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구판절판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난 잘 모르겠어."하고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심한 범죄들도 많잖아?"
"더 심한 범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돈을 빼앗는 것?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범죄일 뿐, 악은 아니야."
-203쪽

"모든 피해자에게, 모든 피해자의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거야. 왜? 우리 딸이 왜 죽어야 했을까? 범인은 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왜, 왜, 왜?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별것도 아닌 놈들이 잔머리를 굴려보겠지. 경찰도 눈을 부라리며 수사를 할 테지. 그러나 그들은 몰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나, 아니 우리뿐이지."

-209쪽

"신이치 네가 겪은 사건도 누군가 인수분해하겠지? 그러면 결국 그런 식의 글이 나올 거야. 범인을 비난하고 분노하거나, 피해를 입은 신이치의 가족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가, 하고 애당초 정해져 있는 결론에 이르는 거야."
"......"
"그래서, 그런 인수분해 속에서는 히구치 메구미도 가련한 피해자가 되겠지. 하기야 그애가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아니고, 가족이 무너지면서 그애의 인생도 뒤틀리고 말았으니까. 그렇지만 그거도 인수분해 속에서는 그녀의 슬픔의 인자가 되어버리겠지."
......
"그런 것이 올바른 분석이라면, 어떤 궤변도 다 통하고 말 거야. 나쁜 것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불쌍한 인간만 남으니까. 남는 것은 피해자뿐이고, 나쁜 것은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려. 그렇지만 그건 말이 안 돼. 그러니까 절대로 메구미의 말에 지면 안 돼. 그녀의 짐까지 네가 짊어져서는 안 되는 거야."
-420쪽

"불쌍하게도, 너무 빨리 만난 것 같아. 그애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나은 다음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은 어떻게 해도 안 돼."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너라서 안 되는 게 아냐. 누구라도 안 돼. 훨씬 어른이고 훨씬 어머니 같은 사람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아니면 차라리 머리가 텅 비어서 하루 종일 자기 밖에 생각하지 않는 여자이든지. 너는 어느 쪽도 아니거든. 어머니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백치가 되기에는 너무 머리가 좋아."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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