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은 자식들은 기존 체제를 송두리째 변혁하려는 경우에도 그 행동이나 언어가 그리 공격적이지 않다. 비록 자신이 타도하려는 체제 안의 인물들을 상대하더라도 가능한 한 예의를 지키면서 침착하게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또한 날선 비난과 공격보다는 설득과 교양을, 적을 많이 만들기보다는 적을 최소화하는 연합을,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비폭력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조직에 충실하며 지도자를 한번 정하면 거의 배신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쁜 자식들은 체제 내의 개혁을 추진하는 경우에도 그 행동이나 언어가 상당히 과격하고 공격적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이나 윗사람을 대할 때는 지나치게 흥분해 예의를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또한 설득보다는 제압을 앞세우고, 타인들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해 적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며, 비폭력적인 방법보다는 폭력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조직을 자주 옮겨 다니거나 배신을 잘 하는 편이다.

-211쪽

아버지 세계에 화가 나 있는 청소년들은 자신과 뜻이 맞는 소수의 불량스러운 친구들과만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패를 모아 깡패처럼 세상에 눈을 흘기며 다진다.

-220쪽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 허봉은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대신 끝없는 유랑을 선택했다. 나아가 그는 젊은 시절부터 폭음을 하거나 찬 음식을 많이 먹는 등으로 자기를 학대했다. 이는 그가 몹시 우울했으며,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상실함으로써 ‘점진적 자살’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두 눈 뜨고 어엿이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열등감이 있고 똑똑하지 않았으며,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당연히 그녀는 그런 남편을 좋아할 수 없었기에 부부 사이는 나빠졌다. 허나설헌은 만만찮은 성품을 가진 시어머니와도 갈등을 겪었다. 여기에 더해 두 아이가 연달아 사망했고 임신 중인 태아까지 유산했다. 아이들의 사망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임상심리학적 견지에서 보면 허난설헌이 ‘어머니 역할’을 원하지 않았거나 두려워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 역할을 힘들어했기에 아이들을 건강한 상태로 출산하지 못했고 뱃속의 아이도 잃은 것이다. 이는 허난설헌 자신의 어머니 관계가 무척이나 나빴을 거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물론 그녀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심한 결혼생활은 그녀의 심리적 상처를 더 악화시켰고 그것이 아이들의 사망으로 나타나 그녀를 더 절망하게 했을 것이다.
-221쪽

허균은 계속 기생들에게서 위안을 구했다. 어머니 관계가 나쁜 아들은 연애결혼을 할 경우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지 못하며,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지 못해 여러 여성들에게 연연하는 편이다. ‘방치’형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애정결핍을 주된 증상으로,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무의식적 감정으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대체로 자신을 추어올려주는 여성들 속에 있기를 즐긴다. 허균이 기생들과 놀기를 좋아한 것은 단순한 정력 문제가 아니라 여성들에게서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의 무의식적 소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허균은 자신이 색을 밝히는 걸 하늘이 준 천성 탓으로 치부했지만, 기본적으로 색탐이나 식탐은 타고난 욕망이 아니라 심리적 상처에서 비롯된다. 이이나 정조 같은 사람들이 색을 과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지스럽게 억누른 결과가 아니라 생에 초기의 만족스러운 어머니 관계가 낳은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224쪽

아버지와 어머니 그 어느 쪽과도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강릉 김씨의 삼남매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맏이인 허봉이 부모 역할을 하고 허난설헌과 허균이 그에게 의지하며 살았으나 허봉과 허난설헌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허균은 심리적 고아가 되어버렸다. 이후 그는 이복형제이자 큰형인 허성의 후원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텅 빈 부모자리는 그에게 쉽사리 메울 수 없는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226쪽

임진왜란이 일어나 허균 일가가 북쪽으로 피난을 가던 중에 그의 첫째 부인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는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이어 젖을 먹지 못한 첫아들도 죽었다. 차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과 절망감에 휩싸인 허균은 피난길에 타고 다니던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자신의 옷을 찢어 염을 했건만, 죽은 아내의 몸이 아직도 따뜻해서 차마 땅에 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왜적은 허균이 마냥 슬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에 그는 아내를 근처의 산에 가매장한 채 서둘러 자리를 떠야만 했다.

