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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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제목에 담긴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이전에 내 첫 인상은 그랬다. 일단 제목은 멋지다고... 

반딧물의 묘, 였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몇 년 도에 내가 죽었다...라는 참전 군인의 나래이션으로 시작되었던 애니메이션. 전쟁의 참상 속에서 굶어 죽은 여동생이 나오고, 그 자신도 죽어버렸던 나이 어린 군인의 이야기...  

그 애니가 떠올랐던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된 다음 글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은 친구의 일기장 첫 머리에 쓰여 있었다던 저 문장. 친구는 자살을 한 것일까?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내 상상력은 딱 그만큼이었다. 이 친구는 뭔가 커다란 고민이나 혹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겪다가 그만 자살을 하고 만 걸거야!라고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그런 죽음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기도 했고. 

좀 뜻밖의 전개였다. 처음엔 확실히 무겁게 시작했다. 두 달 전에 죽은 친구의 일기장을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고, 친구의 엄마가 대신 읽어봐달라고 내민 일기를 읽으려 시도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부모의 이혼과 부모의 재혼으로 방황과 갈등을 겪은 중3의 유미. 전학온 학교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날나리' 과로 취급받으면서 더 어긋나기 시작하는 학교에서의 불협화음, 그 와중에 유일한 친구였던 이웃집 사는 재준이의 급작스러운 사망. 뭔가 커다란 비밀이 밝혀질 것 같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음이 아파... 이러면서 책을 덮을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좀 다르다. 그런 예상은 거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죽은 아이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프고, 남겨진 자들의 고통도 안쓰럽기 짝이 없지만, 이 책은 그렇게 뻔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고. 

유미와 재준이는 서로 다른 친구들을 좋아했다. 유미는 좀 논다 하는 버터남 위정하를, 재준이는 여자애들이 재수 없어하는 청순가련형 새침떼기 정소희를 좋아한다. 두 사람 모두 고백했다가 퇴짜 맞았고, 서로를 위로하느라 춘천 기차 여행을 다녀오면서 소주를 마시며 쓰라린 속을 더 쓰라리게 만들었던 추억도 있다. 워낙 자유분방한 유미가 비교적 위정하의 그림자를 빨리 떨쳐낸 것에 비해서 재준이는 그후로도 오래오래, 사실은 죽을 때까지 정소희를 사랑했다는 게 다르지만.  

학생을 이해해주지 않고 선입견만 내세워 닥달만 하는 전형적인 교사도 나오고, 서로의 뜻만 고집하느라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고압적인 아버지들도 등장한다. 오로지 공부공부공부만 외치느라 자식 숨이 막히는 것도 모르고 자식에 올인하는 어머니도 등장한다. 여기까지도 지극히 평범하다. 그게 평범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역시 또 비극이지만... 

남다른 캐릭터는 유미의 새아빠다. 가난한 작사가인 새아빠는 늦잠 자기 일쑤인 엄마 대신 유미에게 밥을 차려주고, 유미가 반드시 '새'아빠라고 부르는 걸 존중해 주면서 오히려 즐기기까지 하는 유쾌한 사람이다. 새아빠가 담임에게 혼이 나서 돌아온 유미에게 해주는 멋진 말을 들어보자.  

   
  그래, 확실히 그 선생님은 어른스럽진 못하구나. 거기다 술집 여자, 이런 말을 하다니 선생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유미야, 나는 기본적으로 어른이 해서 나쁜 짓이 아니라면 아이가 해서도 나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해서 나쁜 짓이라면 그건 어른이 해도 나쁜 짓인 거야. 그러니까 귀를 뚫어선 안 된다, 이런 규율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아직 어릴 때는 자기가 한 일에 책임질 능력이 없으니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좀 과잉보호로 여겨지지만 염색이나 귀 뚫는 걸 불량학생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막는 거고. (76쪽)  
   

모든 경우의 수에 저 얘기가 맞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귀 뚫는 것 정도가 아니라 담배를 피웠다... 라고 한다면 좀 곤란해지지 않는가. 물론 나는 어른이 담배 피우는 것도 싫어하지만... 

