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 작은 바다를 만들어 볼까? [제 959 호/2009-07-24]


애리는 지금 잔뜩 뿔이 나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모님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바로 바다에 데려가 주겠노라고, 3월 초부터 새끼손가락 걸고 굳게 약속한 기억은 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혹시라도 아빠의 특기 ‘결정적일 때만 건망증’과 엄마의 특기 ‘못 들은 척 딴청하기’가 발동될까봐 생각날 때마다 불러댄 바다바다바다바다 노래도 결국 헛된 노력에 불과했단 말인가. 주말마다 두 분께서 검사하시는 일기장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7월에 바다 가서 할 일들을 꼬박꼬박 적어왔거늘, 시간 낭비 밖에 안 됐단 생각이 든다.

“아까부터 얘기했지? 아빠 회사 사정 때문에 휴가가 미뤄졌다고….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8월 말까지만 기다리면 되는데 왜 자꾸 화만 내니?”

“몰라! 엄마 바보! 아빠도 바보! 아빠 회사는 바보 곱하기 바보!”

솔직히 말해 그녀도 딸 못지않게 가족 바다 여행을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딴 팀원들에게 휴가 다 양보하고 굳이 8월 마지막 주로 휴가를 옮긴 남편을 향한 분노를 쿠션에 냅다 쏟아 붓고 싶은 심정이었다(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이 나이 먹고 11살짜리 딸이랑 똑같은 짓을 하기에는 이성의 힘이 좀 더 강했다.

‘이거 안 달래면 또 석달 열흘 들들 볶일 텐데 어쩌면 좋을까. 아 잠깐, 혹시?’

엄마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나이스 아이디어에 저도 모르게 손을 맞잡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제스쳐를 취하는 엄마를 본 딸의 눈빛도 순간 반짝였다. 미소가 피어오르는 입꼬리를 차마 내리지 못 하고 애리를 돌아본 엄마는 은근한 목소리로 서두를 깔았다.

“애리야. 너 종이공작 좋아하지?”

“…그게 바다랑 무슨 상관이야!”

“이대로 바다도 못 가고 7월 내내 방학 숙제만 하는 것도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애리 책상 위에 작은 바다를 하나 만들어 줄게.”

“엄마. 접속어 앞 뒤 내용이 안 맞아.”

“말 끊지 말고 계속 들어 봐. 이 바다가 신기한 게 말이지, 아무리 뒤집고 흔들어도 바다는 바다고 하늘은 하늘이거든? 거기다 애리가 만든 배도 하나 척 하니 띄우는 거야. 그럼 더 근사해지겠지? 신기하고 예쁜 바다를 계속 보면서 바다 여행을 계획하는 건 어떨까? 그럼 8월 말 여행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재미있을 것 같…, 으으응, 별로 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 넘어온다, 아니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

“만약 아빠가 이대로 바다를 완전히 잊어버린 척 하면 어쩔 거야? 그럴 때 작은 바다를 내밀면서 ‘아빠~, 기억하고 계시겠죠?’ 이렇게 한 마디 해 주는 거지. 어때? 어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만들어 줘!”

건망증에는 ‘건망증 완전 대비법’으로 대응한다. 모녀의 손발 짝짝 맞는 플레이는 빠른 재료 준비로 이어졌다. 햇빛 쨍쨍 내리쬐는 대낮에 화학약품상을 돌고 와서도 지치지 않는 애리의 눈동자에 역시 내 유전자 반이 섞인 인재라며 감탄하던 엄마는 피로감을 애써 감추며 실험에 돌입했다.

“우리가 사 온 약품 이름이 뭐라고?”
“메틸렌클로라이드.”
“정답! 메틸렌클로라이드는 세탁소 같은 데서 쓰는 약품이야. 물보다 비중이 크고 기체로 잘 변하는 성질이 있어. 냄새도, 자 봐, 독하지? 그러니까 실험하는 동안 메틸렌클로라이드 냄새를 직접 맡는 건 금지! 또 환기도 잘 시켜야 해.”

“그런데 엄마, 물과 메틸렌클로라이드는 왜 안 섞여?”

물은 화학에서 얘기하는 극성을 갖고 있고 메틸렌클로라이드는 무극성이야. 극성은 극성끼리, 무극성은 무극성끼리 서로 잘 섞이거든. 반대로 극성과 무극성이 만나면 섞이지 않아. 물과 기름도 이렇게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안 섞이는 거지.”

“얼렁뚱땅 넘어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메틸렌클로라이드 색이 예쁘게 변했으니까 넘어갈게. 이것도 메틸렌클로라이드 성질 때문이야?”

“우리 딸 너무 똑똑한데? 맞아. 우리가 아까 넣은 게 유성펜이잖아. ‘유성’은 기름 성분에 잘 녹는다는 얘기거든. 메틸렌클로라이드도 기름 성분을 잘 녹이는 ‘유기 용매’ 중 하나야. 그래서 유성펜 색소를 빨아 들여서 파랗게 변한 거지. 반대로 수성펜은 물에 잘 녹는단다.”

“엄마가 설명하는 동안 종이배도 다 만들었어. 종이배 밑바닥에 색연필도 칠했고…. 이건 왜 이런 거야?”

색연필도 메틸렌클로라이드와 친한 성질을 갖고 있거든. 핀셋으로 종이배를 집어 넣어봐. 옳지. 어때, 바닥이 메틸렌클로라이드와 딱 붙어 있지?”

“올~, 신기하다~.”

물을 먹은 종이배는 메틸렌클로라이드보다 가볍고 물보다 무거워. 게다가 색연필 때문에 메틸렌클로라이드 표면과 항상 붙어 있거든. 그래서 종이배를 넣은 병을 아무리 흔들고 뒤집어도, 바다는 항상 밑에~ 종이배는 항상 바다 위에~ 살랑살랑 예쁘게 떠다니는 거지.”

전화로 휴가 연기 공지를 때렸을 때 상상했던 분위기와 180도 다른 집안 공기. 훈훈하기 짝이 없는 아내와 딸의 표정에, 애리 아빠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 한 채 현관에 들어섰다. 딸의 손에서 반짝이는 작은 병과, 병 속의 파란 액체와, 그 위에 뜬 하얀 배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의미하는 한 단어를 깨닫기 전까지는.

고지식하게 ‘왜 우리가 바다를 늦게 갈 수밖에 없는가’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남편을 재빨리 꼬집은 애리 엄마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커다란 병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자신의 손바닥 크기만한 병을 받아든 아빠는 순간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실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종이배에 세 가족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애리야. 멋대로 약속 깨서 미안…. 아빠, 휴가 다시 당길까?”
“아빠 일이 더 중요하잖아요. 7월 말에 안 가도 괜찮아요. 대신 약속만 지켜주세요. 책상 위의 바다도 좋지만, 역시 아빠엄마랑 진짜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요.”

“애, 애리야~!”
“감동적인 장면 깨서 미안한데, 그 병 옆으로 한 번 돌려 볼래 자기야?”

배 뒷면에 새겨진 글귀. ‘이번에도 약속 깨면 10년 동안 용돈 동결’
찰랑이는 작고 푸른 바다 위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아빠의 표정이 함께 일렁였다.



 


[실험 Tip]
- 유리병(바이알병)과 메틸렌클로라이드는 각각 과학기구상, 화공약품상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물과 메틸렌클로라이드 용액을 섞어 쓰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가급적 2개의 스포이드를 따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글: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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