-228쪽

허균은 외향감정형(EF)이어서 언어나 감정표현이 아주 풍부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 많은 비난을 들었다. 외향감정형의 특성이 감정통제 능력이나 충동조절 능력의 결여와 결합된 것은 그가 생애 초기에 어머니에게서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부모에게 화가 나 있는 아들인 데다 감정표현이 풍부한 외향감정형이므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쉽게 그리고 강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외향감정형다운 낙천성도 있어서 임진왜란 시기 왜군에게 쫓기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즐겼고 누정들마다 걸려 있는 시판들을 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감정에 도취되어 무아지경 상태로 들어가기도 했다.

-231쪽

허균은 일을 맡아 할 때는 그 처리 속도가 빨랐고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1606년(선조39)에 중국의 사신인 주지번이 허균에게 신라시대부터 당시까지의 시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을 추려서 책 한 권으로 엮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그러자 허균은 사신을 접대하는 바쁜 일과를 수행하면서도 밤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선별해 베껴 썼다. 그래서 8일 만에 124명의 시 839편을 네 권으로 엮어 주지번에게 주었다. 이렇게 자신이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허균은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를 실수 없이 그리고 빈틈없이 수행했는데, 이는 그가 실천형(J)이라는 강력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허균의 성격은 ‘지도자(ENFJ)'로 추정된다. 지적인 지도자는 학문이나 예술에 뛰어나고 언어능력이 출중하다. 다만 이공계 쪽에는 별 흥미가 없는 편이다. 비상한 기억력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허균은 학문 수준도 높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시나 소설을 직접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작품들을 높은 안목으로 비평했다.
-232쪽

‘지도자’는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다. 타인의 동기나 의도를 탁월하게 간파하여 적절한 정서반응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적인 지도자는 현란한 지식과 언변, 적절한 감정반응을 통해 상대방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완전히 녹일 수 있다. 허균이 탁월한 외교관으로 맹활약하며 중국의 사신들을 능란하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격특성의 덕을 톡톡히 봤을 것이다. 또한 지도자에게는 일종의 ‘포스’와 차으이력,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능력이 있어 이들은 지도자로 맹활약한다. 하지만 허균은 분노감정이 많고 자제력이 부족했으므로 상대방의 좋지 못한 동기나 의도를 읽어내면 바로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의 성격적 온화함이나 공감능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에게만 선택적으로 작용해 그들에게는 지도자로 추앙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허균이 양반 지배층과는 격렬하게 충돌하면서도 서얼 출신이나 중하층 계급에서는 추종자들을 확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233쪽

허균은 청소년기인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청년기인 이십대 초반에 둘째 형인 허봉과 누나인 허난설헌을 연속해서 잃었으며, 스물 네 살에는 첫 번째 부인과 첫 아들을 상실했다. 커다란 비탄과 고독에 잠길 수밖에 없었지만 어떻게든 세상을 살ㅇ가야만 했던 허균은 스물여섯 살이 되던 1594년(선조27) 2월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같은 해에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써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비록 큰형인 허성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외톨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던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마음을 추스른 다음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235쪽

인생에서 승리하는 핵심적 요인은 삶에 대한 의욕 곧 생의 에너지다. 이러한 생의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부모에게서 받는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건강한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관성 있는 격려와 지지야말로 생의 에너지를 이루는 원천이다. 이 점에서 허균은 참으로 불행했다. 허균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천재인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건강한 양육을 받았고 아버지에게서도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허균은 놀라운 천재성을 타고 났으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충분한 격려와 지지도 받지 못했기에 생의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허균은 한창 왕성해야 할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인생의 허무함을 읊조리게 되었다. 그가 불교나 도교에 빠져든 것도 이러한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39쪽

허균은 세상살이에 지치더라도 최후의 보루인 어머니의 품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그랬듯이 자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의 시 중에서 ‘도피’와 ‘은둔’을 담은 시가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산속에 파묻혀 사는 신선이 되고 싶어 한 허균은 홀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법을 몸소 시험하기도 했고 신선같은 생활에 필요한 지침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생의 에너지가 부족해 끊임없이 세상에서 물러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정작 허균은 은둔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사랑과 인정을 처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허균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는 어린 허균이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고 단지 엄하게만 대한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시에 그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 마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사회개혁을 위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반항한 것이다.
-240쪽

