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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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할 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자괴감,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허무함, 길고, 시들고, 말라가는 시간의 악취...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가는 직장인들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진심에 나는 좌절했다.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그 삶이,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이었다니. 언젠가 퇴직을 하면, 하는 상상으로 삼십삼년의 직장 생활을 견뎌내지 않았던가. 내 삶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삶이란... 무엇일까. -11쪽

아내가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쯤이었다. 아들 내외와 딸 내외가 함께 병원을 찾아왔다.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딸이었다. 요는, 재산을 미리 정리해두자는 것이었다. 세금 문제라든지 갖가지 이유를 토로 달았지만 내가 느낀 요는, 미리 재산을 물려달라는 것이었다. 오빠랑 언니랑 우린 다 의견이 일치했어요, 솔직히... 이제 아빠도 준비를 하셔야 되구요. 준비 없이, 그런 얘길 들어야 했다. 고개를 돌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자궁에서 뻗어나온 세상도 이미 커다란 암이 되어 있었다. -12쪽

노성진의 왼편, 두 자리 건너에 앉은 놈이 정동필이다. 키가 큰 윤동필이란 친구가 있어 작은 동필이라 불리던 녀석이다. 백육십이 될까 싶은... 정말이지 작은 키다. 참견하길 좋아하고 촐싹대는 면이 있어 '똥피리'란 별명을 따로 갖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지만 요양원을 통틀어 가장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드러난 병이 없다. 동필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오직 가난 때문이다. 요양원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 이곳은 정부의 보조를 받는 실비 시설이다. 일반 노인에겐 요양비의 절반을, 생활보호 대상자에겐 전액을 지원해준다. 말하고 보니, 동필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아픈 노인이란 생각이 든다. 가난보다 큰 빌병은 세상에 없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21쪽

옆자리의 총에 비해 구원은 멀리... 정말이지 뉴욕쯤에나... 저 자유의 여신상 아래에나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글귀를 새겨 놓았나?

고단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이여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군중들이여
내게로 오라

엠마 라자루스의 시를 나는 떠올렸다. 왜 구원은 고난에 빠진 이를 찾아와주지 않는 것인가. 왜 모두에게 직접, 제발로 걸어오기만을 요구하는 것인가...-59쪽

그때 그 어둠속에서 권왕은 문득 외로웠었다. 악한에게도 명분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싸울 만한 나쁜 놈이 없다는 외로움, 더는 그림자를 만들 수 없는 빛의 외로움을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93쪽

아무도 듣지 않는 신청곡처럼, 맥연히 그 리듬이 애잔하고 서글펐다. 영웅의 시대는 끝이 났다. 바야흐로, 소녀들의 시대였다.-94쪽

대형... 대의를 가져선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대인은 어느 한 곳 설 자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대의가 없다니, 일국이 섰고 남아와 기개가 이리 들끓거늘 어찌 대의가 없을 수 있겠느냐? 아아... 한숨을 쉬며 천마가 말했다. 대의가 있다면... 서른 두 평 아파트입지요, 혹 기개를 품은 남아라면 쉰 평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대형, 지금은

돈이 최곱니다-100쪽

천마는 참가를 결심했다.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은 종잇장 같은 글러브를 끼고서 링 위에 올라간 직후였다. 장풍을 방사하거나, 행여 무공을 썼다가는 죽거나 불구가 될 만큼 허약한 상대였다. 아아, 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인간이 개미를 다치지 않게 때릴 수 없듯, 영종도를 이륙한 비행기가 인천 간석동 34번지에 내릴 수 없듯 발경의 조절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달려든 상대를 끌어안은 채, 천마가 해야 할 일은 한사코 얼른 탭을 치는 것이었다. 시합 종료가 선언되었다. 그 순간 탭의 장력에 의해 링이 무너졌지만, 누구도 그것이 내공에 의한 것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104쪽

오로지 눈뿐인 세상이었다. 정치꾼이 된 동지도, 귀족노조가 된 후배도, 재벌의 뒤를 닦는 변호사 선배도, 고문후유증으로 여즉 노모가 대소변을 받아야 하는 친구도, 실은 독재가 그리웠던 이웃도, 잘살면 그만인 민족도, 여전히 건재한 친일 후손도, 그보다 더 건재한 발포 책임자도, 어쩌지 않고 어쩔 생각도 없는 대다수도, 실은 있지도 않았던 이념도, 있어도 소용없는 법도, 아빠도 2번 찍지그래? 하던 달도, 있지도 않았던 민주와 민중도, 그래서 모두가 이미테이션처럼 느껴지는 골짜기였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은... 무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까? 쏟아지는 폭설을 바라보며 천마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109쪽

기천아! 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천수가 소릴 질렀다. 부르셨습니까? 뜨악하니 도제 하나가 방문을 연 것은 제법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들때밀 같은 표정으로 마당의 눈을 쓸던 바로 그 도제였다. 아까 내 전음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어떤 전음 말이옵니까? 깻잎 말고 방앗잎을, 후추 말고 산초를 치라 일렀지 않았느냐. 머리를 긁적인 도제가 불콰해진 얼굴로 목소릴 울먹였다. 사부님... 그리 긴 전음을 도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오년 수련에 오라 가라 간단한 전음도 들릴까 말까인데... 그리고 그런 말은요... 휴대폰으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어허, 고얀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내 오늘 세 분 무신께서 모이신다 그리도 일렀거늘! 울먹이던 도제가 결국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四룡께서 모이면 뭘요... 뭘... 정부라도 엎을 겁니까? 네 분이 힘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112쪽

