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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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이미 당신은 그 어떤 어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대부가 바보 취급했던 담임선생도, 당신을 인질로 잡은 셈이었던 부모도, 어느 날 대부의 집으로 찾아와 유대인에 대해 독설을 퍼붓던 목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목사에게 "하지만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어요!"라고 하자 목사가 이렇게 대꾸했다지요. "얘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란다."-20쪽

어른들의 세계에 당신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강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당신의 세계 전체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난 항상 당신의 힘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밑에 숨은 당신의 연약함도 느끼곤 했습니다. 당신이 극복해낸 그 연약함을 난 사랑했고, 당신의 연약한 힘에 놀라곤 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어, 이 세상에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없던 자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의 사랑이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일생 불변하는 계약이 되어야 했습니다.-20-21쪽

나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신뢰는 내게 위안은 될망정 안심은 되지 못했습니다.-42쪽

당신은 베케트, 사로트, 뷔토르, 칼비노, 파베제를 읽었습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도 들었어요.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해서 필요한 책을 사기도 했지요. 나는 말렸습니다. "나는 당신이 독일어를 한마디라도 배우는 게 싫소. 난 다시는 독일어를 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해주었습니다.-50쪽

직관도 감동도 없다면 지성도 없고 의미도 없음을 당신은 인지과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은 전달될 수 있지만 증명해 보일 수는 없는, 그러나 당신이 몸소 겪어 얻은 확신의 토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의 권위-그것을 '윤리'라고 합시다-는 논쟁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 이론적 판단의 권위는 논쟁으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왜 당신은 항상 옳은 거지"라는 내 말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내 판단이 필요하기보다는, 내게 당신의 판단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죠.-53쪽

당신은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한 번 가면 아무도 못 돌아오는 나라에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낭만적 영어로 하면 이렇게 요약되지요.

There is no wealth but life.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존 러스킨이 한 말.-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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