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사토 다다오 지음, 설배환 옮김, 한홍구 해제 / 검둥소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전쟁에 대해서 말하는 동화책을 곧잘 모으곤 했는데, 전쟁을 쉽게 설명해주는 그림과 텍스트를 원했던 듯하다. 이 책은 동화책에 비하면 훨씬 더 글밥이 많건만, 마치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듯 쉽게 설명하고 있어 전 연령대에 골고루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태평양 전쟁 때 자원 입대한 소년병이었다. 학교에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꾸중을 듣고는 충동적으로 충성심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섰던 열 네살 소년병은,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며 부끄러운 생각을 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으며 평생토록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이 책은 저자가 1974년에 쓴 글을 다시 여러 전쟁에 대한 생각들을 종합해서 엮은 책이다. 소년병은 중년이 되었고, 다시 노년이 되어서 여전히 전쟁을, 그리고 평화를 얘기한다.  

이 책의 장점은 일단 너무 쉽게 썼다는 것이다. 우리한테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를 묻는다면, 나름대로 어떠어떠하다고 설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명료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 사토 다다오는 그것을 해낸다. 그가 직접 겪었던 태평양전쟁과, 그 앞서 일어났던 중일전쟁을, 그리고 한국 전쟁을 베트남 전쟁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예로 들어가면서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얘기를 한다. 나는 분명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건만 사토 다다오의 차분한 설명으로 그 시간을 되새기며 현장감을 느낀다. 

   
 

 전쟁을 계속하면 할수록 소진되고 마는 상태에 일본군은 처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도 딱 이와 같았다.
따라서 미국이 요구한 대로 중국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만 하면 일본도 그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때까지 “이겼다! 이겼다!”하고 일본군의 승전 소식을 일본 국민들에게 선전했는데, 실은 승리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백일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군인과 정치가들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와 정치가는 자신들의 실패를 국민 앞에 까발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실패를 책임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 36쪽

 
   

또 신선했던 것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복잡하게 얘기하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결국 실패를 책임질 용기가 없었다는 것.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그랬고,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그랬다. 물론 미국은 결국엔 실패를 인정하고 철수했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흘렸던 희생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한 자리 끼겠다고 부끄러운 한 발을 내디뎠던 우리의 아픈 역사도 물론 모른척 할 수 없다.   

   
 

 혁명이든 독립이든 결코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된다.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 이룬 혁명과 독립은 결국 그 나라로의 종속을 불러올 뿐 진정한 혁명과 독립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 또한 똑같은 것을 반대 입장에서 말하면 어떠한 나라의 혁명과 독립에 이웃 나라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심으로 어떤 나라의 혁명과 독립을 도우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가 하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대체로 그 나라를 자국의 종속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돕는 것은 언뜻 보아서는 아름다운 것 같다. 그러나 돕는다고 해도 진정으로 그 나라를 이롭게 하는 지원 방법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돕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 나라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가는 일이 많은 법이다.
– 70쪽

 
   

최근에 프레시안에서 김기협 씨가 갑신정변에 대해서 무척 강경한 어조로 비판했던 게 떠올랐다. 동감한다. 당장엔 좀 더 나은, 혹은 덜 나쁜 이웃의 손을 빌려서라도 무언가 움직이고 봐야 할 것 같지만, 긴 역사의 여정에서 그 선택은 늘 악수가 되곤 했다. 내가 손을 내민 상대는 그저 한 개인도 이웃도 아닌 '국가'이다. 국가에 그런 감정적인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작은 나라에서 발발한 전쟁을 서로 지원하더라도 미국과 소련이 직접 전쟁을 하지는 않았다. 직접 전쟁을 하면 양쪽 다 모조리 죽는 꼴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들에서 전쟁이 있을 때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 국가를 비난해 왔다. 그리고 “이 이상 더 심한 짓을 하면 미사일로 원자폭탄을 투하하겠다!”하고 서로 으르렁거렸고, 그때마다 실제로는 ‘상대편에게서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큰일이야.’ ‘위협을 받더라도 그걸 이겨 내려면 저쪽보다 강한 무기를 보유해야만 해.’ 하면서 점점 더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 122쪽

 
   

계속해서 더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고 보유하려는 그 심리에 대한 설명도 간단했다. 결국은 무섭기 때문이었다. 함께 포기해서 같이 살자고 말하지 않고, 위험하니까 네가 포기해!라고 말을 하는 이기적인 군사강국들. 문득 '침묵의 함대'가 떠올랐다. 핵잠수함의 독립 선포로 각국에서 얼마나 긴장을 하였던가. 그러나 그 잠수함에는 핵무기가 없었다. 비록 엄포이기는 했으나 '핵'이라는 무시하지 못할 무기를 앞세웠던 야마토 함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지극히 평화적으로 얘기했을 뿐이었다. 너무 공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런 상상력이, 그런 바람들이 모두가 같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동력인 것이 아닐까. 전쟁이든, 신자유주의든 그 어떤 폭압적인 시스템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 대안이란 것들은 늘 냉소와 마주치게 된다. 그 냉소를 당장 버릴 것. 가능하다고 믿을 것. 그리고 간절히 바랄 것. 그런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한걸음이 아닐까.  

   
 

 사람은 가족끼리는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비해, 학교에 가게 되면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학습에서 경쟁하게 되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어른이 된 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배운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 145쪽

 
   

어느 공익광고처럼, 당신은 '부모'인지, '학부모'인지 새겨보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1등과 2등을 가르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1등을 만드는 교육 체제를 지향한다고 알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정말로 불가능할까?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하고 겁부터 먹었던 것은 아닌지......

지난 정권의 10년 세월 속에서 실망하고 지친 국민들이 다음 대선에서 MB를 뽑았다. 지난 주에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개발을 마구 외치던 후보자들이 과거처럼 손쉽게 당선된 것 같지 않다. 그 개발 논리도 우리의 삶을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도 깨달은 듯하다. 반공도, 기나긴 휴전 대치 상황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체득했으면 한다. 이제는 평화를 얘기할 때라고. 평화를 갈망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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