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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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이면서 몸을 파는 여자로 그를 만났다는 사실이 차츰 가슴을 찢어놓기 시작할 때쯤, 그가 내게 고백해온 것이 바로 '타잔'이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놀라움보다 속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원죄'를 가졌듯, 그에게도 감춰온 '원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96쪽

내가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나는 살맛을 느꼈다. ㅁ시에 내려와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남편과 정우는 습관적 삶에 빠져 있었고, 내가 어떻게 정성을 쏟든 정체된 그들의 습관에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아니 그들만이 빠져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제, 나까지 변화라곤 없는 그들의 수렁 속으로 끌고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물론 정우를 픽업해 학원으로 데려가는 일도, 남편의 저녁밥상을 차리는 일도 게을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삶을 의무감에 의한 습관에 더 강력히 복종시키는 일에 불과했다.-102쪽

아예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외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단계, 그 너머의 또 다른 특수한 곳에 존재했다. 아이를 위해 외국에 저택을 마련한 부모도 있었고, 특별 과외를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유학 간 아이들이 특별히 받는 과외는 주로 승마나 골프 같은 과목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성골'이라고 믿었고, '귀족'으로 성장했다. 귀족으로 성장해 돌아오면, 부모들이 가진 재산이나 기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공부해 외고, 서울대를 나온 가난한 집 수재들이 그들의 고용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정우처럼 가진 것 없는 집 아이들은 그들 귀족의 명을 받고 그들의 재산을 더 불리는 전사로 키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부의 세습적 구조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졌다. 그리고 그런 구조는 전선조차 뚜렷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뿌리치거나 깨부술 방도가 전무했다. 뿌리치면 실패자로 세상 끝으로 밀려나야 했고, 깨부수려 하면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니,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귀족의 전사가 되는 길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129쪽

정우는 때마침 이불을 발로 차내며 뽀드득뽀드득 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습관이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가 이를 갈면서 걸어가야 할 벼랑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을 팔면서까지 부추기고 내몰아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이로 난 광포하고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패배하면 죽는다, 라고 말해온 것이 나였고, 아비가 갔던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라고 채찍질해온 것이 나였다.
나는 그애가 오로지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지어미의 자리를 다 버리면서까지 내가 '비즈니스'에서 얻은 수익으로 사고자 한 것도, 생각하면 그 광포한 전사의 길로 아이를 내몰기 위한 가죽 채찍 같은 것에 불과했다. 전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선은 이미 침대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가죽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136쪽

겉으로는, 10대에 이미 헌 신발처럼 팽개쳐버렸던 사랑의 로망을 뒤늦게 찾아 지닌 듯했으나 그녀는 기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가 청년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돈을 앞세워 새로운 명품을 사려고 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동차와 옷과 장신구가 지루하니까 '청년'을 돈으로 사서 명품의 서랍장에 담으려고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에 나름대로의 낭만성을 보탠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잠시 동안의 동정심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동정심은커녕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믿는 새로운 '명품'으로부터 어서 빨리 버림받기를 차라리 나는 바랐다.-154쪽

이상한 것은, 허헛, 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엔, 농담을 가장하고 있긴 했으나 '타잔'에 대해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뛰어난 '비즈니스맨'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숭상의 눈빛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소외받고 사는 가난한 사람은 물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자영업자나 월급쟁이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 '타잔'을 분명 그리워했을 뿐 아니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실패했거나 전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타잔은 실패한 그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이상한 현상이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좀도둑들조차 자신을 가리켜 '타잔'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러므로 비즈니스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평가를 누구나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195쪽

아버지가 돼본 적이 없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부모 노릇하는 것이 어떤 오욕과 질곡을 견뎌야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젊은 형사였다. 실패의 대를 물리는 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싼값으로 여자의 몸을 사려는 사람들일수록 몸을 판 여자에게 더 가혹하게 군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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