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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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연두와 초록, 노랑의 저 색채를 음미하고 기억하려 한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소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죽음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물이 흐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나는 화가 나지만 어째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부분도 있다. 나는 즐겁고, 실은 즐거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모르겠다. 느끼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섞으면 결국 체념이 된다. 그것은 캄캄하고, 끝없이 깊고, 풍부하다. 인간이 이를 곳은

결국 체념이다.-26쪽

여섯 개 정도... 개인 파일이 담긴 폴더를 휴지통에 삭제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삶의 대부분이라 믿었던 직장생활이 그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저기...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말일세... 하고 부장은 부탁했었다. 일주일 정도라도... 어떻게 인수인계를... 살아온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그래서 들었다. 천수를 누린다 해도 어쩌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딸칵 이곳의 문을 여는 순간 그때도 아버지의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었다. 넌 저방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어쩌면 그 말은 아버지의 마지막 인수인계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결국 각자의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견디고 견뎌온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그 방에 짐을 풀고서 나는 청소를 시작했었다. 그때의 젖은 물기가 아직 손에 그대로 남은 느낌이다. 처연한 달이

스스로를 깎고 있는 깊은 밤이다. -28쪽

마련된 자리에 착석을 하며 나도 모르게 실례합니다... 라는 말이 새나왔다. 실례해라! 하고 고함을 친 것은... 동구였다, 자세히 보니 동구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든지 나도

실례를 하고픈 밤이다. 친구들은 변하지 않았고, 변해 있었다.-29쪽

나 많이 늙었지? 문득 얼굴을 숙인 순임이 물었다. 글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나이 든 소녀를 위한 마땅한 표현이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늙었다, 와는 다른, 그러나 늙었다 근처의 그 어떤.

늙었다기보다는, 지친 느낌이었다. -32쪽

차차 대소변도 못 가릴 아내가 무거운 짐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에겐 그래서 감사한 심정이다. 젊었을 때의 잘못을 보상할 기회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자식에게서 받는 소외감이나 배신감도 아니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65쪽

아시겠죠? 어린이 여러분.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꿈과 희망을 잃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우린 여러분의 친구니까. 자자, 가면라이더 파이즈와 사진을 찍을 어린이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주세요. 어머님들은 사진을 받을 수 있는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시구요. 하아, 그래서 찍었다. 서른아홉 명의 코찔찔이들 옆에서 서른아홉 번 승리포즈를 잡아준 것이다. 아저씨 가짜죠? 마지막 코찔찔이가 당돌하게 물었다. 움찔, 하기보다는 화가 났다. 진짜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니? 말은 못하고 하하 웃었다. 허벅지가 따끔거렸다. 진짜 파이즈의 허벅지에도 땀띠가 있을까?-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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