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이국적인 제목에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닮은 일러스트 표지. 사전 정보가 없다면 이 작품이 아관파천 시절 고종에게 매일 새벽 커피를 올린 바리스타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결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제목의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를 의미한다.  

주인공은 역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러시아 말을 익혔다. 나랏 것에는 결코 손대지 않았던 아버지가 청나라 황제의 하사품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머리가 효수되고 열아홉의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홀로 압록강을 건넌다. 청나라를 지나 러시아에 정착했던 그녀가 살아남는 법은 '사기꾼'으로 사는 거였다. 따냐라는 이름으로 그림의 낙관을 위조하는 일을 하였고, 거대하고 광활한 러시아의 숲을 팔아치우는 협잡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이반을 만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기꾼이었던 이반은 좀 더 크게 한 건 할 것을 권했고, 그 손을 잡음으로써 따냐는 좀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되지만, 100%에 이르는 신뢰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실을 그녀가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진 않지만.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해치우려던 일이 틀어지면서 도피하듯 고국에 돌아온다. 동짓날 보름에 박연 폭포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헤어졌던 이반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독립문 주춧돌을 세우는 자리에서 재회하게 된다. 이무렵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시절이었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전권을 쥐고 있던 때였다. 베베르는 처제 손탁이 아닌 따냐에게 바리스타 일을 맡겼고, 고종을 감시할 새로운 눈으로 그녀를 심어놓는다.  

비극적인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이후 달디 단 커피가 아닌 쓰디 쓴 커피 쪽으로 입맛을 바꿨다. 워낙에 재주 있고 센스 있는 따냐는 고종의 벗으로서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등극한다. 파천 1년 동안 환궁에 대한 목소리는 계속 고조되고 있었고 친러파로 활동하고 있는 이완용과 이반은 이에 위협을 느낀다. 고종의 환궁을 막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고종까지 죽일 각오로. 

작품은 엄청 빠르게, 가볍게 읽히고 넘어간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도 말이다. 망국을 눈앞에 둔 고종은 가련한 신세였지만 그다지 가엾어 보이지 않았고, 따냐와 이반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좀 더 깊은 은원 관계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명확히 밝혀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랴. 진실이었대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믿었대도 진실이 아니었을 것을.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매천야록에 실린 고종 커피 독살 사건 때문이었다. 실제 그 사건은 1898년으로 환궁 1년 후 정도지만, 이 작품은 환궁 직전으로 잡아서 설정해 놓았다. 세자와 함께 커피를 들던 고종이 커피에 독이 든 것을 알고 뱉어내지만, 순종은 마시는 바람에 크게 탈이 났던 그 사건. 커피에 들어갔던 것은 치사량의 아편이었다. 커피와 고종 독살 음모를 대륙을 누비던 두 사기꾼과 엮은 솜씨가 유려하다.  

   
 

 내가 전하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이반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건 내가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사기꾼은 진실해선 아니 되고 정직해선 아니 되고 일이 끝난 후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삶의 원칙을 바꾸면 큰 낭패를 보는 법이다.   -192쪽

 
   

누군가에게 커피는 그저 기호품이고 습관이다. 또 누군가에게 커피는 인생이고 철학이고 사랑이다. 이 작품 속의 커피는, 현란한 카피와 함께 경쾌한 사기극 한 판과 역사적 사실을 접목시켜주는 도구가 되긴 했지만, 짙은 깊음과 향기로운 속내까지 비쳐내진 못했다. 그저 습관처럼 한 잔 마시고 금세 잊어버릴 것 같은 정도의 재미를 안겨주었을 뿐. 어쩌면 작가 자신도 '독한' 무엇을 보여줄 생각 없이 딱 이만큼의 가벼움만 선사해줄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이 책은 한 시간 정도의 무료한 시간을 채워준 달콤한 커피 한 잔만큼의 깊이였다. 그건 나쁜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니지만 딱 그만큼 뿐인 가치였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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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7-29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커피 한 잔 만큼의 깊이라니 솔직한 리뷰로군요.^^
김탁환씨는 역사에서 소설적 감을 잡아채는 능력이 뛰어난 듯...

마노아 2009-07-29 10:37   좋아요 0 | URL
감각이 탁월하시죠. 근데 늘 감각만 있고 감동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