보통 자기과시는 열등감을 방어하고 보상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허균은 자신의 괴팍한 성품 탓에 갖게 된 열등감보다는 타인들의 주목을 끌고 그들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자기과시의 주된 원인이었다. 곧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히스테리적 성향이 강했다. 서얼인 홍길동이 아버지에게서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고 왕에게 인정받아 병조판서가 된 것도 이런 무의식적 소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1쪽

허균이 서얼 출신들과 소탈하게 어울리고 그들의 운명에 깊게 몰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허균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서얼처럼 느끼고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어린 허균의 처지는 뜻과 재능은 있으나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로 양반계급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서얼들의 처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비록 허균은 서얼 출신은 아니지만 서얼들과 유사한 심리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자신을 강력하게 동일시하게 된 듯하다.
둘째, 허균은 양반 주류사회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곳이 필요했다. 허균은 어차피 별 가망이 없는 제도권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대신, 그 대안으로 불우한 이들과의 결합을 선택했다. 서얼들 입장에서는 허균처럼 재능이 뛰어난 양반 집안의 적자 출신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244쪽

그러나 불우한 이들에 대한 허균의 사랑과 관심은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위안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의 비판의식은 제한성을 면치 못했다. 그는 서얼들에 비하면 여성, 평민 나아가 노비 같은 천민들의 권리나 해방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개인적 소망의 제약을 받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거침없이 발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45쪽

그는 스스로 유자(儒者)로 지칭하고 <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이 양반의 후예임을 굳이 밝혔듯이, 서얼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양반계급을 인정했다.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신분제도가 철폐된 사회가 아니라 그저 착한 왕이 다스리는 신분제 국가인 것, 그리고 홍길동이 스스로 율도국을 조선의 속국으로 만든 것도 양반계급을 격렬하게 욕하면서도 그곳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허균의 이중적인 심리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246쪽

반체제 인사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인정에 목말라 있던 허균은 벼슬을 얻거나 승진을 하면 매우 뿌듯해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는 중앙의 높은 관직보다는 다소 지위가 낮더라도 마치 율도국의 왕처럼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안 될 때에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감독하는 지방관이 되기를 바랐다. 왜 그는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고 싶어 했을까? 일반적으로 아버지 관계가 나쁜 아들은 윗사람의 간섭이나 충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힘들어한다. 적어도 수령이 되면 자기 옆에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관은 없으므로 아버지 관계가 나빴던 허균은 그 자리를 그토록 원했을 것이다.

-247쪽

허균이 지방관이나 수령직을 수행하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허균은 실천적인 애민정치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개혁적인 인사들은 수령직을 얻으면 최우선적으로 백성들을 보살폈다. 그런데 허균은 수령이 되었을 때 백성들의 고통을 먼저 다독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용해야 할 돈을 자신의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것은 허균에게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심리적 상처가 깊은 인물이므로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249쪽

허균이 수령직을 원한 것은 신나게 놀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놀이에 집착하고 몰두한 것은 정서적 불안정 때문이었다. 마음이 편안치 못해 가만히 있으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물씬물씬 올라왔으니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고 그러려면 술을 마시며 진탕 노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250쪽

둘째, 공적인 수령직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를 실현하는 데 이용했다. 허균은 수령직을 자기 친구들을 접대하거나 부양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 죽을 때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산 이이는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장간을 차려 직접 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친구나 친인척들을 불러 수령직을 이용해 그들을 부양한 적은 전혀 없다.
허균은 뇌물을 받아 부정축재를 하는 식으로 아주 큼지막한 부도덕은 범하지 않았으나, 자잘한 도덕들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어겼다. 그는 자존심을 팽개친 채 주변에 관직을 청탁했고, 과거의 시험관이 되어서는 권력자들과 결탁해 시험부정을 저질렀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책을 수천 권이나 사들였는데 이는 공금을 횡령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수령직에 있으면서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부도덕성을 모나게 드러냈다.
-251쪽

허균 인생의 두 가지 기본 동기는 ‘아버지 세계의 인정(공명)’과 ‘세상에서의 도피(은둔)’였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었기에 허균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다가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255쪽

귀양지의 수령이 기생까지 보내줄 정도로 생활을 보살펴준 점을 고려하면, 그의 유배생활이 극단적인 궁핍을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허균은 지난 시절 맛보던 산해진미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렸으니 그에게 애초부터 신선이 될 만한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책까지 지을 정도로 음식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는 것은 그의 애정결핍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256쪽

중년기에 들어서면서 몸과 마음이 옛날 같지 않음을 부쩍 느끼고 있던 허균은 난생 처음 곤장을 맞고 귀양살이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 체제비판에 아주 민감한 광해군이 왕이 됨으로써 친구인 권필이 불시에 죽임을 당했고 조정의 유일한 버팀목인 큰형 허성까지 곁을 떠났다. ‘칠서의 옥’이 터지자 이이첨에게 몸을 맡겨 목숨은 부지했으나 허균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허균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이왕 ‘공명’의 길,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할 바에야 아예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그러려면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만 했다.

