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에 책이 있다 - 사물, 여행, 예술의 경계를 거니는 산문
안치운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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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여러 글쓰기의 종류 중에서 독자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들의 나열이기도 한 까닭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쉽다. 저자의 생각에 독자가 꼭 공감을 하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저자 역시 그런 바람으로 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꺼리'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낯설 뿐이다. 

저자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가수 안치환과 비슷한 이름 덕분에 혹 친인척 관계가 아니냐는 오해를 자주 사며, 연극쟁이이지만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비평가이고,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젊은 날에 유학을 다녀온 인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으레 연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지만, 그보다는 일상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 속에서는 정확한 시간이 구술되어 있지 않은데 정황상 짐작해 보면 여기에 실린 글들은 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써온 글들의 모임 같다. 그래서 때로 어떤 글은 읽으면서 약간의 거리감,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공감하게 하는 어떤 부조리함을 보면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만약 글을 썼던 시점이 지금보다 20년 전이라고 한다면, 20년이 지났다고 해서 여전히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조차 선진국인 프랑스보다 우리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시간의 경계 따위는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현재 시점으로 읽고 소화를 해도 별로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가보지 못한 카이로나 푸에블라, 파리에서의 이야기보다는 그 속에서의 일상 '삶'을 이야기한 '살며' 장이 가장 공감하기가 쉬웠고, 희곡과 춤과 음악, 건축과 사진에 대해서 얘기한 '공부하고' 장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삶의 안과 바깥에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야만이며, 파괴를 성장이라고 말하는 야만의 기교일 터이다. 폭력을 정의구현이라고 우겨 말했던 과거와, 파괴를 녹색성장이라고 양심 없이 내세우는 현재는 하등 다르지 않다. – 11쪽

 
   

파괴를 '성장'이라고 말하는 야만의 기교에서 붉은 색으로 밑줄 쫙! 긋고 싶었다. 뉴스를 틀면 빠지지 않는 한 꼭지 4대강 정비에 꼭 들어맞는 예시일 것이다. 당장 '성장'을 가시적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파괴라 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진행시키는 그 오만과 만용과 독선은 대체 누구로부터 허락받은 것인지 묻고 싶다.  

   
 

 길은 사람과 더불어 태어난다. 사람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길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 그러므로 길은 사람이고, 사람은 길이다. 사람이 가는 것이 길이고, 길은 뒤따라오는 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옛길을 걷다 보면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옛길 위에 삶과 집이 포개져 있었다. – 79쪽

 
   

이런 문장이 좋다. 사람이 가는 것이 곧 길이 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도, 누군가 가기 시작하면 길이 될 수 있고, 그 사람의 나아가는 방향이 바른 길과 바르지 못한 길을 나눈다. 물리적인 길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 위에 펼쳐진 길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선택도 본인의 몫, 그리고 책임도 본인의 몫이다. 가혹한 기쁨, 무거운 자유랄까.  

   
 

 편하기만 했던 여행은 금세 잊히기 마련인 것 같다. 여행은 불편함으로 자신이 와해되어야,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야 자신 속으로 깊게 회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오늘의 시련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후에 꾸는 꿈은 매혹이 된다. 나는 다시 가고 싶다는 시련을 겪고 있다. 여행의 시작은 길고 긴 기다림이다. – 100쪽

 
   

국내건 해외건, 이렇다 할 여행을 그다지 못해봤기에 적당한 예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무릎팍 도사에서 한비야씨가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배낭 여행 과정에서 위험한 건 남자건 여자건 똑같다고. 당연히 여자가 더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그것조차도 편견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허락해주지 않을 때 후회하지 말고, 몸이 허락할 때 시련이 매혹으로 바뀌는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몇 해 전에 12월 둘째 주 주말에 경주로 여행을 갔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는데, 그 눈 속에서 혼자 바라본 안압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이 나고, 오지 않는 버스를 발 동동 굴리며 기다려서 겨우 도착한 찜질방에서 땀 빼고 잤던 일도 지금은 달콤하게 기억난다.  

   
 

 프랑스에서 6월쯤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바캉스란 단어다. 1940년대 이후 노동자들까지 3주 이상의 유급휴가를 받기 위해 사회당과 공산당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가를 이 여름에 생각하게 된다. 이들에게 바캉스는 1년 열두 달 중 전반이 끝난 7월과 8월에 끼어 있다. 문화는 사실 일하는 것과 논다는 것의 복합이다. 문화는 더러 이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며 일과 휴식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 141쪽

 
   

문화는 사실 일하는 것과 논다는 것의 복합이란 설명이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연결지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이 곧 문화가 될 수 있고, 놀이가 곧 문화가 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내 안에서 따로 놀았다. 1940년대에 우리는 식민지 치하에서 죽도록 얻어터지며 투쟁하고 있었고, 50년대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자고 죽도록 고생하고 있을 때였는데, 역사의 진행 과정이 다르긴 참 다르다 싶기도 하다.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좀 배가 아프달까. 그래도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배려하느라 파리 시장이 센 강변에 바닷모래를 가져와 모래밭을 만들어서 센 강이 순식간에 바다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는 무척 놀라웠다. 모두에게 돈 쥐어주고 바캉스를 보내주는 '시혜'적 제스쳐가 아니라, 현장에서 바다를 느끼게 해주는 신선한 발상이라니!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일하는 배우와 연출가들은 그들대로, 무대장치나 기술분야에 일하는 이들은 그들대로 노조를 만들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경제적 지원은 정부에서 하지만 그 운영은 전적으로 전문 연극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 154쪽

 
   

국가에서 주는 녹을 받더라도,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서의 독립성은 절대로 보장하는 저런 정신, 저런 마인드라니...... 해체된 국립 오페라단 생각이 난다. 저러니 당시 프랑스에서 그들이 연대 서명을 해줄 수 있었구나... 1920년대에 있었던 파업 투쟁을 보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의 노동자들이 연대 투쟁을 해주고 후원금을 보내주며 성원을 보내기도 했었다. 당시 그들은 나라 대 나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같은 노동자로서 서로를 바라봤던 것이다. 사회주의, 좌파... 이런 단어만 보면 바로 눈에 불켜지는 이 한국 사회에서 제일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다.  

   
 

 처음 프랑스라는 나라를 좋아하게 된 것은 1970년대 군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이곳을 자유로운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풍부한 말의 자유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말의 자유는 상상력의 자유에서 나온다. 말은 모든 행동과 표현의 근원이 되고,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을 상상력이란 것에 의존한다. 상상력은 어떤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훌륭한 덕목으로 친다.
한국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늘 피로한 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재와, 꿈꾸지 못했던 과거, 그 억압된 과거가 주는 힘겨운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자유와 상상력은 이 나라에 도착했다고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 192쪽

 
   

저자가 처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을 때 받았을 거대한 충격을 상상해 본다. 말의 자유, 상상력의 자유. 표현의 자유. 기막히게도, 2009년을 사는 오늘 우리는 비슷한 억압을 느끼고 있다. 말을 빼앗기고, 판단을 패앗기고, 생각과 상상력을 차단당한다.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 피로감은 이미 한계점을 누르는 듯한데,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걸 다시 떨쳐내는 데에 우리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써야만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 그가 느낀 것들, 그가 생각한 것들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나는 독자는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로 화하는 과정을 밟는다. 처음 리뷰를 쓸 때는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오히려 마무리 짓는 지금은 도리어 정리가 되어 편안한 느낌이다. 이 또한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다.  

표지에 세로 쓰기로 글자를 찍었는데 뒷배경의 숲의 음영과 맞물려 이 가을을 닮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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