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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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니?" "이것은 소설이고, 더구나 장르문학입니다." "난 장르문학이란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우리 문학판 너무 협소하고 못돼먹었어. 양반 상놈을 아직도 가르려는 패거리가 많은 게 이 동네거든. 자네는 양반을 사고 난 필요한 돈을 얻으면 되지." 우리 한 번, 문학판을 갖고 놀아보세, 라고 마음속으로 나는 덧붙였다. 재미있는 놀이판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쓴다는 것이 장르문학이기 때문에만, 그가 놀란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필명이 적요寂寥이다.

평생 시 이외의 잡문을 쓴 바도 없고 탤런트처럼 이리저리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혁명을 꿈꾸던 젊은 날 배운 것이었다.-66쪽

평생 오로지 시만 썼다는 게 무슨 자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살았다는 게, 필명이 적요寂寥라는 게 무슨 카리스마인가. 프러나, 우리 풍토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의 시작詩作에 붙어 놀라운 성과를 확대 재생산해낼 수 있었다. 시인으로 살아남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내 시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부도덕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야유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내 성공에 대해, 그 무렵 자학적인 묘한 감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 시가 그만한 존경과 흠모를 받아서 마땅한가. 내 시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흠모는 우리 사회의 미묘한 관습들을 재빨리 간파해서 반어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얻은 과도한 전리품은 아닌가.(...)내가 평생 구도하듯이 혼자 살았다는 것도, 잡문 한 번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물론 회자됐다. 나의 입장에서, 그런 평가들은 나의 전략에 머리 좋은 자들이 놀아난 결과에 불과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앉아 속으로 말하곤 했다.

"엿 먹어라!"-142쪽

"젊은데 매니큐어도 좀 밝고 화려한 색깔로 하지 않고?" "어른들은...... 문제예요. 왜, '젊은데, 화려한 색깔'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훗, 멜로드라마 많이 봐서 그런가요? 젊은 색깔이라고, 다 화려한 게 아닌데...... 난 회색일 때가 많던데......"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회색은 무채색이잖아? 나는 반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아는 이적요 시인은 무채색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217쪽

조금만 더 귀를 열면 바람에 솔잎 하나가 떨어져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고요였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유리창과 얇은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애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주적인 거리였다. 내게는 그애보다 죽음이 훨씬 가까웠다. -232쪽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250쪽

시인으로서 나의 가증스런 전략은 일찍부터 죽음 뒤에 맞춰져 있었다. 모름지기 뛰어난 시인은,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는 자이며,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도록 나는 살아왔다. 가짜 시들을 사람들이 진짜로 믿도록 하기 위해,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사코 산문은 발표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계획하고 전략을 수립한 대로 죽음으로써, 그 과실을 딸 때가 왔다. 선정적인 일부 언론과, '전략'을 재능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일부 문인들과, 모든 문화예술 작품들에게 급수를 매겨놔야 안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죽은 나의 '불멸'을 도울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덩달아 박수를 칠 터이고. 박수 소리에 현혹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시인 이적요가 사실은 용의주도하게 설계돼 얻어진 '가짜'라는 걸 끝내 알지 못할지 모른다. 그 모든 '소음'을 상상하면 두렵기 한정 없다. 살아서 그랬듯, 죽어서도 하나의 전략적인 '소음'에 내 삶이 다 편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리기는커녕, 죽은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그들의 습성대로, -396쪽

나를 더욱 '우상화'하려고 애쓸 가능성이 많다. -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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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0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장르문학이란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전 장르문학을 완전 애정해서...문학 앞에 붙는 관형사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근데,다시 생각해보니...이 책 이쯤까지 읽다가 이 부분에서 집어던졌던 것 같아요~^^

마노아 2010-12-08 01:17   좋아요 0 | URL
장르문학을 잘 모르고 별로 접해보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이 책이 꽤 괜찮았어요.
기대치가 무척 낮아던 터라 오히려 시너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