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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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역사 저술가인 이덕일씨의 저술 목록들은 꽤 방대하다. 더구나 이 분야 다른 서적들에 비하면 절판본들이 수시로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도 남다르다. 어제도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 개정판으로 나왔다. 단순히 표지나 제목만 갈아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목차를 보니 내가 갖고 있는 구판보다 2개의 소제목이 추가되었는데 분량상으로도 40여 페이지 정도 추가된 듯하다.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암... 이러면서 이 책을 다시 들여다 본다.  

책은 모두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기실, 이전에 주장했던, 혹은 책에서 다루었던 주장들의 반복이기는 하다. 하지만 묻지마 재탕은 당연히 아니다. 반복된 주장은 그만큼 강조하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고, 저자의 연구 성과에 따라 논박의 근거는 더 촘촘해질 수 있다. 큰 주제 네 가지를 먼저 살펴보자.

1부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2부『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3부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4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네 개의 주장은 기실 하나의 주제로 통합된다.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혹은 떨쳐낼 의지가 전혀 없는 식민사관의 줄기라는 것. 자국의 역사를 확대 포장하여 신화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하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자국의 역사를 일부러 축소 은폐하는 것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을까? 주장하는 근거에 대한 반론은 제기할 수 있지만, 우리 고대사가 이러했다, 우리 영토가 이러했다... 라는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산물로만 보는 것도 곤란하다.   



저자가 사료를 들어서 따박따박 따지고 들며 한사군의 위치를 추적한다.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 추종하는 쓰다 소우키치의 식민사관의 허술하다 못해 심한 비약들을 성실히 반박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건만, 북한의 주장이기 때문에 무조건 덮어놓고 거부하는 자세는 정말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9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강조한 나머지 황당하게도 평양에 조성된 단군릉 같은 것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두번째 주제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무척 재밌게 읽혔다. 더불어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연구 결과는 분통을 터지게 만들었는데, 국민 혈세가 이렇게 농단당하고 역사가 마구 짓밟히는 데에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아울러 국정 교과서의 엉터리 서술들은 거듭해서 읽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울화가 치미게 만든다. 내가 6년 동안 마주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도 그때그때 조금씩 바뀌어 갔는데, 그것이 새롭게 발견된, 혹은 새로운 연구 성과로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짜맞춰진 서술이라면, 그 책을 토대로 역사를 공부하는, 또 주입받는 이 나라 학생들은 보통 가여운 게 아니다. 이러니 역사 과목은 만년 암기 과목으로 눈총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되고 만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1971년 우연히 발견된 충청남도 공주시의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 릉이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삼국사기 덕분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는 "왕의 휘는 사마인데, 혹은 융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어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523) 5월 "세상을 훙하셨다"고 전하는데, 무덤에서 나온 지석에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일에 붕하셨다"고 적혀 있다. 김부식은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만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으로 바꾸었을 뿐 내용 자체는 사망월까지 정확하게 기재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허구성과 악의적 왜곡을 여실히 알 수 있다. – 203쪽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작물까지 함께 폄하되는 건 옳지 않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위에서 제시한 무령왕릉뿐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도 여실히 파악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주장의 뿌리인 쓰다 소우키치의 고민에 먼저 접근해야 한다.  

   
 

실증주의를 표방한 쓰다 소우키치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일본서기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허위사실이 많이 발견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는 일제 식민통치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으로 몰았지만 일본서기를 연구할 때는 진지했다. 그 결과 쓰다 소우키치는 1942년 비공개재판에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232)
일본 제15대 오진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그 실재가 불분명하다는 쓰다 소우키치의 말이 황실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대표적 황국사관론자라는 점에서 이는 일본서기가 갖고 있는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14대 쥬아이천황까지는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다. 일본서기 초기기록은 사실로 볼 수 없는 내용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주갑제’가 등장한다. 주갑이란 환갑, 회갑과 같은 말로 60년을 뜻한다. 일본서기는 120년 정도를 끌어내려야 사실과 들어맞는다. 일본서기는 유랴쿠(21대 천황) 20년(476)이 되어서야 비로소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들어간다.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비교해 그 진위를 가려야 한다. 삼국사기가 진위를 판정하는 저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주류 사학자들은 거꾸로 삼국사기에 주갑제를 적용해 시기를 끌어내렸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온조왕이 재위 27년(서기9) 마한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를 3주갑(180년) 끌어내려 초고왕 24년(서기 189)의 일로 보거나 4주갑(240년) 끌어내려 고이왕 16년(서기 249)의 일로 본다. 심지어 6주갑 끌어내려 근초고왕 24년(서기 369)의 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80년에서 360년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은 주갑제가 아무런 원칙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33)

 
   

고고학적 유물로도, 1차 사료로도 파악이 되고 있는 것들을 식민사학의 후예인 주류 사학자들의 입맛에 따라 우리 역사가 부정되고 있다는 건 지극히 비극적이다. 더 큰 비극은 그같은 일이 여전히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걷어내기란 참 힘들다는 현실적 자각이다.

