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 효종.현종실록 - 군약신강의 나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제일 처음 내가 선택한 책은 대개 이덕일 씨의 책이었다. 그의 책은 일단 쉬웠고, 문장이 문학적이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주장들은 다소 감정적인 부분들이 있었지만 나름의 근거를 늘 제시했기 때문에 비판이 많았어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책들을 보게 되면 그런가? 그래도 아직은 이쪽이 더... 이러면서 추가 기울어지곤 했다. 그랬던 나의 생각들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수정되는 것들이 종종 나왔다. 모두 후세 사람들이라 당대를 살았던 인물이 아니고, 학문에 투자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도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데도, 그만큼 박시백 씨가 설명하는 이 실록의 내용은 타당하고도 설득력이 강했던 것이다.(더 강한 유혹을 느끼면 또 바뀌는 거?) 

암튼, 그렇게 해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에 가장 많은 변화를 주게 된 게 바로 효종과 현종의 이미지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효종과 북벌을 함께 외쳤던 인물을 송시열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적어도 효종의 북벌 의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효종이 실질적으로 추구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개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북벌을 위해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지만, 그 대부분은 정벌보다는 방어에 주안점이 두어진 인상을 풍긴다. 송시열과의 10개월도 북벌과는 거리가 멀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청이 조선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 아래서 모두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북벌을 효종 혼자서 가슴에 품고 추진했을까? 혹 효종은 북벌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북벌을 추진한다고 믿게끔 제스처만 취한 건 아닐까? 효종으로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즉위해야 했던 당위성이 필요했다. 소현세자가 줄 수 없는 것. 나아가 소현세자보다 자신이 보위를 이은 게 더 낫다고 여겨질 만한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했다. 북벌이 바로 그런 무엇이었다. 비록 관념 속의 외침이기는 해도 사대부들은 늘 설치를 꿈꾸었다. 따라서 북벌은 사대부들에 대한 강력한 유인 카드이자 유용한 압박 카드가 될 수 있었다. (96-97쪽)

 
   

 

할 수만 있다면 북벌을 감행해서 치욕을 갚고 싶었겠지만, 당시 조선의 힘이 북벌을 감당할 수준이 아님을 효종도 인정했던 것이다. 독대에서 보여준 효종의 논조가 워낙 강경해서 아직도 좀 흔들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효종이 그렇게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주장은 어떤 현실로 나왔을 지도 모른다. 열심히 내치에 힘썼던 것처럼, 그 기세로 10년을 더 준비하면 10년 뒤에는 북벌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청나라에 눈치 안 보고 살 정도는 되었을 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애석하게도 효종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평생에 보여준 인내력은 가히 정조 수준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입에서 떼어버린 술을 죽을 때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경연을 마다하지도 않았으며, 늘 비판만 해대는 산당-특히 송시열-의 주장들을 내치지 않고 들어주었다. 가끔 버럭 효종으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자신을 모욕주는 말까지도 받아 넘기던 효종이다. 실로 그의 성정은 대인배 수준이었다. 형님 소현세자와 그 삼남인 자신의 조카로 인해 정통성 문제가 늘 불거졌지만, 죽이지 않고 살리기에 힘썼으며, 어린 조카들이 반역 문제에 거론되어도 역시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태었다. 뿐이던가? 흩어져 유배살던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의지하고 살게 했으며 나중에 그 유배도 풀어주고 관작도 돌려주지 않던가. 형제에게도 우애가 깊었던 효종. 수신제가에 힘쓰고, 군사 문제에 용을 쓰고, 대동법 시행도 제법 적극적이었던 효종. 늘 유약한 이미지의 조선 군왕과 달리 강한 임금 효종은 근사해 보였다. 군약신강의 나라 조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저자 박시백은 애써 '독살설'이나 군왕 암살에 관한 의혹은 비켜가는 듯하다. 수상쩍은 모습을 잠시 비추긴 하지만 말을 아낀다.(심지어 소현세자 죽음까지도) 이 부분도 이덕일씨와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이건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뿐 아닌 물리적 타살인가에 대한 의혹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100% 확실한 물증은 없는데, 쉽게 꺼질 수 없는 심증이 계속 남아있는 그런 의혹 말이다. 게다가 당시 조정을 장악한 지배층의 행태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학이란 것이 당시 지배층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같은 학문이라 할지라도, 다른 분야에서... 그러니까 백성의 삶에 있어서도 그렇게 목숨 걸고 덤비고 수호하고자 한 일이 있다면 그들을 향한 이런 의혹과 불신이 어찌 나왔을까. 나라 밖의 적은 저리도 강한데 제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존경조차 받지 못하는 지배층이 다스리는 나라. 당연히 건강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 왕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의심의 의심의 꼬리를 물 수밖에. 

