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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작년 8월 달에 첫 장을 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 읽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고 말았다. 이렇게 챕터 구성이 짧아서 토막토막 읽기 좋은 책은 짬짬이 읽다가 오래 묵히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뭐, 나의 게으름 탓이다.
모두 합해서 열 여덟 명의 작가들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대상이 많은 까닭에 한 사람에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수 없었지만, 액기스만 모아서 핵심만 얘기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혹은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에 대한 인터뷰만 책 한 권이라면 그 책을 읽을 가능성이 너무 없지 않은가.
이 중 2/3는 내가 아는 사람이고, 그 중에서 책까지 읽어 본 사람은 대략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몇몇 분은 앞으로도 그 책을 만날 가능성이 별로 없기도 하고, 몇몇 분은 꼭 만나고 싶다고 책 제목까지 받아 적기까지 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책을 쓰고, 이렇게 사시는구나...하고 감탄은 할 수 있지만, 그게 꼭 닮고 싶은 사람은 아닌 까닭에 평가가 박해질 수 있다. (그 사람이 공병호 씨라고 말하면 좀 거시기한가???)
다양한 분야의 글쟁이들을 인터뷰 했지만, 인문학 분야에서, 미술 분야에서, 역사 분야에서 등등... 분야가 겹칠 수 있기 때문에 앞의 분에 관한 내용을 쓰면서 '최고의 저술가'라고 해놓고, 뒷 사람도 최고의 저술가라고 평가하는 내용이 곧잘 나온다. 어쩌겠는가. 누구는 2인자라고 쓰긴 힘들지. 나름의 차이와 다양성이 있으니 그 정도는 각자 알아서 새겨 듣자.
국문학 저술가 정민 교수님.
성실한 글쟁이시다. 동시에 지독한 지식탐구가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취미보다도 공부하기를 더 즐겨하는 학자라니, 천성이며 운명이며 팔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덕분에 대중들은 그가 쏟아놓은 결과물들로 지식의 달콤함을 함께 맛본다. 고마운 일이다. 파일이 꽂혀 있는 회전 거치대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아이디어 싹들이 모여 있는 곳. 많은 인터뷰이들이 각자 저만의 메모 보관법을 갖고 있던데,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모아두고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연구 성과가 달라지는 듯하다. 새겨들을 일이다. 정민 교수님은촌각의 시간도 아껴서 알뜰하게 사용하는 경제적인 사람이다. 21세기의 다산 정약용이랄까. 어머. 성씨도 같네. 정약용과 정민! 정민 교수님의 책은 읽은 것은 평범했고, 아직 읽지 않은 책 중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평가가 썩 훌륭한 것들이다. 조만간 빨리 만나고 싶다.
글 잘 쓰는 팁이 인상적이다. 형용사와 부사를 줄이고 -이다. 형 어미를 쓰되 강조할 때 '-있다'와 '-것이다'를 쓸 것. 거품을 들어내라는 말. 김훈의 글쓰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전혀 염두에 둬본 적이 없는데 내가 쓰는 글들이 어떤 형태로 읽히는지 점검해보고픈 욕구가 생긴다. '낭독'을 활용해서 잘 읽히는지 짚어본다는 것은 꽤 효과적으로 들린다. 언젠가 나도 해본 듯하다. 권해준 책 '생각 없는 생각'은 품절이다. 아쉽다. 아무튼, 그의 스승 이종은 교수와의 에피소드는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이 되는 순간, 내공의 깊이와 차이를 깨닫는다. 덜어내고 가벼워지는 더 채워지고 깊어졌다. 아름답다.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멀기만 했던 예술을 대중 가까이 끌어온 저술가다. 한겨레 미술 기자 출신인 그는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다. 회사를 나와서 잡지사도 그만두고 직업 저술가의 길을 택하기 위해 그가 던진 출사표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학고재가 출판사 겸 화랑이란 것은 처음 알았다. 그곳에서 나오는 일련의 책들에 대한 수긍이 조금 더 가는 단서다. 선인세라 치고 받은 1100만원. 거기에 저금 300만원을 보태어 일가족 네 명이 함께 떠난 유럽 여행. 그리고 나온 책이 <50일 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땀과 노력이 밑바탕이었지만 우선 '기획'의 승리에 방점을 찍고 싶다. 기획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수입이 억대란다. 