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 창비시선 310
송경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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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경찰서에서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 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 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10쪽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16쪽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는 음울했다
벼락 맞은 나무처럼 쓰러져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눈물바람으로 남북을 오갔다
수천명의 목을 자른 한 자본가는 수천 마리 소떼를 몰고 가
영웅이 되었다 그때마다 거리에서 부딪쳤던
곤봉의 세월이 허리를 끊으며 떠오르곤 했다

3년째 천막농성을 하다 구속당한
전자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안부와 무관하게
양장 고운 『체 게바라 평전』은 불티나게 팔렸다
8․15 사면복권증을 받아온 한 선배는
넌지시 매문을 물어왔다

"기획출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데……"
-32쪽

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

(...)
구로3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곳이었다고, 비 오는 날이면
구종점 마루에 장화를 든 아낙과 아이들이 줄줄이 서서
공단에서 돌아오는 아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삼성래미안 아파트가 서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닭장집이 있던 곳
사는 곳 어디냐 하면 에둘러 말해야 했던 곳
(...)

-58쪽

생태학습

십수년, 주말농장 하나 없이
아이에게 모진 생태교육만 시켰다

광화문 시청앞에서
전경들이 파도처럼 쫓아오면
바다게들마냥 아무 구멍으로나
얼른 들어가야 한다는 학습

비정규노동자들이 올라간 고공농성장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새들처럼
하늘로 올라가 둥지도 틀 줄 알아야 한다는,
원숭이처럼 어디에라도 매달릴 줄 알아야 한다는 학습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못난이들의 집은 언제나
개미처럼 쉽게 헐릴 수 있다는 학습
쫓겨나지 않고 버티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학습

그래도 잡은 손만은 꼭 놓지 말고
가야 한다는 학습 그렇게 밟히고도
엉겅퀴처럼 다시 일어나 싸우는 질긴 목숨들도 있다는
-64쪽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72쪽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붕어빵아저씨 고(故) 이근재 선생님 영전에

(...)
500여 노점상들을 거리에서조차 몰아내기 위해
31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는 고양시청
30명도 채 되지 않는 양민들의 생존권을 빼앗기 위해
150명의 폭력배를 고용한 일산구청
저항하면 공무수행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경찰
폭력배를 고용한 관공서를 경찰이 보호하며
서민을 향한 사제 폭력이 공무로 수행되는 나라
(...)

-78쪽

너희는 고립되었다-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에 부쳐

가난한 인력시장에서
불법으로 언제든 살 수 있는 64만원짜리 싼 기계들이 있었다
1년만 쓰다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기계들
그 기계들도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고
발개지는 볼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여덟 시간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벌어주는 희한한 기계들이었다
임대사용료가 터무니없이 싸고
사용 후 재처리 비용도 필요없었다
너희는 이 희한한 임대업에 맛 들여
일상 라인에는 파견직을 못 끄게 되어 있음에도
무려 200여대의 기계를 불법으로 빼곡이 들여놓았다
사장의 입이 기쁨에 찢어질 때,
기계들의 손발은 부르텄고 가랑이는 찢어졌다
-81쪽

도저히 참지 못해, 그들이
싸디싼 비정규기계가 아닌
하자 없는 정규사람임을 외쳤을 때
너희는 본보기로 수십대의 기계를 대책 없이 내다버렸다
불법으로 쫓겨날 수 없다고
일손을 멈추고 공장을 점거하자
너희는 용역깡패들을 채용했다
무섭지 않으냐고, 겁나지 않으냐고
허리를 부숴놓겠다고 위협했다

그것이 빛 때문일까 싶어 전기를 끊었고
수도를 끊었고, 밥 주던 것을 끊었다
숨소리 하나라도 새나갈까
철문 사이사이를 틈 하나 없이 꽁꽁 메웠다
혹 그것이 꿈 때문일까 싶어
그들의 미래에 22억원에 달하는 가압류 딱지를 붙였고
그것이 혹 총명한 지도부 몇 때문인가 싶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수억짜리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지만
너희는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
-82쪽

이 냉동고를 열어라

불에 그슬린 그대로
150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
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

까닭도 알 수 없다
죽인 자도 알 수 없다
새벽나절이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토끼처럼 몰이를 당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쓰레기처럼 태워졌다
그들은 양민이었지만 적군처럼 살해당했다

평지에선 살 곳이 없어 망루를 짓고 올랐다
35년째 세를 얻어 식당을 하던 일흔둘 할아버지가
25년, 30년 뒷골목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할머니가
책대여점을 하던 마흔의 어미가
24시간 편의점을 하던 아내가
반찬가게, 커피가게를 하던 고운 손이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절박하다고
호소의 망루를 지었다

돌아온 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였고
너무나도 신속한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었다
여섯 명이 죽고 십여 명이 다치고
또 십수명이 구속되었다
이웃이 이웃을 죽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96쪽

그렇게 여섯 명이 죽고도
이 사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수의 시민들이 차벽과 연행에 맞서
추운 겨울부터 더운 초여름까지
어두운 거리에서 쫓기며 항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 역시 수배되거나, 체포되거나, 소환당했다
용산참사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용산참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하루 이틀 날짜가 쌓여 다섯 달이 되었다
하,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다섯 달이 되었다
하, 죽어서도 무슨 죄를 그리 지어
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날이 다섯 달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용산에서 아직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열린 사회라고 한다 억울한 죽음들이
다섯 달째 차가운 냉동고에 감금당해 있는데
살 만한 사회라고 한다
-97쪽

150일째 우리 모두의 양심이
차가운 냉동고에 억류당해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차가운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역사가
차가운 냉동고에 얼어붙어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용기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미래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소망인
평등과 평화와 사랑의 염원이 주리 틀려 있다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
제발 이 냉동고를 열어라
우리의 참담한 오늘을
우리의 꽉 막힌 내일을
얼어붙은 이 시대를
열어라 이 냉동고를
-98쪽

너는 누구에게 물어보았니-MB에게 묻는다

(...)
그렇게 무너뜨리고 싶으면
노동자 농민 서민 도시빈민 실업자 비정규직들의 아픔 위에 도도히 선
저 흉악한 자본의 탐욕이나 무너뜨리렴
그렇게 뚫고 싶은 게 많으면
반백년 원한으로 막아선 저 분단의 철벽이나 뚫어주렴
그렇게 성장하고 싶으면 이제 그만 미국의 품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렴
신자유주의 착취와 소외, 폭력의 세계화 대열에서 벗어나
씩씩하게 독립해보지 않으련
더 많은 평화를 흐르게 하는 역사의 대운하라면
더 많은 평등을 실어나르는 사랑과 인내와 연대의 대운하라면
그 누가 말리겠니
그 누구든 작은 손이나마
뜰 삽으로 내밀지 않겠니
-104쪽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학생이 아니다
졸업한 지 오래됐다
당신은 노동자다 주민이다
시민이다 국민이다 아버지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남편이고
학부모며 집주인이다
환자가 아니고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모두다
아침이면 건강쎈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인상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나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
북한에 보내는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
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 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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