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아버지가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는 아버지가 반드시 고관대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버지가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날품팔이를 하든 상관없다. 단지 아버지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나가는 태도만 갖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며, 위축되고 비겁한 자세로 세상을 대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회를 두려워하게 된다.
-150쪽

새장가 문제에 대해 끝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던 이원수는 신사임당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새장가를 들었는데, 그는 양반 출신의 정식 후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상민 출신의 여자를 첩으로 들였는데, 이는 자신이 조금도 꿀릴 위험이 없는 배우자를 선택한 것이니 그는 그동안 신사임당에게 눌리면서 살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이의 계모인 권씨는 변덕이 심하고 화를 잘 냈으며, 술을 좋아해 아침부터 해장술을 마시기도 할 만큼 품행에 문제가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이이는 이 계모를 조금도 업신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해 효도했다.
-155쪽

이이는 화목한 대가정에 대한 소망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가 마침내 마흔두 살이 되었을 때 그것을 현실에 옮겼다. 그는 과부가 된 맏형수 곽씨와 둘째 형 부부, 동생네 가족 그리고 가난한 친척 등 모든 피붙이들을 끌어 모아 대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았다. 노비까지 합치면 거의 백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으니 당나라의 장공예(9대를 모아 한 집에 살았다. 참을 인자가 그의 가족의 화목 비결이었다 한다.)가 과히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157쪽

이이는 평생 동안 왕과 신하, 신하들 사이, 조정과 백성들 사이, 가족들 사이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대가족을 모으고 자신이 훌륭한 아버지가 됨으로써 그 꿈을 기어이 실현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나아가 그는 가족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것에 기초해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했다. 폐습을 시정하고 마을의 자치를 위해 향약회집법을 만들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쌀을 대여해주는 사창을 세운 것도 그 일환이다. 그는 심지어 대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양반으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을 하기도 했다. 대장간을 차려 직접 풀무질을 해 호미를 만들어 판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투철한 이이는 이런 필사적인 노력으로 아내와 가족들에게서 절대적으로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었으니 화목한 대가정에 대한 그의 꿈은 적어도 가족 차원에서는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이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화목한 대가정을 간절히 건설하고 싶어 했으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 특히 아버지가 남겨준 숙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158쪽

이미 열 살 때 이이는 아버지처럼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는 현실참여 의지를 피력했다. 그가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인 진사 초시에 당당히 합격한 것도 자신의 이런 꿈을 앞당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한창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그의 기대는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이이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159쪽

이이는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열아홉 되던 해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정도 머물며 불교를 깊이 연구했다. 이 기간은 크게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회불안과 싸움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안착하지 못한 사회, 아버지가 두려워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아들인 자신은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다.

-161쪽

이이는 청년기의 심리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하산하게 되는데 이는 사상적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정치적으로는 은둔에서 현실참여로, 심리적으로는 내면의 사회 불안에서 외부 사회로 방향을 돌리는 과정이었다.
이듬해 봄 서울로 돌아온 이이는 한성시에서 장원급제를 한다. 그 후 그는 아홉 번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해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다. 어떤 이들은 이이가 과거시험을 지나치게 많이 본 것을 출세욕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초점이 빗나간 추측이다. 물론 그가 과거를 어느 정도까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이의 빈번한 과거응시를 단지 그것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만일 출세가 목표라면 과거를 아홉 번씩이나 볼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관직에 나가 승진을 노리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에게 과거시험은 사회불안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사회불안에 시달리던 이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축적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자주 본 것이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3년 상을 치른 뒤에, 그가 무려 네 번이나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한 데서도 뚜렷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보다 그의 사회불안을 더 크게 자극했을 테니, 이이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과거시험을 네 번이나 보았고 그때마다 장원급제를 해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진 것이다.
-162쪽

이이는 후에 관직에 나갔을 때 과거제도가 효과적인 인재등용 방법이 아니라면서 과거제도를 반대하는 소신을 피력했다. 과거에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면 ‘실력이 없으니 괜히 저런 소리를 한다’는 핀잔을 들었겠지만 구도장원공이 그런 얘기를 하니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전무후무한 천재라는 ‘공식인증서’를 받게 되었고, 이는 사회생활에 대한 그의 막연한 불안감을 억누르고 자신감을 드높여주는 큰 무기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구도장원공’이라는 눈부신 휘장을 가슴에 달고 사회에 나가야만 한 것이다. 아버지 세계에 대한 탐색전이자 사회진출의 첫 관문인 과거시험 무대를 천재성으로 제압한 이이는 드디어 국가를 화목한 대가족으로 만드는 대장정에 들어섰다.

-163쪽

이이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물평을 통해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 자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가 타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주로 ‘경연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이는 막역한 친구인 송강 정철에 대해 "정철 같은 이는 충청, 강개하여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합니다."하고 칭찬하면서도 "도량과 식견이 편협하고 고집스럽다"고 비판했다. 유성룡에 대해서는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다"고 하면서도 "이해관계를 살피는 뜻이 있었다."면서 그의 기회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자신과 가깝게 지냈고 선조에게서 박학하다고 인정받은 유희춘에 대해서는 "단지 고서를 많이 읽었을 뿐 실제로는 식견이 없고 옳고 그름에 어두우니 이것이 진실로 한탄스럽다"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비판의 화살은 가족이나 친인척이라고 해서 비켜가는 법이 없었다. 이이는 친인척인 이기를 을사사화의 주모자라고 격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167쪽

이황의 낙향으로 이이는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진심으로 존경하던 대학자요 정신적 아버지로 간주하던 이황의 은퇴는 세상에서 도피한 아버지에 대한 영상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이에게는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아버지의 역할 모델이 필요했다.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쓰러진 조광조를 이이가 높이 평가한 것도 그가 이런 아버지의 역할모델에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172쪽