눈 내린 마당으로 뛰쳐나간 도제가 흐느끼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수저를 집지 못한 채 천수는 말이 없었고, 나머지 무신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천수의 미간이 세인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동란을 피해 내려온 부산에서 겨우 반 평 얼음집을 열었을 때도, 지구온난화로 십갑자의 내공을 고스란히 잃고서도 이토록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다. 두평 반 천장의 격자무늬를 올려보며 천마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물지 않아도 담배를 문 것처럼, 이장록은 또다시 개체 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은 기분이었다.-112쪽

뜨고 싶은 세상이기도 했고, 할 일이 더 많아진 세상인 듯도 했다. 부패를 못 막으면 발효라도 시켜야 할 것 아닌가. -115쪽

민주니?
오... 뭐야 아빠, 이 시간에.
미안하구나... 급히 좀 할 말이 있어서 말이다.
글세 뭐냐니깐?
민주야... 만일 말이다... 아빠가 사라지면 너 어떻게 살래?
나 원, 별 걱정을 다 하네... 언제 아빠가 경제 책임진 적 있어?
그래, 할 말이 없구나...
그래도 민주야... 경제가 전부는 아니잖니.
몰라, 어려운 얘기 하지도 마. 난 돈이 전부야. 또 이상한 사람들하고 같이 있지?
그게 무슨 말이냐.
아, 몰라 끊어. 그리고 아빠... 제발 개량한복 좀 입지 마! 나 쪽팔려 죽겠어.-115쪽

정말 간절히 원한다고 하니까 그래? 하는 분위기였어. 샤워를 할 때까지도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글쎄 걔가 전에 사귀던 선배 얘길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선배는 미국 국적을 가졌는데 군대 안 가도 된다더라, 라고 말이야. 제길 그 얘길 들으니 갑자기 자지가 죽지 뭐냐?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았다. 어렸을 때 이웃 단지의 47평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단짝의 생일파티였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잘 보고 물을 내리는데 아주 기분이 묘했다. 물, 소리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우리집에선 콰, 하는 소음과 함께 맹렬한 소용돌이가 변기를 훑어내리는데 스와,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잔잔히 맴을 돈 물이 변기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 묘해 나는 몇번이고 스와, 를 반복했다. 우와, 탄복을 하며 화장실을 나와서도 그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파티를 즐길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125쪽

바다는 처음이었다. 처음엔 그럴 리가, 싶었지만-곧 그럴 수밖에,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온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을 떠올리면 언제나 함께 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수영이라면 함께 일년 정도 배운 적이 있지만, 바다는 모두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과 학원과 방학을 떠올리면

그럭저럭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도 그래, 재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월리가 백명 정도는 숨어 있을 것처럼 사람이 많았지만-높은 하늘과 바닐라스러운 구름, 또 원경의 풍부한 마린블루를 쳐다보며 나는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었다. 오길, 잘했다.-129쪽

망할 놈의 여편네... 이러니 내가... 니미럴,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엄마 같은 여자랑 결혼하려면 차라리 강원도에 들어가 곰을 데리고 사는 편이 나을 게다. 곰은 입장료라도 벌지. 알까 모르겠다. 아버지가 잘나갈 때... 그때 뭐라도 해서 엄마가 조금만 보탰다면 아파트 살 수 있었다. 집만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지.
엄마를 원망하는 건가요?
원망은 아니고... 그렇다는 얘기다.
엄마도 열심히 사셨어요.
안다. 내 얘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화가 난다는 거지.
곰 얘기 엄마한테 해도 되나요?
안되지.

그나저나 남들 사는 만큼은 살아야 하는데.
희망을 가져요 아빠.
미안하다. 면목이 없구나.
아빠도 열심히 사셨잖아요.
알아주니 고맙긴 하구나, 그런데 병태야.
네?
우리 혹시 서민도 아니고 빈민... 그런 거 아닐까?
아무렴 어때서요.
몰라서 하는 소리, 용산이 그리 먼 산이 아니란다.-187쪽

누군가의 곁에 신이 없다면... 누군가의 곁에 인간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겠지.-243쪽

아치에 오르는 인간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다. 대개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알아주길 바라는 거다. 그래서 말려주길 바라고, 또 외로워서다. 들어주고 달래주고 말려주고 함께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것도 경험을 통해서다. 관할을 옮기고 그간 숱한 인간들의 손을 잡고 아치를 내려왔다. 표창을 받은 적도 있다. 처음엔 목숨을 구한 거라 스스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 그들이 아치에 올랐다는 사실을. 사업에 실패하고, 연인에게 버림받고, 빚더미에 올라선 인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이곳에서 찾는 것이다. 확 담배를 비벼 끈다. 사는 게 힘든 만큼 죽는 것도 힘든 일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제기랄, 피식 불꽃을 잃은 장초가 자살자의 시신처럼 싸늘하게 식어간다.-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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