114쪽
어른
내가 아주 어렸을 땐 키가 크기만 하면 다 어른인 줄 알았는데,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가 많으면 다 어른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도 저도 다 아닌 것 같아. 어른? 어른? 아른아른.-138쪽
들길에서
들길을 가다 바람의 집에 세들어 사는 풀꽃들을 만났다.
-너희들은 방세로 무얼 내니?
내 말이 우습다는 듯 풀꽃들은 가늣한 허리를 잡고 깔깔거리고
대신 대답이라도 하듯 바람이 나눠받은 향기 한 움큼을 코끝에 뿌려 주었다.-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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