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크레이그 실비 지음, 문세원 옮김 / 양철북 / 2010년 8월
절판


"그러고 보니 스파이더맨은 뉴욕을 벗어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지."
"왜?"
"어, 그러니까, 예르르르르를 들자면 말이지, 스파이더맨이 코리건에 와서 범죄를 소탕한다 치자. 그럼 영락없이 힘을 못 쓸 거야. 날아다닐 건물이 없잖아. 스파이더맨에게 필요한 건......"
"도시적인 환경이라고?"
"바로 그거요, 선생. 그러니까 내 말은, 스파이더맨이 고비 사막이나 남극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거야. 주어진 환경이 땅바닥밖에 없다면 말이야." -88-89쪽

"그러니까 그건 용기가 아니란 거지. 슈퍼맨은 강철 인간이잖아, 이이 멍청아. 천하무적이라고. 그러니 용감해질 필요가 없는 거야. 다치지 않는 걸 알고 총알에 맞서는 게 용감한 거냐? (...) 내 말의 핵심은 이거야. 잃을 것이 많을수록 용기가 더 많이 필요한 법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우월하고 내가 너보다 무한정 똑똑하단 말씀." -94쪽

최근 들어 내게 일어난 끔찍스러운 일련의 사건들 중에 폭탄 투하 사건이 그나마 가장 덜 폭력적인 사건으로 느껴지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실상 가장 끔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건에 용의자 사진이나 피 묻은 장갑 따위는 없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확실히 규정짓기 어렵다. 거리감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일수록 무신경해지고 무책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뉴스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말이다.-208쪽

부모를 죽이고 아이들을 고아로 만든 후 크리켓 공 날리듯 내던지고는 얄팍한 거짓말이나 해 대는 세상. 남들보다 가난하고, 피부색이 어둡고, 또 부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사람이 평생 스스로를 쓰레기로 여기도록 만드는 세상. 삼십억이나 되는 사람을 초청해 놓고 전부 외롭게 만드는 세상. 사분의 삼이 물로 이루어졌다면서 아무도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세상. -209쪽 -209쪽

위로란 얄팍하고 허무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이 가장 나쁘다. 끝없는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잦아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들과 열린 결말, 그리고 사건의 조각들과 각본들.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다. 가장 간절한 것은 진실 아닌가? 그 진실이 무엇을 담고 있건 간에 말이다. -211쪽

재스퍼 존스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여자친구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 어쩌면 유일한 친구였으리라.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다. 그토록 가까운 사람을,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을, 같이 도망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약속했던 사람을 잃다니. 그리고 이곳에 와서 다시 그녀를 떠올리다니.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곳에서. 끔찍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재스퍼 존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재스퍼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슈퍼히어로의 복장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가 말한 상관하지 않는다는 표정,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자주 지어야만 했을까?
그렇게 살면 얼마나 외로울까? 재스퍼가 날 필요로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에서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녀석이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236쪽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내 고통은 물론 상대방의 고통도 같이 느꼈을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함에 있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상대방처럼 짓밟히고 물에 흠뻑 젖도록 해주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다시 채워진 빈구멍과도 같다. 빌린 돈을 갚는 것과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한 행동의 결과물이다. 이는 심하게 상처 입은 결과가 수면 위로 보낸 잔물결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슬픔이다. 아는 것이 슬픔인 것처럼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때로 자기연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자신을 연다는 뜻이다. 껴안건 조롱하건 복수하건 간에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말이다. 착한 사람의 메트로놈은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진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나아가게는 할 수 있다. 틈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성찬식과 같다. 제물이며 선물이다-338쪽

"그럼, 스스로가 정말 대견스럽겠구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거라, 알았지? 아저씨 말 알겠지? 오늘 넌 정말 위대한 일을 한 거야. 그것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거다. 알겠니?" -347쪽