현종은 재위 기간 15년 동안 신하들과 큰 마찰 없이 지낸. 온순한 성격의 임금이라 생각했다. 평생 후궁도 없이 왕비 하나만 아끼고 산 것도 그런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비 사랑은 어떤지 몰라도, 현종이 그렇게 유약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게 이 책을 보면서 얻은 신선한 사실이었다. 현종은 아버지만큼 버럭!하는 다혈질 성격도 있었고, 산당계 인물들을 견제하느라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모습은 나름 독한 구석도 비쳐졌다. 원래 이렇게 오래 참을 줄 알고 준비할 줄 아는 임금이 무서운 법이 아닌가.  









위 사진에서 '캐실망'이란 단어에서도 그랬지만, '멍 때릴 것 없다!', '헐~'이런 표현들은 이 책이 만화이기에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열린 공간의 힘이다. 저런 유머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는 책이지만, 저런 글자 하나만으로도 잠시 웃어갈 짬을 내주는 것이 이 책이 가진 큰 장점 중의 하나다.

현종 말년의 예송에서 현종은 서인 대 남인의 구도로 가기 전에 사태를 수습했다.  

   
 

이때의 예송논쟁은 산당 대 남인의 논쟁이 아니라 산당 중심의 신하들과 임금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왕의 태도가 어딘지 미진하다는 인상을 준다. 왕은 일찌감치 이번 예송의 핵심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왕은 핵심 문제가 전면화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만일 적통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거나 시간을 끌기라도 했다면 남인이 대거 가세했을 것이고, 명분상 취약한 산당은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산당과의 전면전이 두려웠던 것일까? 송시열에게 내린 비답을 보면 왕이 자신감은 이미 충만해 보인다.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불과 한 달 뒤에 죽음을 맞았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당쟁을 바라보는 왕의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왕은 한쪽을 도와 세력이 균등해지게 함으로써 서로를 견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188쪽)

 
   

그는 이제 산당을 어느 정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조정 내에서 남인의 세를 어느 정도 키울 타이밍을 맞고 있었다. 처음에 그랬듯이 이제 붕당도 제 기능을 발휘해서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다 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는 늘 비정했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 젊은 군주 현종은 3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비록 그가 평소 병치레가 잦은 임금이긴 했지만 극심한 복통과 설사로 급서했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 큰 의혹을 남기게 한다. 게다가 그 시점이 남인 허적에게 영의정을 막 제수한 타이밍이라면.  

게다가 그의 뒤를 이을 아들 숙종은 이제 나이 열 네살에 불과했다. 이런 정황들이 현종의 죽음을 자꾸 타살로 느끼게 만든다. 그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한쪽으로 쏠린 조정의 중심축을 제대로 잡아줄 수 있었더라면 숙종 때 상대 당을 원수 당으로 인식해 죽고 죽이는 환국이 아니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몇몇 여인네들이 한을 품고 죽지도 않았을 것도 같건만, 그런 가정들은 모두 무의미하니 여기서 접으련다. 

효종과 현종의 재위 기간을 합해야 25년이다. 책 한 권에 묶어나와도 할 말이 없을 시간이다. 다음 번 숙종실록은 좀 더 두툼해지지 않을까. 재위 기간도 길었지만 그보다 할 얘기가 오죽 많으랴.

백무현 씨가 그린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처럼, 박시백 씨도 혹 이 시리즈가 다 끝나면 현대 정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만화로 풀어낼 생각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자료는 더 많고, 복장은 더 터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와준다면 너무 고마울 듯하다. (뭐 백무현 씨가 해줘도 상관은 없다. 그치만 개인적으로 박시백 표 만화가 더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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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6-2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권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정말 시리즈가 대단하네요. 그래도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제 조카도 그렇고 저도 역사나 역사 만화를 좋아해서 탈이에요.ㅎㅎㅎ

마노아 2009-06-29 18:15   좋아요 0 | URL
네, 20권 예정으로 시작한 시리즈예요. 서가에 꽂아두었을 때 뽀다구가 좀 난답니다.^^
역사 만화 완전 사랑해요. 호호홋^^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