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19 - 국수 완전 정복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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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다른 이름 강냉이.
강냉이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즉 강남에서 건너왔다는 뜻이야.

'강낭콩'이라던지 '강남 갔던 제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거야.

옥수수라는 이름은 '수수'에다 '玉'자가 붙어 구슬처럼 윤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거지.

왜 풋강냉이로 올채이국수를 만들았는지 아나?
강원도는 머글게 음써서 강내이도 다 여물 때까지 기다릴 수 음썼거덩.
그래서 풋옥수수를 따다가 알이 차지도 않아 떼낼 수 음쓰니까 칼로 죽죽 끌거서 올채이국수를 맹글어 먹었어.

요긴 순저이 산이래요. 농사 지을 땅이 음써요. 그르니 쌀이 음찌.
옌날에눈 쌀 세 말 먹고 시집 가믄 부잣집 딸이란 말이 이썼써요. 그르케 낟알이 귀하니 우터해요. 이런기라도 먹고 살아야제.-148쪽

막국수는 6.25 전쟁으로 피난 오게 된 이북 사람들이 고향의 냉면 맛이 그리워서 대신 해먹던 거래.
뚝뚝 끊기는 메밀국수를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마구 먹는 걸 옆에서 보고 '국수를 막 먹네' 하다가 막구수가 뙜다니까.

그건 내가 아는 것과 다른데?

막국수는 화전민과 관련이 있어.
강원도에는 메밀을 많이 재배했는데 메밀은 나쁜 땅에서도 잘 자라 화전을 3,4년하고 밭이 척박해지면 메밀 씨를 뿌렷고 풍부한 메밀로 국수를 해먹었어.
화전민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마구' 뽑은 거친 국수였다 이 말이야.

또 <<춘천 백년사>>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19세기 말 을미사변을 계기로 춘천 지역에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깊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조나 메밀, 콩으로 연명했대.
-164쪽

1910년 경술국치 뒤에도 화전을 떠나지 않고 살던 그들이 메밀을 읍내로 들고 나오면서 춘천에 막국수가 자리 잡았대.
과거 춘천 지방 농촌에서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맷돌에 메밀을 갈아 메밀쌀을 만든 다음 디딜방아에 찧어 가루를 낸 걸 국수를 뽑아 대접했는데 6.25 직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국수를 만들어 팔던 것이 막국수 대중화의 시초라는 거야.

그래서 화전민이 많았던 춘천이 막국수의 원조라고?
아니야. 딱히 원조라는 것이 없고 그런 얘기도 있다는 거지. -165쪽

'우리의 고향은 중국이고 우리의 국적은 대만이며 우리가 사는 곳은 한국이다'라는 말에는 화교들의 고단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 화교들의 국적은 대만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정부 역시 곧바로 중국과 수교를 단절하여 고향 방문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대만으로 이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다수의 화교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 남았다. 하지만 화교 자본 활동의 억제를 위해 각종 규제가 생기면서 그들의 활동 반경은 중국음식점으로 한정되었다.
뒤를 이어 태어난 세대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취직은 고사하고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비좁고 답답한 주방에 갇혀 장을 튀기고 면을 뽑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세상을 원망했지만 묘책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수단은 오직 자장면뿐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집 주방은 대를 잇는 전통이 생겼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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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7-2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노아님. 제목에 막국사-->막국수요 ㅋㅋ

마노아 2009-07-24 13:10   좋아요 0 | URL
어머! 여기도 틀렸군요.^^ㅎㅎㅎ

후애(厚愛) 2009-07-2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부터 시작해서 음식에도 사연이 많군요.
갑자기 막국수가 먹고 싶어지네요. ㅎㅎㅎ
주말에 메뉴는 막국수에요^^ ㅋㅋㅋ

마노아 2009-07-25 00:17   좋아요 0 | URL
오늘 저녁은 보쌈과 막국수 먹었어요. 식객의 영향이 컸어요.6^^
후애님이 막국수도 기대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