3부 노론사관의 조선 후기사 왜곡 문제는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언급했었다. 아마 이 책을 나오게 만든 가장 큰 동기가 되어준 건 새롭게 발견된 정조의 어찰 때문이지 싶다. 노론 영수 심환지와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을 빌미 삼아 저자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준 '정조독살설'에 대한 일제 공격이 감행되었는데, 꽤 흥분했을 법하지만 나름 감정을 누르고 저자는 다시 또박또박 반박을 한다. 제시된 것들이 정조독살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증거가 되는 거라고. 

전문가가 아닌 내가 생각하기에도, 새롭게 발견된 편지들이 당시 정조와 노론 신하 사이의 어떤 관계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 의해서 정조가 죽임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보기는 비약이 심해 보인다.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던 정조는 즉위년부터 국왕 살해 기도와 맞닥뜨리는 위기 속에서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왕권을 강화시키고 군사력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노론 벽파들은 현실적으로 군사 쿠데타로는 정조를 끌어내릴 수 없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은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역시 그들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만큼의 압도적인 힘을 갖추지 못했다. 정조와 심환지 사이의 편지들은 그렇게 온전히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 그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을 주류 사학자들이라고 몰랐을 성 싶지는 않다.  

더군다나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점, 정조 사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서찰이 심환지가 정조의 충신이었다라는 비약은 거의 엽기적으로 보인다.  

이런 노론 정치 세력에 대한 역사 왜곡은 결국 다시 식민사관으로 귀결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독립운동사 말살 정책은 읽는 내내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은 물론 ‘니스와 페인트’라는 도료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은 국사 교과서가 지면이 부족해 삼부의 활동내용을 일체 적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술한 속내는 조선시대의 상소문의 표현을 빌리면 “길가의 돌도 그 마음의 소재를 아는 것”으로, 식민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술이다. (328)

 
   

근현대사 교과서를 보면 실제로 독립운동의 무장투쟁 부분은 몹시 축소되어 있고 건너뛰기가 많다. 반면 당시의 생활상은 무척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저간의 의도를 파악해 보면 일제 식민살이가 우리에겐 '축복'이었다고 말한 K대 교수님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그 교수님 한 사람의 망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그같은 시각을 가진 주류 사학자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조직에 대한 부분은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근현대사의 대목이다. 여기쯤 오면, 근현대사를 선택해서 수능을 치르려고 결심했던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교과서 기술 자체가 느닷없고 뜬금 없기만 하다. 이 부분은 현대사 연구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우리의 참담한 정치적 파탄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데,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가 되다 보니 정의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인 ‘정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1998년이고, ‘참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2005년이다. 참의부연구는 그나마 참의장 김승학의 증손자가 만학으로 역사학에 투신해 거둔 성과이고 신민부는 아직도 박사학위 논문 하나 없는 형편이다. (334)

 
   

독립유공자들이 비참하게 살다가 조상을 원망할 지경에 이르게 만드는 나라에서 친일부역자들의 후손이 떵떵거리고 살며 친일인명사전에 이름 한 줄 올라간 것 마저도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후손의 도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서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다.    













한일합방조약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명단을 보면서도 역시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왕실 인물들과 무수한 노론 인사들... 그 이름이 부끄러웠다면 역사를 왜곡할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반성하고 참회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얼굴짝이 두꺼운 그들에게는 너무도 소원한 일이다.  

비록 내가 이덕일 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책에서 펼치는 저자의 모든 주장에 대해 완벽하게 다 수긍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이 주장은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구나... 혹은 여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동의에 비하면 크지 않은 비중이다. 이름 석자만 보고 무조건 덮어둘 것이 아니라 좀 더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비판은 그 다음에 하시라.  

덧글) 오타가 몇몇 있다. 분명 다음 쇄가 찍힐 터, 수정 반영되었으면 한다.  

200쪽과 201쪽에서 광개토대왕을 '광대토대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66쪽에 학문권력이 얼마나 위허한 지경>'위험한' 지경
318쪽. 아래의 목록은 ‘한일합방 공로작 수여자들의 본관과 소속 당파’는....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몹시 긴데,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을 끊든가 조사를 바꿔줘야 할 것 같다.
328쪽에 복도와 응접실, 미실, 아이들 방.... 중에서 '미실'은 설마 선덕여왕의 그 미실 같지는 않고 응접실의 오기가 아닐까 싶다. 본문 소개에는 '응접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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