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호조반’이었어요.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 돕는 것인데 좋은 성적을 내면 돕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칭송받았지요. 그리하여 모두가 최우등이나 우등이 될 수 있었어요. 자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랐어요. -134쪽
모택동 주석이 처음 농민군을 조직할 때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수준 높은 이론이나 교양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보단 실제적인 행동 수칙, 이를테면 인민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마라, 바늘 하나라도 빌리면 갚아라, 대소변은 장소를 가려서 보아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 일상적인 것들이 훨씬 더 사람들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모택동을 지지하는 홍군들이 엄청나게 모였던 것이지요. 조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161쪽
-지도부가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존중을 받을 뿐이라구요? 가능한가요? -역사를 보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누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지도부가 권위를 가지기는 해요. 하지만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이 될때 주어지는 것. 제대로 인민을 위하지 못한다면 절대 권위를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남쪽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지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당원들이 맡아요. -그렇다면 정책 결정과 집행이 결국 당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에서는 어떤 문제든 반드시 회의를 거치지요. 처음에는 이런 문화들이 정착되는 시기였으니까 회의를 참 많이 했어요. 여기서는 북한이 무조건 독재를 한다고만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북조선은 상당히 민주적인 편이죠. 전쟁때도 해마다 당 대회를 열어서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그랬거든요. 공개회의 같은 것을 열어 충분히 정책을 알려주니까 인민도 정책과 법령의 내용을 다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178쪽
-사람들은 자꾸만 남조선은 민주주의 국가고 북조선은 독재 국가라는 식으로 말을 해요.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부르주아 독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구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뜻이 아니예요. -다 같은 민주주의지만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독재를,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 예, 맞아요. 나는 이미 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184쪽
-그래서 여전히 저쪽의 민주주의를 더 신뢰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저쪽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마지막 말씀, 한 번만 더 해주시겠어요? 어쩌면 그것은 선생님의 이상향일 뿐만 아니라, 힘 없고 가난한 백성이,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역사의 주체인 백성이 정치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가장 근본 생각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 그거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건, 내가 북에서 다 경험한 것입니다. -185쪽
-전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요. "남파 ‘간첩’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파 ‘공작원’이라고 해야 옳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예,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것이니까요. 정전협정이 조인되고도 미국 때문에 통일 문제는 한 번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어요. 국제회의에서 여러 번 정당한 남북통일 방안들을 제기했지만, 남쪽에서는 보도도 안 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남쪽에 알릴 필요가 있어서 내려왔지요. 그게 1954년이었어요. -259쪽
세계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주인은 자신이고요. 그러므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가 혁명을 하는 것도 다 주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가장 기본은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자주성’, 그러기 위해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창조성’, 거기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의식이라는 ‘의식성’ 이렇게 세 가지를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이 처한 현실에서 나온 겁니다. -268쪽
-남에서 주체사상이란, 객관적으로 연구되기보다 이데올로기 힘 겨루기 과정에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폄하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최근에는 주체사상 논쟁 자체가 허구라는 시각도 있고요. 왜냐하면 결국 주체사상이란 북한 체제의 역사적인 형성물이자 체제 정당화의 이데올로기인데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논리를 정당화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건 허구라기보다는 회의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모든 사상이 역사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잖아요. 주체사상을 흔히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도 다 구체적인 우리 나라 역사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사상이란 게 본디 실제 역사에서 만들어지고 보편화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걸 떼놓고 말할 수 있겠어요. 혁명이란 과거의 제도를 바꾸는 거예요. 왕이 하는 일을 ‘天命’이라고 했어요.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革命’이에요. 여기서 ‘革’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인 ‘皮’와는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269쪽
한 가지 짚을 것은 자본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뤘지만, 그 혁명은 거기에서 멈춘 채 권력을 교체하는 것에서 끝났어요.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삼권분립이라는 것도 봉건 군주들, 승려들,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야합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의회는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차지하고, 행정은 봉건 군주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사법은 승려의 몫이 되고 말았어요.
민중은 혁명에 동참했지만, 열매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에는 상층부만 교체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270쪽
사회주의 혁명은 권력을 쟁취한 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생산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니까요. 사유재산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대체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 아닙니까?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체제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권을 빼앗아서 그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회주의 혁명도 권력을 쟁취한 뒤에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사회가 완성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 의식을 바꾸면서 좀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수준의 사회는 있을망정, 완성된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271쪽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좀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제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식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정신이에요. 미국이 쿠바같이 작은 나라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아요. 50년 동안이나 온갖 모략과 압박을 가하면서 북조선을 없애려고 하지만 북조선은 여전히 건재하잖아요. -그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으시는군요. -예, 그 사회의 인민들이 당과 수령, 곧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못 없애는 거지요. 북이 아무리 독재 사회라지만, 인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면 저렇게 유지될 수가 없지요. 남에서도 박정희 독재를 겪지 않았나요? 그때 학생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항거했습니다. 북이 미국에 대해서 아직도 저렇게 당당한 것은 그 사회가 독재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것이 북의 인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272쪽
-그러니까 선생님 사상의 핵심은 바로 ‘사람’이군요. 노동력의 핵심, 역사의 주체, 그러나 완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의식 개조를 해야 하는 존재. 그것을 이른바 ‘민중’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요? 전에 선생님이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한다고 한 바로 그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되는 거지요? -허허. 그렇게 보아도 되겠지요. 진정한 혁명이란 바로 백성, 사람, 민중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바탕이라고 생각해요. -273쪽
-지금껏 선생님의 수감 생활을 듣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그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낭만도 웃음도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안에서도 "역사는 흐른다"는 거예요. -327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근본적으로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 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 여전히 사회주의가 좋으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지요.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새로운 사회가 오는데 어떤 사회가 올 것인지를 모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창조해 가는 과정이에요.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고 단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돼요. 그리고 그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지요. -332쪽
우리는 먼저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가 분명히 있고, 또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려면 많은 장애들을 겪어야 하지요. 그 장애를 제거하는데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혹은 1세기가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그러므로 모든 것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극복해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더 높은 사회를 향하는 꿈을 잃지만 않으면 되요.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334쪽
모든 역사의 발전 과정에는 특수한 계기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구요. 나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그 과정을 만들면서 바꾸고 나아가는 사람……. 나는 그렇게 살아 있어요. 하하하. -336쪽
선생님은 오래된 기억들도 마치 앨범을 넘기듯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십 년 전 일도 희미한데, 사람 이름이나 지명까지도 정확히 기억해 내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항상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그 뒤에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기억의 힘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박건웅) -345쪽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다양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와 다르게 살아온 한 사람을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자체로 인정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 땅이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며 자유롭게 사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말이지요.(박건웅)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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