"찰리, 네가 그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아빠가 미안하구나. 괜찮니?"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길을 피한다.
"그래, 아빠도 그렇다고 말하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질지 모르겠다. 참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다."-348쪽

"믹 톰슨이 바보 겁쟁이라서 그래. 시궁창 인생을 사는 인간이지. 두고 보렴, 계속 저러고 살 테니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느니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하지만 언젠간 벌 받을 날이 오겠지.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엔 언제나 해리 롤링스씨 같은 사람들이 버티고 있으니까 말이야."-349쪽

패터슨의 저주. 제목 밑에 아빠 이름이 쓰여 있다. 나는 못된 아이처럼 입술을 실룩거린다. 벅틴의 질투. 견딜 수 없다.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방에 흩뿌리고 싶다. 아빠의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에 도로 던져 주고 싶다. 아빠의 비밀을 공유하면 멋질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그저 배신감만 들 뿐이다. 내 가슴속에서 뭔가 대단히 소중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마음씨가 비뚤어지고 속 좁은 놈이 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작품이 훌륭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먼저 아빠의 서재로 찾아가 그간 힘들게 쓴 원고뭉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원고에 내 도장을 찍어서 말이다. 제목 밑에 쓰인 내 이름을 보며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373쪽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일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 세상이 정해진 규칙대로만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을 거야. 하지만 확실한 진리는 말이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거야. 해야만 한다고." -383쪽

음모와 왜곡이 난무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과 실제로 보았다며 주장하는 사람들이 판을 쳤다. 진실을 목 졸라 묻어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로지의 복막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다른 역사가 쓰이고 있었다. 거짓말과 추측이 하나 둘씩 쌓여 가면서 허구가 진실이 되어 갔다. 잭 라이어넬은 잉크와 똥을 뒤집어썼지만 그는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괴물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다. 인간 말종, 미치광이가 되었다.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마을 전체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교회도 더 이상 그의 영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403쪽

그제야 나는 알게 된다. 그를 알게 된다. 가장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버려진 아이. 나는 항상 재스퍼를 랜들 맥머피라고 여겼고 나 자신은 힘없고 겁 많은 따개비라고, 그래서 그에게 붙어 공생하면서 용기를 위장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스퍼도 나와 같은 이유로 내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내가 똑똑하거나 믿을 만하거나 충성스럽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 아무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스퍼가 그날 밤 내 방 창문으로 찾아온 것은 완전히 겁에 질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내 방 창문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불 주위로 몰려드는 곤충처럼 내 방 창문까지 이끌려 온 것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451쪽

재스퍼 존스도 우리 같은 아이들처럼 두려워한다면 나 같은 아이는 평생을 가도 겁이 없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프리 루가 떠오른다. 배트맨에 대한 우리의 토론도, 용기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말도. 어쩌면 용기가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우리가 걷는 걸음걸이에 얼마큼의 무게가 실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용기란 그런 것이다. 브루스 웨인도 여전히 두려워하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왜냐하면 그는 빌어먹을 배트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란 결국 정직함이다. 그것만이 비결이다. -452쪽

"재스퍼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넌 내가 아는 만큼도 재스퍼를 모르잖아. 로라가 아는 것만큼 말이야. (...) 넌 재스퍼에게 벌을 주고, 짐을 지우고, 또 로라가 바랐듯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똑같은 벌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고. 하지만 너나 재스퍼의 잘못이 아니란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458쪽

새가 하늘을 맴도는 모습과도 같다. 하늘을 나는 느낌을 갖고 싶으면, 매의 발에 긴 끈을 묶어 하늘로 날리면 된다. 더 높이 올리고 싶으면 얼레를 풀고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면서 스릴을 만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 연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면 다시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땅에 서서 구경만 할 뿐 따라 올라갈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을 붙들 수 있을 만큼 체중이 충분히 무겁다는 것도 멋진 일 아닌가? 그래서 그 연을 하늘에 고정시키고 한동안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잘 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 꺼내어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처럼 말이다.-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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