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이야기 1 - 얀과 카와카마스
마치다준 지음, 김은진 외 옮김 / 동문선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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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공지영의 책으로 기억한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소개되었던 책. 책을 읽고 바로 처분한 까닭에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소개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그 글을 읽고나서 나도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꽂이에 책을 꽂아둔 지는 좀 되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 바쁘게 책을 한 권 골라야 하던 순간 눈에 확 들어와버렸다.  

몹시 추운 날씨를 기록한 오늘, 건물을 날림으로 지어놨는지 오전 내내 난방을 해야 오후에 조금 손가락이 펴지는 교무실에서 이 책을 읽었다. 어디선가 라디에이터를 구해와서 언 발을 녹이려고 했건만, 과부하가 걸려서 컴퓨터 여섯 대와 인터넷 전화를 다 잡아드시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컴퓨터 정전을 경험하며 오들오들 떨면서 읽었던 거다. 춥고 추웠던 그 시간에 읽은 책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따뜻했으니까. 

얀은 고양이, 그리고 카와카마스는 물고기다. 카와카마스가 어떤 물고기인지 들어보자. 

*카와카마스...... 러시아명은 시튜카, 영어로는 파이크(pike: 콘들매기류). 대형 담수어로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 암녹색이며, 1미터 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다. 장수하는 물고기로 1백년 이상 산다고도 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도 철갑상어가 백년 이상 산다고 나오던데, 러시아 쪽 물고기들은 장수하는 법인가 잠시 갸우뚱... 

암튼, 혼자 사는 얀의 집에 어느 날 카와카마스가 방문하면서 두 친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제나 먼저 인사하는 건 카와카마스인데,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참 좋다. 

   
 

 안녕! 오늘은 날씨가 너무너무 좋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듯 멀리까지 나와 버렸지 뭐야. ......앛, 나는 카와카마스야. 음, 그리고 저 멀리 빛나는 강에 살고 있어. ......아니지, 마나서 반가어. 카와카마스라고 해. 저 멀리 빛나는...... -21쪽

 
   

두 친구는 서로가 살아가면서 익힌 지혜에 대해서, 기술적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이 얀이 초원 생활에 대해, 버섯이 많이 나는 숲에 대해, 그리고 잼 만드는 법과 그 보존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카와카마스는 강에서의 생활에 대해, 플랑크톤이 많이 있는 장소에 대해, 즐겁게 헤엄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돌아갈 때가 되면 언제나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차, 그래그래, 내일은 이름의 날 축제여서 버섯 수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저, 안타깝게도 소금하고 버터가 다 떨어져서 말이야...... 있잖아, 저, 미안하지만 그것들을 좀 꾸어 줄 수 있겠어?" -23쪽

 
   

겸연쩍은 표정으로, 첫 만남에서부터 뭘 꾸어달라고 말을 하는 카와카마스가 뻔뻔해 보일 법도 하건만, 얀은 망설이는 법이 없이 언제나 기꺼이 청하는 것들을 내준다.  

그렇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카와카마스는 다음 날의 이름의 날 축제를 위해서 또 다시 뭔가를 요청하고, 얀은 내주는 것의 반복. 이러다가 살림을 차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다. 그렇다면 카와카마스를 그렇게 철판 깔게 만드는 '이름의 날' 축제는 무엇일까? 작가님 표 설명을 다시 보자.  

* 이름의 날...... 영명축일. 러시아정교에서는 1년 내내 성인의 축일이 지정되어 있다.(성자는 1천5백 명 이상이나 된다.) 따라서 자신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의 성인의 날이 그 사람의 이름의 날이다. 

무려 천 오백 명 이상의 성자가 있으니 날마다 어느 성자의 축일이 이어질 것이고, 그 이름과 관련된 사람은 이름의 날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 종교가 생활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고 그것이 기념일로 승화된 것이 눈길을 잡는다. 직접 그 축일의 광경을 본다면 더 좋겠지만... 

암튼, 그렇게 늘 방문하고 맞이하는 카와카마스와 얀의 만남은 반복되면서도 지루함이 없고, 되풀이 되는데도 낯선 설렘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날은 이런 인사로 등장하는 카와카마스를 어떻게 문전박대할 수 있을까? 

   
 

 안녕! 저녁 식사는 다 마친 거야? 그거 잘됐다. 달빛이 너무너무 고와서 그만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버렸지 뭐야. 정말로 아름다운 달밤이야. 이런 밤에는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걸으면서 이런 시를 지었는데 들어 볼 테야? -40쪽

 
   

그리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시의 향연. 

만약 저 두 친구가 고양이와 물고기가 아닌, 닳고 닳은 인간 어른이었다면 우리는 색안경부터 쓰고서 그를 판단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의 인사에 대해, 그의 의도에 대해, 그가 빌려달라고 하는 행위에 대해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먼저 채우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달빛이 너무 고와서 멀리까지 나가버린, 그렇게 마주친 친구에게 시 한 수 읊어줄 마음의 여유를 어느 때에 우리는 잊어버렸을까.  

두 친구의 만남이 늘 지속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날짜를 건너 뛰기도 하고, 몇 달씩 못 보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얀이 카와카마스를 찾아 간 날, 카와카마스는 마치 어제 헤어졌던 친구를 오늘 다시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맞아준다.  

그리고 얀을 배웅하면서 이젠 뭘 꾸어달라가 아니라 뭐가 필요하니 갖고오라고 부탁한다. 역시나 내일 있을 이름의 날 축제를 위해서. 또 역시나 주저함 없이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말을 하는 얀. 

인간의 셈법으로는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를 주어야 할 것 같고, 하나를 주었으면 하나를 받아내야만 할 것 같은 세상인데 얀은 자기 것을 나눠주고 내주어서 더 행복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엉뚱하고 당돌하기까지 한 카와카마스는 누구보다 얀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멋진 친구이다.

글밥이 많지도 않고 가끔 그림도 마주치면서 빠르게 넘길 수 있는 책장이지만, 이 책은 천천히 읽을 때 더 잔잔한 감동을 받을 듯하다. 내게도 뭘 달라고만 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럼에도 내주는 게 아깝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되는 동무가 있다. 그리고 내게도 무엇이든 주고자 애쓰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같이 떠오른다. 얀과 카와카마스같은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은, 안달복달하지 않는 따뜻한 친구 관계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난방을 계속해서 실내가 따뜻해진 탓이 크지만, 마음도 같이 따뜻해져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2권도 역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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