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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교롭게도 최근엔 영화를 보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감정을 지나치게 소모할 때가 많았다. 영화 속 현실이 갑갑해서, 책 속 상황이 답답해서 울화가 치미는데, 실은 그것은 현실에 대한 울화며 불만이고 서러움이었다. 이 책 허수아비 춤도 그랬다.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것을 법의 감시로부터 따돌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떡값을 뿌리는 대기업. 기업의 손이 못 미치는 구석이 없는 대한민국. 그리하여 법망에 잠시 걸리는 일이 있더라도 유유자적 빠져나가는 술수란, 최근 한 3년 동안 되도록이면 9시 뉴스를 피하고 싶어했던 마음과 통했다. 도저히 마음 둘 길 없는 갑갑함에 읽으면서 호흡을 몇 번씩이나 조절해야 했다. 아직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지 못했는데, 허수아비 춤을 읽으면서 느낀 갑갑함을 몇 배로 느끼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작가님이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에도 그 책이 한 몫 한 것은 아닐까?
작품에는 철저히 썩어버린 대한민국의 곳곳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회장의 돈지랄과, 그 회장의 비자금과 불법 재산 승계를 위해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많이 배웠다는 이 사회의 엘리트 인사들, '미국'이라는 이름 앞에서 껌벅 죽고 들어가는 싸구려 근성과, 돈과 권력 앞에서 정의 쯤은 헌신 짝처럼 내버리는 검찰, 줄서기에 바쁜 대학과 교수, 의리도 예의도 없는 온갖 인망들. 다 꼽자니 속이 쓰리고 아프다.
억(億)이란 뜻을 아는가? 그 글자는 사람 인 변에 뜻 의 자가 합해진 거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건 실재하는 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큰 수라는 뜻이야. 그 글자가 만들어졌던 그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경제 규모가 작았으니까 억 단위의 금전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야. -234쪽
태봉을 따라가기 위해서 비자금 조성하는 비법을 갈고 닦고 있는 일광 그룹. 비자금의 규모는 1년에 1조.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미리 뿌려두는 밑밥의 규모는 3천 억이다. 이미 '억'은 엌!소리도 나오지 않고 '조' 단위로 바뀌어 버리니, 최근 드라마 '도망자'에서 무수한 사람을 죽이면서 찾고자 한 게 한국 전쟁 때 사라진 금궤를 찾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그 값이 2천 억이라고 했던가? 결코 가져보지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할 그 돈이 적게 느껴지니 이미 말 다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에서 보면 전 국민적 관심과 분노가 집중된 아동 성폭행범을 조작하는 부당거래가 나온다. 하나의 부정한 짓을 해치우기 위해서 더 많이 손을 더럽혀야 했고, 거기엔 대가가 오고 갔고, 또 피를 불렀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모두가 패한 전쟁과 같지만, 마지막까지 두 다리 뻗고 자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한 돈과 권력. 입맛이 쓰다 못해 욕지기가 나왔다. 허수아비 춤을 읽을 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정말이지,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이렇게 썩어빠진 세상을 살고 있는데, '희망'이나 '열정'같은, 긍정적이고 예쁜 단어들을 주워 섬기는 게 바보 같았다. 문득, 박민규의 '핑퐁'을 떠올렸다. 이 세상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과연 이 세상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마땅히 '리셋'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엄한 상상마저 들었다. 이런 갑갑함이 노아의 방주를 만들게 한 것은 아닐까 멋대로 생각이 뻗어 나갔다.
아마도 조정래 작가님도 그런 절망감을 극복해 내고자, 혹은 환기시키고자 이런 작품을 쓰신 게 아닐까. 작품을 통해서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방법은 하나뿐! '불매 운동' 밖에 없다고. 백 번 지당하다. 무슨 수로 그 거대한 커넥션을 우리가 뚫을 수 있을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흠집은커녕 더러운 얼룩 하나 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단결해서 불법 비리를 저지르는 나쁜 기업의 제품을 '불매'한다면, 그 힘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핵심은 '합심'이라는 거다. 한 사람의 불매, 열 사람의 불매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은 나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것 같은 기업일지라도, 그 기업이 이 사회에 진정 해악을 끼치는 존재라면 불편함을 다소 감수해줄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대기업의 계열사가 보통 많은가. 우리가 모르고 소비하는 그네들의 상품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러니 처음부터 기를 뺄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물방울이 결국엔 바위를 뚫듯이, 조금씩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기를. 적어도 그 당위성만은 잊지 않기를...
그런데 그 마음 한자락 보태는 일이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또 이미 알고 있다. 마음을 더해서 힘을 모으기는 어렵고, 그들이 뻗어놓은 마수에 걸리기는 얼마나 쉽던가. 작품 속 허민 교수가 그랬고, 졸지에 검사에서 변호사가 되어버린 시민단체 대표 전인욱이 그랬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암시해 놓은 다음의 전개 상황도 그런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허민 교수가 전인욱에게 미리 술을 자제하라는 당부를 남겼지만, 솔직히 독자는 불안했다.
그래도 엔딩 장면은 풋! 웃을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통쾌함을 느꼈다. 뭐랄까. 씁쓸한 사슬관계를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한방 먹인 느낌이 들어서 쌤통이란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고 간 천문학적인 돈이 결국 어디서 빠져나갔는가를 생각하면 그 쌤통은 곧 먹통이 되어버리지만... 최근에 인상 깊은 엔딩을 가진 책으로 '화차', '새벽 3시 바람이 부나요?',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꼽은 적이 있는데, 이 책 허수아비 춤도 포함시켜야겠다. 역시 대가다운 솜씨다.
작품은 꽤 두껍지만 빠르게 읽힌 편이다. 마음의 울렁증을 푸느라 몇 번씩 휴식은 필요했지만. 작가가 얼마나 힘을 주어 얘기하는지, 책 속 비리와 비리에 얹힌 속이 더 더부룩해지는 아쉬움은 남는다. 매우 지혜롭고 사려 깊은 인물로 나오는 전인욱의 아내가 남편에게는 존댓말을 하는데, 좀 배웠고, 게다가 도덕성까지 추켜세워지는 인물로 등장한 전인욱은 낮춤말로 나오는 게 다소 불편했다. 그런 사례는 드라마에서도 꽤 자주 마주치지만.
여러 속담의 행진이 꽤 재밌었다. 적재적소에 쓰인 속담이 안성맞춤이었고, 몇몇은 처음 접하는 것들도 있었다.
좀도둑은 포승 받아도 큰도둑은 상 받는다. 이 속담은 무협극에서 종종 접했던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수백 수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다!'라는 벼락맞을 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감기 고뿔도 남 안 준다. 재벌들이 결코 헛돈 쓰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절대 없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내고, 거미줄도 수만 겹이면 호랑이를 묶는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던가!
저 구름에 비 들었으랴 하는데 소나기 쏟아진다고 하지 않소. 설마가 사람 잡을 수 있다. 나만은 절대 안전이란 생각은 금물!
먹고 사는 게 급급했고, 정치 민주화가 더 다급했던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경제 민주화'는 언제나 나중 일이었다. 이제 더는 '나중'으로 미룰 때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미루면 우리가 바라는 경제 민주화는 더더더 뒤에 도착할 것이고, 영영 우리와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자손손 허수아비 춤만 추는 노예로 전락할 지도 모를 일이다. 먹고 사는 일이 여전히 바쁘고 버거운 대부분의 소시민들에겐 그 한줌의 관심도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다시 한 번 '희망'을 기대해 본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는 인생이니까. 사실은 그보다 더 큰 힘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