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폐지운동은 18세기 초 인간 존중, 인류 평등 사상과 함께 고개를 들었고, 19세기 들어 본격화했다. 영국에서는 퀘이커 교단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이 활발히 벌어져,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의 그레이 내각이 성립된 직후인 1833년 노예해방령이 의회를 통과했다. 프랑스에서는 그 이듬해인 1834년에 노예폐지협회가 만들어졌고, 1848년 2월 혁명 뒤에 노예의 완전한 해방이 이뤄졌다.-11쪽
1962년 1월 3일, 가톨릭 성직자들을 탄압했다는 이유로 바티칸 교황청이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파문했다. 이로써 카스트로는 11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15세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이어 가톨릭 파문 리스트에 오른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프랑스혁명 때도 그랬듯, 쿠바혁명의 가장 커다란 적도 외세나 기득권층과 결탁한 가톨릭교회라는 것이 카스트로의 판단이었다. 그는 혁명 이후 교회의 여러 특권들을 폐지했고, 파문을 당한 뒤에도 크리스마스를 평일로 만드는 등반교회 정책을 계속 펼쳤다. 쿠바에서 크리스마스가 다시 휴일이 된 것은 교황 바오로 2세가 아바나를 방문한 1998년 이후다.-13쪽
카뮈는 젊은 시절 잠깐 공산당에 적을 두기도 했지만 결국 우파로 선회했는데, 기실 그의 우파적 세계관은 초기 에세이나 소설의 섬세함과 머뭇거림 속에 이미 배태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 대한 카뮈의 침묵은, 비록 그가 고향 알제리와 그곳의 친지들을 저 자신과 프랑스의 본질적 구성 부분으로 여겼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책임을 피한 것으로 비판받을 만하다.-14쪽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가 89세로 죽었다. 요시히토 왕의 장자인 히로히토는 26년에 즉위한 뒤,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을 주도하며 군국주의 일본 현대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천황(텐노)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이르는 칭호다. 중세 봉건시대 일본의 천황은 흔히 쇼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천황은 오래도록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 그들 말로 아라히토가미였다. 히로히토도 마찬가지였으니,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 가운데 최고 전범이라 할 그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인간 선언' 하나로 일본국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물러난 것은 종전 한 해 뒤인 1946년이다.
전쟁 시기 히로히토는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였다. 그런데도 전범자 처벌을 위한 도쿄 재판의 피소인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일본은 난숙한 자본주의와 최첨단의 학문, 기술이 원시사회의 유치한 신화와 어우러져 있는 야릇한 나라다. 다수의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바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의 후손인 진무 헌황이 즉위한 것이 기원전 660이고, 히로히토는 진무의 124대 직계손이다. 이른바 만세일계다.-17쪽
1863년 1월 10일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됐다. 패링던스트리트와 비숍스 로드의 패딩턴을 잇는 6km 구간의 이 첫 지하철은 증기기관차로 운행됐다. 전기 철도 방식이 도입된 것은 189년에 들어서다. 유럽 대륙에서 처음 지하철이 들어선 도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896)다. 뒤이어 189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1900년에는 프랑스의 파리에 그리고 1902년과 1906년에는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차례로 지하철이 들어섰다. 미국에서는 1901년 보슨턴에 첫 지하철이 생겼고, 뉴욕의 지하철은 1904년에 개통됐다. 한국의 첫 지하철은 서울시 1호선 서울역-청량리 7.8km 구간으로, 1971년에 착공해 1974년 8월 15일 개통했다. 광복적 기념식이 열리던 서울 국립극장 단상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재일동포 문세광에게 저격당한 날이었다.
"그는 이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이따금 뒤로 걸었다/자기 앞에서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 이 시는 파리 지하철 공사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시들 가운데 뽑힌 것이다. -20쪽
1665년 1월 12일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64세로 작고했다. 그의 생업은 변호사였고, 툴르즈 지방의회가 그의 활동무대였다. 수학은 그에게 일이 아니라 취미였을 뿐이다.
페르마는 이 정리를 평소 지니고 다니던 책 귀퉁이에 적고는 이어 "나는 이 정리를 증명했지만, 여백이 너무 좁아 생략한다"고 덧붙여놓았다. 이 정리는 '페르마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그 뒤 수많은 수학자들을 괴롭혀오다가, 1995년에 와서야 영국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와 리처드 테일러에 의해 완전히 증명됐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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