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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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는 디자이너 이상봉 씨를 떠올렸다.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만 광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예술가의 범위에서는 통한다고 억지로 끼워본다. ^^ 

직장 동료들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독서 토론회를 갖게 되었는데 세번째 도서가 박ECD라고 불리는 광고쟁이 박웅현 씨를 강창래 씨가 인터뷰한 바로 이 책이었다. 모임 하루 전에 부랴부랴 읽기 시작해서 모임 당일 아침에 다 읽었다. 그러니까 오늘이었다.^^;; 

인터뷰집인 것도 몰랐지만, 이 책은 내게 익숙한 인터뷰의 형식은 아니었다. 인터뷰집이라고 보기엔 에세이집에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강창래 씨가 지켜보고 느낀 바를 기술한 형식이다. 인터뷰이를 가능한 한 많이 노출시키는 게 더 미덕으로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는 묘하게 박웅현 씨가 많이 안 보이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광고 얘기가 지면을 많이 차지해서 그런 듯하다.  

일단 무척 재밌게 읽었다. 소재로 삼은 '창의성'의 원천은 '인문학'이라는 주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다 느꼈는데 그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전적으로 동감하니까.  

박웅현은 언젠가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광고인이 되기 위한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문학적인 소양입니다.”
박웅현은 처음 만난 날에도 이 말을 했다.
“광고라는 도구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찾을 때 창의력이 필요한 거고 그 창의력을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출판사 열린책들 홍지웅 대표도 같은 말을 했더라고요. 좋은 출판인이 되는 조건도 인문학적인 소양이라는 겁니다.”
공감이 된다. 인문학이란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구체화된 결과물이고,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예술이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다.
– 50쪽  

그래서 주제보다 나로서는 생소한 현장인 광고 이야기가 즐거웠다. 즐겨보는 드라마는 있지만 그 프로그램만 보고 일어서는 편이기 때문에 광고는 많이 보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된 광고 중 상당수는 처음 접한 것들이었다. 문득, 이 책을 보면서 소개되는 영상들을 지면에서 3차원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그런 기술이 현실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실용적이지 않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해리포터에 나오는 그런 입체 책이라면 바로바로 확인하면서 참 즐거울 텐데 말이다. 그런 기술의 상용화가 나 살아있는 동안에 가능하겠지? 뭐 이런 생각을 같이 했다.^^ 

학교 때 신문 만드는 일을 했고, 졸업 후 제일 기획에 입사해서도 그는 프리젠테이션만은 극구 피할 만큼 남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위해서 A4 10장 분량의 내용을 모두 암기해서 아내 앞에서 연습 과정을 거친 후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을 가진 후 프리젠테이션이 점차 쉬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광고 세계에서 성장하고 1인자로 우뚝 서는 과정은 거의 자기계발서의 성공담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큐 얘기도 자주 나왔지만 이 부분은 꼭 필요했을까 싶은 내용. 좀 걸러줘야 하는데 얘기들이 중구난방 식으로 섞이고 같은 에피소드가 반복되는 것도 조금 피로했다. 말하자면 편집이 맘에 안 드는 경우였다.^^ 

'사람'에 집중하고 '진심'에 힘을 싣는 광고를 만드는 것. 그리고 광고주를 설득하는 것. 그리고 끝끝내 성공적인 광고를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놀라웠다. 그가 목표지향형 인물이라고 스스로 고백해서 더 놀라웠다. 그가 바른 길을 가고 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렇지 않은 선택을 했을 경우에는 좀 답이 나오질 않아서. 

직접 보지 못한 광고지만 e편한 세상의 광고는 여운이 무척 깊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기사도 한 편 떠오른다. 톱스타들이 선전하는 아파트 광고가 거품을 더 불리는 까닭에 여러 배우들에게 메일을 보내었던 에피소드였다. 이 책에서 소개한 카피는 이렇다.  

톱스타가 나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살지 않습니다. 
멋진 드레스를 입고 다닙니다.
우리는 집에서 편안한 옷을 입습니다.
유럽의 성 그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주소지는 대한민국입니다.
이해는 합니다.
그래야 시세가 오를 것 같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봅니다.
멋있게만 보이면 되는 건지.
가장 높은 시세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저희가 찾은 답은 진심입니다.
진심이 짓는다.
e-편한세상 

최근에 보았던 래미안 광고의 신민아가 72시간 동안 살아보고 모델이 된다는 내용과 비교된다.  진심의 시세라니, 이렇게 멋진 아파트 광고도 있구나. 내가 아파트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아파트에 들어갈 돈이 충분히 마련이 된 사람이라면 이런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싶을 것 같다. 북극곰 버전은 더 하다. 이건 극장 버전이라고 하는데 내가 갔던 극장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봤다면 울컥 했을 것 같다. 카피는 이렇다. 

불리한 전쟁을 시작합시다.
적이 우리보다 수만 배쯤
강하다고 생각합시다.
우리에겐 식량도
무기도 부족하고 여론도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합시다.
가장 용맹한 백곰마저
얼음 조각 위에서 죽어갔으며
돌고래의 함대는
해변에서
전멸을 당했다는
불리한 전황들을 직면합시다.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시작합시다.
거실에도 자동차에도
버젓이 들어와 번지고 있고
서서히 지구의 온도를 높여가는
적들과 싸워나갑시다.
그들의 야유와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새까만 씨앗들이
겨울을 견디어내듯
조금씩 이겨나갑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을 시작합시다.
e-편한세상 극장용 광고 <북극곰>
– 265쪽

최근에 나를 자주 울컥하게 만드는 이승환 10집의 '단독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첫 마디부터 '불리한 전쟁'을 시작하자니. 불리하지만 해야 하는, 그래서 질 수 없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 어떻게 지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컨셉의 광고를 만들어내기 위한 창의력. 그 바탕이 되어주는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그 거름이 되어주는 넓고 깊은 독서. 이 책이 좀 더 친절했다면 책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좀 정리해서 추천도서로 만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어판이 없거나, 이미 절판됐거나 하는 책들은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그래도 몇몇 책들은 그 분야에서 바이블로 통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만들었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한 번은 꼭 보고 싶네... ^^ 

오늘의 모임에서 책에 대한 얘기는 많이 하지 못했다. 하필 모임 장소가 애슐리였고, 뷔페 먹으면서 독서 토론은, 사실 적당하지 않았다. 우리의 모임이 '토론'보다 '친목'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다음 책은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으로 결정되었다. 내가 한 표를 던지지 않은 책이지만 기꺼이 읽어야지. 참고로, 첫 번째 책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지만 내가 참석하지 못했고, 두번째 책은 '소년병, 평화를 말하다'였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나는 이번 책이 가장 덜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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