-259쪽

그는 광해군과 교감하며 인목대비를 폐하는 작전을 선두에서 이끌었고 이런 허균을 광해군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다. 어쩌면 이 시기 허균의 무의식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서 사랑받는다는 즐거움에 도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균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 그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까지 내정되자 조정의 실력자인 이이첨은 커다란 위협을 느껴 허균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자빈은 이이첨의 딸인데 아이를 낳지 못했다. 따라서 만일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허균의 딸이 아들이라도 출산한다면 허균은 명실공히 최고 실권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이이첨은 수하들을 총동원해 허균을 탄핵했고 그를 반역 죄인으로 몰아붙였다. 이 과정에서 허균은 자신을 해칠 만한 빌미들을 제공했는데, 그중 가장 큰 실수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문창부원군 유희분, 병조판서 박승종, 영의정 기자헌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다수 실권자들과 신하들을 한꺼번에 철천지원수로 돌아서게 만드는 자충수였다. 기자헌은 단박에 범인을 간파하고는 자신들을 모함한 사람이 허균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허균을 크게 신임하던 광해군은 이이첨을 비롯한 신하들과 맞서면서 허균을 보호하려 했으나 그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261쪽

일각에서는 허균이 실제로 혁명을 추진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지나친 억측으로 보인다. 그가 혁명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이첨의 계략에 걸려들어 죽었다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허균의 인생과 심리의 흐름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생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자아가 약해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 인물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혁명가다운 강한 의지보다 시인으로서의 감상이 더 앞선 사람"이라는 평은 정곡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조차 가볍게 번복한 그의 행동을 보아서는 그가 혁명을 계획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262쪽

허균은 성격적으로도 혁명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정서가 불안정한 외향감정형(EF)인 허균은 담대한 전략가나 강인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분노나 충동을 거의 억제하지 못했는데, 이런 허균이 광해군과 조정의 관리들을 완전히 속여 넘기면서 프락치활동을 하고, 비밀유지와 규율 엄수가 생명인 혁명을 설계하고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둘째,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 없었다.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무장반란인 임꺽정의 봉기를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허균보다 더 치밀하고 범위가 넓은 조직망이 있었고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근거지와 무기, 재물이 있었다. 그러나 허균은 양반계급 내에 어떤 조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직망도, 항쟁의 근거지도, 무기나 자금도 준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을 따르던 서자나 하층계급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공무시간을 뺀 나머지 인생을 대부분 기생이나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고, 글을 쓰고 시를 지으며 책을 만드는데 소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혁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뺄 수 있었을까?
-263쪽

왕인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개혁세력을 키우고 장용영ㅇ을 통해 친위부대를 육성하는 등 치밀하게 개혁을 준비했다. 그런데도 기득권세력의 격렬한 반발에 밀려 성공하지 못했는데, 허균의 무리들만으로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키고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을 무슨 힘으로 지킬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허균은 그렇게까지 무모한 타산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서변비로고’에서 오랑캐의 침략을 정확히 예언하면서 그들이 쳐들어올 통로와 그들이 열흘도 못 되어 평양에 이를 것이라고 족집게처럼 맞추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의 예언 그대로 20여 년 후 청나라 군대는 허균이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서쪽 길을 따라 열흘 만에 서울까지 진격했다.

-264쪽

셋째, 이이첨과 허균의 기묘한 행동을 들 수 있다. 만일 허균이 정말로 혁명을 계획했다면 이이첨은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해 명백한 증거들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허균에게 "조금만 참으면 풀려날 것이다.", "당신 딸이 후궁으로 뽑혔다"며 안심시켰는데, 놀랍게도 허균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전혀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265쪽

이이첨이 허균을 끌어내라고 하자 비로소 허균은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챘다. 그는 다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외쳐댔으나 그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은 이이첨 일당과의 긴밀한 협의 아래 인목대비를 시해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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