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속의 기생읽기
국립민속박물관 지음 / 민속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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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단절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적 경제의 파행성과 왜곡된 근대화 과정 등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과거사 청산은 사회사적 검토의 대상으로 일제시대 '기생'의 이미지도 포함하고 있다. 기생을 매음하는 창기로 자리 잡게 한 것은 일제의 치밀히 계산된 문화침략 중의 하나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광범위한 직제 개편을 위해 기생들에게 일본제국 군대와 일본인을 위한 매춘의 사회화를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이라는 지침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는 일본의 윤락녀 이미지로 차츰 탈바꿈하게 된다. -10쪽

그러나 우리나라 권번 기생은 대한제국 황실의 관기 예악문화를 전승하고 보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들은 현금, 가야금, 장구, 아쟁, 해금, 대금, 소금, 가곡 등의 기악과 성악은 물론 궁정무용인 춤, 가인전목단, 선유락, 항장무, 포구락, 무고, 검무, 사자무, 학무 등의 정재와 그 밖의 글씨와 그림을 익혀온 예악문화의 실현자이자 종합예술가들이었다. 특히 1920년대 초반에 서양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춤, 서양춤 할 것 없이 모든 춤을 기생들이 추었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졌다. 전문 음악가이자 무용가라고 할 수 있는 종합예술가들이 바로 당시 기생들이었기에 전통문화예술을 발전시켜온 주역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10쪽

기생의 어휘에서 '생'은 어떤 생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터 정확하게 '기생'의 어휘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중기부터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사대부와 기녀의 관계는 밀접했기에 유사한 방식의 어휘와 소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생'은 글을 써서 생계를 삼아 공부하는 사람이고, '유생'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은 선비라고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기생'은 '기업(妓業)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기녀'라 할 수 있다.-174쪽

"신라 중엽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는데, 이것이 기녀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제 24대 진흥왕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능화는 이로 미루어보면, 원화는 오늘날 기생과 같은 것이고 화랑은 오늘날 미동과 같은 것이고 풍류낭도는 오늘날 외입장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에 장덕순은 "애초의 원화제에서 남자 300명 속에 낀 두 미인은 남자들의 총애를 받으려고 서로 경쟁했을 것이 뻔했고, 그래서 죽이고,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것은 미상불 기생족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원화의 신화적 기록에 의하면 그 역할은 무녀와도 그리 거리가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물론 '서로 아름다움을 질투하였다'는 문구와 상징적으로 두 여인을 뽑아 무리를 이끌었다는 것도 무녀기원설과 서로 통한다.-175쪽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변화에는 기생에 대한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도 들어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적어도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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