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구판절판


저승에서 내가 제일 오래 머문 사람은 아니었다. 나보다 수천 년 전에 이곳에 온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끊임없이 지껄이기만 할 뿐 책은 쓰지 못했다. 그는 책이란 믿을 수 없는 물건이며, 자신의 삶을 그 속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주희라는 중국 학자는 더 난감한 상태였다. 그는 스승인 공자의 책을 3,333번이나 거듭 읽으며 한 자 한 자 토를 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긴 학자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꽤 많았다. 남들이 쓴 책을 읽고 토달고 비평하느라 자기 글은 손도 못 대는 치들, 소설가들 역시 저승의 대표적인 터줏대감이었다. 카프카라는 젊은 작가는 내게 고백하기를, 끝이 다가오면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과 회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했다. 소설가들 중에는 걸작을 쓰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번번이 실패하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음악가나 미술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라는 늙은이는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가 부러뜨린 붓만 100개가 넘었으니 일반론으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20쪽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책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어머니가 쓴 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뜨거운 김에 쏘인 것처럼 놀랐다. 하지만 그때의 놀람은 책을 다 읽고난 뒤의 놀람에는 비할 바도 아니었다. 책 속의 어머니는 내가 아는 어머니와는 너무나 달라서 나는 몇 번이나 표지에 적힌 이름과 생몰연월일을 확인하곤 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쓴 책에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도 없는 어머니의 인생이란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건만! 당연히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모욕감보다 더한 건 부러움이었다.

-21쪽

이제 나는 아무 회오도 연민도 없이 내 삶을 돌이킬 수 있었다.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삶. 그것이 내가 내게 지은 죄이며 내게 베푼 유일한 은혜임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삶은 100년이든 1년이든, 파란만장하든 무미건조하든, 영웅적이든 비참하든, 모두 똑같은 두께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23쪽

깊은 혼몽에서 그를 깨운 건 눈부신 황금빛이었다. 에스파냐 정복자의 사나운 손길을 피한 단 한 권의 책. 황금으로 쓰고 황금으로 장식하고 황금으로 장정한 마야의 황금 책이 머리맡에 놓인 순간 모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책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애무의 대상이며,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임을.
붉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리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젖은 이끼 냄새와 마른 흙내, 선창가를 맴도는 비린내와 어린 창부의 사타구니 냄새, 바람처럼 흩어지는 로즈마리 향내가 그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체취만이 아니었다. 늙은이의 살갗처럼 서걱거리는 파피루스 책은 그를 슬프게 했고, 농염한 여인처럼 부드러운 양피지 책은 그를 달뜨게 했으며, 잉크를 흠씬 빨아들인 중국 종이책은 그를 젖게 했다. 책은 육체임을 모리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110쪽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에 나는 온갖 종류의 수집상들과 골동품상, 서적상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칼을 파는 사람이 살인자가 아니듯 예술을 파는 사람 또한 예술가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었다.

-178쪽

네 명의 피고 모두 나라를 다스리거나 권세를 가진 지배층이었습니다. 일자무식의 거렁뱅이가 아니었죠. 많든 적든 책을 읽었고, 학식 있는 자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은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책이 문제가 될지 안 될지 알 수도 없었을 겁니다. 피고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책을 읽었고 책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책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책을 몰랐다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좀 어이없는 발상이긴 한데, 책이 문제의 근원같아요. 이상한 얘기죠. 물론, 책의 적은 책이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251쪽

하지만 오늘 재판을 지켜보면서, 책 혹은 지식이 미워하는 건 무지가 아니라 또 다른 지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까 고발인은 카라지치가 인간을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야만일까요? 책을 읽는 문명인들은 책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짜 끔찍한 야만을 저지른 자들은 문명인들이었죠. 애초에 문명이란 게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것이고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누가 최악의 적으로 선정될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자 역시 한 명의 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헌신한 열혈독자였죠. 그러니까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 같아요. 책을 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듯 싶습니다.
-252쪽

길은 산을 낳고, 산은 골짜기를 이루었으며, 골짜기는 그늘을 드리웠고, 그늘은 강을 품어, 강은 들을 키웠다. 그렇게 끝도 없이 길이 이어졌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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