이황의 은둔과 사망은 이이에게는 커다란 불운이었다. 그는 이황의 사망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약 2년 6개월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반년 조금 넘게 청주목사로 일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병을 이유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후에도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이는 계속 관직을 사양했지만 선조가 허락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조정에 나가게 되었다. 3년 상에 비견될 만한 기간 동안 은둔했던 이이가 조정에 나가서 한 행동은 그동안 그의 가슴속을 지배한 고뇌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황이 사망한 뒤 한동안 은둔했던 이이는 조정에 복귀하면서 선조에게 ‘이황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결코 미워할 수는 없었던 정신적 아버지 이황과 화해하고 그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174쪽

선조는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여러 가지 점에서 아주 비슷했다. 선조는 성품이 착하고 영리했지만 국가 일에 별 뜻이 없고 의지가 박약해 도무지 실천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성격조차 아버지 이원수처럼 내향직관감정형(INF)이니 선조를 볼 때마다 이이의 무의식은 그를 아버지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선조는 이이가 자신의 아버지 상을 투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춘 운명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175쪽

이이는 아량 부족, 불공정성, 지나친 승벽이 선조의 세 가지 심리적 병(그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기질의 병)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신하들 중 의지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적은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며, 선조가 무사안일에 빠져 국가를 통치하려는 뜻을 세우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만언봉사’ 등에서는 선조가 덕이 없고 의심이 많으며 일관성이 없다고 했고,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들과 궁녀들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무서운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단순히 통치행위만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선조의 행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비판했고 마치 심리학자처럼 그 마음속 원인까지도 밝혀내 꾸짖었다.

-178쪽

선조는 비록 열등감 때문에 과시욕이나 승벽이 심하고 속이 좁았지만 그리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이처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선조가 ‘군자도 사귀기 어려우나’ 소인들에게 휘둘릴 정도로 아둔하거나 악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가 나라가 망하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지언정 이전의 왕들처럼 신하들에게 휘둘려 사화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했다. 어쨌든 선조는 적어도 폭군은 아니었으므로 이이는 그를 비판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179쪽

이이의 사회생활을 들여다보면 그가 아주 빈번하게 조정을 들락날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이 사망한 뒤에 은거한 2년 6개월과 선조의 비난에 충격을 받고 낙향해 은거한 5년 여의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틈만 나면 병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낙향했다. 그리고 선조가 자신에게 벼슬을 내릴 때마다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사직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이의 사직 요청은 단지 의례적으로 사양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만일 선조가 이이의 사직 요청을 모두 받아줬다면 그는 거의 평생을 은둔자로 살았을 것이다.
이이의 반복되는 진퇴는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자신을 심하게 비판하는 데다 관직을 거부하고 자꾸 낙향하려 하자 선조는 이이가 왕을 섬기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이의 이런 모습은 다른 동료 신하들에게도 좋게 비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그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는 원인이 되었다.
이이는 왜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견되는데도 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이 있다.
-183쪽

첫째, 이이의 사회불안 때문이다. 이이는 선조를 볼 때마다 뜻을 세우지 않고 세월만 축내다 간 아버지가 되살아났고 그것은 이이의 사회불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선조가 이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훌륭한 군주로 거듭났다면 이이의 사회불안은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에게 그랬듯이 선조에 대한 충고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선조는 아버지 이원수보다 한 술 더 뜨는 인물이어서 이이를 비난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선조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고개를 뻣뻣이 쳐들던 극심한 사회불안과 좌절감은 이이에게서 사회와 맞서 싸울 용기를 송두리째 뺐어갔다. 이런 이이의 심리상태는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184쪽

둘째, 무의식에 각인된 이원수-신사임당의 관계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이원수에게 충고와 비판을 하다가 그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한동안 냉전상태를 유지하며 거리를 두고 지내는 책략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로 금강산에 들어갔다 돌아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이도 선조에게 충고와 비판을 하다가 그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면 후퇴하여 마음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달려드는 패턴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서는 이런 진퇴를 거듭하는 책략을 사용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것을 사회생활에서까지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185쪽

타인의 마음을 잘 배려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는 이이의 용맹한 비판은 분명 긍정적인 점도 있었으나 그의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모름지기 선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이이를 상당히 어려워하고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193쪽

사고형(T)은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리에 맞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해서 남들한테 차갑고 냉정하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물론 건강한 사고형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감능력도 있지만, 다른 변수와 결합될 경우에는 본래의 특성을 확연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감정과 남자들에 대한 어머니의 거침없는 비평을 들으며 자란 사고형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이는 타인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남자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4쪽

이이가 성인(聖人)에 가까운 인물이고 대학자라는 것은 확실하나 그는 노련한 정치가는 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가로서의 이이는 마음 속 깊이 존경하면서도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비판한 조광조를 넘어설 수 없었다. 어쩌면 사회불안이 심한 이이는 개혁정치가 조광조가 왕의 신임을 잃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선조에게 더욱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왕의 신임을 받더라도 개혁세력을 육성하지 못한다면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196쪽

이이는 화목한 대가정이라는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이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00쪽

이미 세상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다는 선조의 넋두리에 대해 이이는 "그 자리에 맞는 임금이 있고 그 자리에 맞는 재상이 있으면, 이는 회복할 수 있는 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실로 그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으니, 일을 하는 데도 공이 없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못 보았습니다." 두 손 놓고 비관에 빠지기 전에 이이의 간곡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나의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천하를 얻더라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온 세상을 얻더라도 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어기지 않으며 살았던 이이가 참으로 그리워진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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