어른과 아이를 동일 선상에 놓고서 대등하게 대우해 주고, 차분하게 설득을 먼저 해주는 아버지라니, 너무 멋지다. 어쩌면 '새' 아빠여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한술 더 뜬다. 재준이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을 옮겨와 보자. 

   
  지난번 놀러갔을 때 걔네 엄마가 그랬다. 현재의 학교 교육은 고양이고, 금붕어고, 뱀이고, 코끼리고 모두 모아다가 각자 잘 하는 걸 더 잘 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동물들을 똑같이 만들게 하는 교육이라고. 고양이더러 물 속에서 헤엄도 치고, 똬리도 틀고, 코로 물도 뿜으라고 요구하는 교육이라고 말이다.  (140쪽)  
   

멋진 엄마다. 그 엄마의 표현이 옳아서, 그래서 더 속이 상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고, 선택의 기회를 주는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에겐 100점 짜리인가... 설마, 그럴 리가...  이번엔 유미의 반응을 보자. 

   
 

 그래, 우리 엄마 역시 내게는 감옥이다. 모든 걸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같지만 그러기에 나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모든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반항할 필요가 없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건 또 하나의 감옥이다. 결국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다 감옥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149쪽)

 
   

자유의 뒷면에는 언제나 '책임'이라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유미의 엄마는 그 양면의 얼굴을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유미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 무게를 일찌감치 알아버린 유미는, 그래서 또래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는, 동시에 건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아이들보다 덜 성숙하기도 하는, 더 유치하기도 하는 이런 어른들의 모습도 우린 익숙하다.  

   
 

 자기가 사과도 할 줄 아는 어른이란 데 대해 아빠는 만족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한테 대해 미안한 마음보다 그런 자부심이 더 느껴져서 나는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170쪽)

 
   

전날 아들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는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더 폭력을 쓰는 아버지보다는 낫지만, 아이에게조차 눈치 채이는 저런 마음은 솔직히 부끄럽다. 그 사람뿐만의 일이 아닐테지만. 

재준이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한 채 일기장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는 다소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히려 일기장의 끝을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짐작했던 그런 죽음이 아니었고, 비록 짧은 인생을 살다가 죽은 아이의 인생 어느 한자락을 들여다 보는 거지만 그 소소함의 소중함과 평범함의 특별함이 따뜻해서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은 청소년 추천 도서로 늘 포함되었고, 어느 학교에서는 이 책을 읽기 싫다고 거부했던 학생이 자살을 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학생의 자살이 이 책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 학생도 이 책을 읽었더라면, 두려워하고 거부했던 그 '죽음'과는 달랐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비극은, 권장도서이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우리 교육의 방식과 죽음으로 달려갈만큼 위태한 행보를 걷고 있는 학생의 어두운 그림자를 잡아내지 못한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있었다.  

교육만이 희망이던 시절이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한 사람의 희망뿐 아니라 온 가족의 희망이던 시절 말이다. 그렇게 희망을 끌어와서 희망이 환상으로 바뀌고 난 뒤, 환상은 사라지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인해 빈곤한 마음을 가진 대한민국이 남았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고 난 뒤의 뒷감당에 대해서 이젠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이다.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과 청소년이 가득한 나라, 그 아이들이 주인공이 될 대한민국의 미래라니,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나아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재준이가 일기장에 쓴 것처럼, 상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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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1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부분들이 아주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노아님. 특히 '아이가 해서 나쁜 짓이라면 그건 어른이 해도 나쁜 짓인 거야'는 정말 박수 쳐 주고 싶은 문장이에요. 저는 대체적으로 이 의견에 공감해요.

마노아 2009-11-15 00:32   좋아요 0 | URL
예, 그렇지요? 어른과 아이는 서로의 거울인데, 거울로 비추어 제 모습이 아닌 상대의 허물만 볼 때가 많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