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노래 - 이마 이치코 걸작 단편집 4
이마 이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외출을 할 때 가방에 뭔가 책이 하나라도 없으면 불안해진다. 시간의 공백이 생겼을 때 그 시간을 맛있게 쓸 수 있게 해줄 긴요한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가방이 무거웠고, 두꺼운 책은 넣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급하게 빼어든 이마 이치코 걸작 단편집 4편. 1편부터 골라가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 컨셉은 이어가지만 내용이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므로 사실 순서는 무방하다.  

첫번째 이야기가 타이틀인 '해변의 노래' 

 

물이 말라버리면 '하백'에게 물을 기원하기 위해서 어린 여자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영주의 막내 딸을 보내야 했건만, 자기 딸은 같은 날 시집을 보내고 양녀로 들인 고아 소녀를 하백에게로 보내버린다. 의식에는 규칙이 있다. 기우제에 사용되는 신발을 잠잘 때 외에는 벗을 수 없고, 말이나 배에 타서도 안 된다. 올곧이 자신의 힘으로 취호에 도착해야 한다. 가는 데에 한 달이 걸릴 지 두 달이 걸릴 지 알 수 없고, 가는 도중에 죽어나가기도 한다. 물론, 도착한다고 모두 다 하백에게서 물을 얻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하백'이 나오는 시대이니 '도깨비'가 나오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해서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도깨비가 있는가 하면, 저렇게 딱 봐도 도깨비스런 녀석들도 등장한다. 도깨비와의 거래로 물을 얻고 있던 마을의 풍경이다. 노인과 어린아이, 병자와 여행자를 먼저 희생제물로 마치고 얻었던 물.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까? 

 

하백에게 가는 길에 만난 꼬마 아이. 저 자신도 열 두 살 어린 꼬마이면서 저 어린 아이를 내치지 못하고 함께 가겠다고 말하는 슬리자. 길 안내를 맡은 '엔'이 사실은 살수라는 엄한 소문을 들은 탓에 더더욱 동반자가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마주친 착한 도깨비 부부가 수호 부적으로 이마에 문신을 그려준다. 엔의 이마에도 새겨져 있는 똑같은 무늬.  

죽을 길을 알면서도 먼 길 고된 여정을 시작한 것은,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소녀의 간절한 마음은 과연 하백을 움직일 수 있을까. 진정 하백은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엔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짧은 내용 안에 신화와 전설과 창작의 묘미를 잘 버무린 수작.  

두번째 이야기는 '예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백부를 죽이고 왕이 된다는 '예언'을 성사시킨 현왕. 그러나 자신 역시 왼손잡이 남자 조카 손에 죽는다는 '예언'을 받고 만다. 예언을 한 서쪽 무녀의 목을 베어버리지만 제 목을 들고 달아나는 300년 묵은 무녀!

 

매번 느끼지만 언제나 그 놈의 '예언' 혹은 '신탁'이 문제다. 처음부터 그런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휘둘리지도 않았을 텐데, 거기에 집착해서 엄한 왼손잡이 청년들만 손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어느 곳에서든 반복되고 있다.  

앞서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엔'이 다른 친구와 동행길에 나섰다가 이 사건에 연루된다. 동행인 진파가 왼손잡이였기 때문. 서쪽 무녀를 견제한 자매 동쪽 무녀의 일침이 와 닿는다. 그렇게 인간의 앞날을 점쳐서 좌지우지하고 사람을 휘둘러 그걸 즐기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자신이 몇 년 뒤에 죽을 거란 소리를 들으면 그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구든 발버둥을 칠 것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이야기에선 코믹 코드도 제법 나오는데, 등장인물이 겹친다. 엔과 진파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 

 

세번째 이야기 '얼음의 손톱, 돌의 눈동자' 주인공 한 명. 잘려나간 손가락이 그녀의 표정만큼 애처롭다. 인간과 도깨비의 혼혈로 태어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만드는 저주받은 능력으로 괴로워하는 오누이 중 한 명이다. 하백에게로 향했던 긴 여정의 끝에서 차마 마음 속 가장 간절한 소망을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애잔했다. 다행히 해피엔딩이긴 했지만...^^ 

환타지 장르다 보니 시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의상을 보면 중국 풍이기도 하고 일본풍, 심지어 베트남 분위기까지 골고루 섞여 있다. 인간과 도깨비가 함께 살고, 하백에게 물을 기원하는 풍습까지 나오는 경계 없는 이야기의 흐름이 좋다. 자유분방한 배경이지만 그 안에서 욕심 많은 인간과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을 고루 만날 수 있다. 어느 곳이든 인간의 사는 모습은 늘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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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02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맘대로 품절이란 말입니까? 이케 뽐뿌질을 해놓구선^^:

마노아 2010-08-02 21:34   좋아요 0 | URL
으하핫, 저도 시리즈를 다 갖고 있진 못해서 아쉬움이 무척 큽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