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구판절판


여아 선호 사상, 예쁘게 잘 치장한 여자들의 모습, 여자를 보물처럼 아끼고 잘 키우려는 것 등등 외형적인 것들만 보면 이곳은 분명히 '여자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면 이곳은 외려 '남존여비 사상'이 철저한 곳임을 알게 된다.
여자 아이들을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며 될 수 있는 한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은 받을 '소'의 수를 늘리기 위한 것, 즉 값이 더 많이 나가도록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결코 여자를 한 인간으로서, 남자보다 더 귀중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은 아니다. (...)더욱 서글픈 것은 결혼 때 팔려 온 여인네들은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줄이 아이들을 낳고 소처럼 일해야 한다. 말 그대로 '소 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25쪽

집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보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나병에 걸렸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그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보니 가슴이 저려왔다.
'원수 같은 가난이 사람을 이렇게도 비참하게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대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게 하는, 나눔의 정신이 부족한 이기주의적인 사회 구조가 그 '화'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貧만 있고 富가 없는 이곳은 말 그대로 빈부의 차가 없는 곳이다.-72쪽

보통 이곳 주민들은 약, 주사, 음식 등 모든 것을 무료로 베풀어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들고 와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문화의 벽을 깨고 직접 농사지은 호박이나 날씬한 아프리카 토종닭을 들고 와 고맙다는 인사를 한 사람이 8년 동안 딱 세 사람 있었는데, 그중에 두 명이 놀랍게도 나환자였다. 과부의 헌금처럼 닭 한 마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육체적으론 문드러지고 사회적으론 버림받았지만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유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감각 신경이 마비되어 뜨거운 것,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해 손과 발에는 화상이나 상처가 가득하지만 감각 신경의 마비를 보완이라도 하듯 보통 사람보다 수십 배나 민감한 영혼들을 지니고 있다. 자그마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 감사를 기어코 무언가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영혼 말이다.-74쪽

병원에 성모 상도 십자고 상도 없고 환자들에게 성당 나오라고, 예수 믿으라고 권유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너무나도 열심이다. 이들이 말없이 변화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멋진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의 영혼이 우리의 진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한 눈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96쪽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왕복 10차로 고속도로 같은 탄탄대로의 뻥 뚫린 인생의 길을 쉽게 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고생할 줄 뻔히 알면서도 웅덩이가 있고 고개가 있어 쉽게 빨리 달리지 못하는 길, 때로는 진흙탕에 빠져 한참을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길, 먼지가 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험한 흙 길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좋은 길만 보면 탄탄대로라고 마음껏 달리고마는 인간의 교만에 제동을 걸고 그것으로 인해 타인에게 주는 상처도 줄이며, 때론 함께 손잡고 때론 누군가를 부축해 주거나 등에 업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갈 수 있는 길, 교육적으로 좋은 길, 미래를 위해서 좋은 길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달릴 수 있는 길, 평탄한 길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인간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 스스로도 골고타로 향하는 길,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57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선 물가가 엄청 싼 것으로 상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모든 것이 두세 배의 가격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의 가격이 그 정도이고 구할 수 없는 것은 가격의 몇 배를 지불한다 해도 구하기 어렵다.-159쪽

물론 도로 사정이 나쁜 것과 기후나 토질이 나빠 농작물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것이 주원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주원인은 이 두 가지 원인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는 것만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정당화되어 버린 무관심' 말이다. 어떠한 말이나 인권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자국의 이권이 없는 곳엔 등을 돌리고마는 국제 사회의 무관심도 그렇고, '나 하나 또는 내 가족 하나도 돌보기 빠듯한데.'하는 개인적 무관심도 그렇다. 선의의 경쟁을 하나의 덕으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관심'은 하나의 덕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무관심'은 엄연한 죄악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168쪽

다르푸르의 아이들은 정말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임이 틀림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꼭 우리가 믿는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내 안에 잠재된 강박적인 사고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 대한 특별한 알레르기가 있었음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다. 이는 종교의 틀에 인간들을 끼워 구속시키려는 바리사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맞서 '종교는 인간을 구속하는 정신적인 틀이 절대 아니다.'고, '오히려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정신적인 해방의 틀이다.'는 것을 외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194쪽

이슬람 지역에서 그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선교 기능이 정말 마비된 것일까? 그건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지금 북 수단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들을 개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안아 주며 위로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나 수치, 틀에 박히지 않는 예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194쪽

이곳에는 생년월일을 신고할 기관이 없다. 게다가 가족들도 기록해 놓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이 자신의 생일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나이를 물어보면 태어난 해에 일어났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생년의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이 태어날 때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였는지, 추수할 때였는지 아니면 건기였는지가 태어난 달을 대충 추측하는 기준이 될 뿐이다.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나이를 병력지에 기록하기 위해 나이를 물어보게 되는데, 적어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손가락 일곱 개를 펴 보이며 '일곱 살'이라고 대답했던 사 년 전쯤의 사건 이후 나는 절대로 이곳 사람들의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보는 사람이 잘못이다. 얼굴의 주름이나 피부의 탄력 등을 보고 추측하여 적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마음도 편하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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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2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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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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