엌!소리 나온다. 스테디 셀러는 확실히 다르구나. 각주를 거의 쓰지 않는 글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도 각주 읽는 것 정말 싫다. 그나마 책 아래에 나온 것은 덜 부담스럽지만, 책의 맨뒤에 몰려 있는 각주는 정말...ㅠ.ㅠ '나쁜 사마리아인들' 읽을 때 책 넘기다가 화딱지 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보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써야 한다는 의식이 확고하다. 그건 대중연합주의가 아니라 그가 대중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의 책이 진짜 빛을 발하려면 해당 미술관을 좀 가보고 실제로 경험해 보는 작업이 따라줘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런 경험이 없는 게 슬프다. 그래도 언제고 다녀올 날이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오주석 씨의 글이 너무 편안하게 읽히는 까닭에, 그 후에 만난 이주헌 씨의 글들은 내게 너무 딱딱하게 읽혔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사'는 그나마 덜 했지만, 훨씬 앞서 나온 50일 간의 미술관 체험은, 사실 읽다가 중도 포기했다. 다시 만날 날을 나 역시 고대한다..;;;;
가만 보니 각 인터뷰이마다 사진 찍은 사람이 다르다. 오옷! 한 번에 인터뷰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신선하다. 사진이 칼라였다면 눈은 더 즐거웠겠지만, 그건 고스란히 독자의 부담으로 돌아올 테니 만족해 하자. 책의 도판도 아니니 말이다.
역사 저술가 이덕일 씨는 내가 참 좋아하는 분이다. 학벌과 인맥이 너무 강조되는 한국의 풍토에선 교수직을 따내기 어렵다고 여긴 그는 일찍부터 역사 저술가의 길을 택했다. 그 자신은 꿩 대신 닭의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독자 입장에선 고마운 차선책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분의 강연을 들어봐서 하는 얘긴데,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훠얼씬! 훌륭하신 분이다. 말솜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솜씨가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문학 서적에서 '문학적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게 나로서는 정말 신선했고 자주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정통 사학자의 코스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재야 사학자'라는 꼬리표가 늘 달려왔었다. 그것 역시 학연 지연 서열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가 낳은 선입견으로 여겨진다. 이덕일 씨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면 그 사람 의견은 비주류야! 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다. 무조건적으로 절대적 지지를 보내던 초기에 비해서 요즘엔 조금 거리를 두고 읽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게는 참 좋은 글쟁이이신 이덕일 선생님!(갑자기 호칭이 바꼈다!) 앞으로도 부지런한 저작 활동을 기대한다. (그렇지만 개정판 말고 새 책을 원해요!)
NGO 저술가 한비야 씨. 삶과 글이 일치하는 글쟁이라는 제목의 표현이 딱 들어맞는 듯 싶다. 쓴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외우다시피 한다는 그녀. 직접 '낭독'을 한다는 것은 독자의 입에 어떻게 읽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보통 완벽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부지런하기까지! 이 책에는 여러 베스트셀러 작가가 나오지만 한비야 씨의 책이 팔린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지구 세바퀴 반이란 표현은 그녀에게 여러모로 딱이다. 지구 세바퀴 반을,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는데, 제대로 순서대로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이들 중에는 '교수님'이 많았다. 이 분들은 안정된 수입이 뒷받침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른 분들보다는 좀 더 연구 활동에 몰입하기가 좋은 조건을 갖고 계시다. 게다가 '방학'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유급 방학! 반면, 그런 고정 수입이 없으신 분들은 연구, 강연, 저술, 재차 강연...의 순서를 반복하시면서 작업을 수행하신다. 노성두 씨 인터뷰에서 제일 놀랐던 게, 가장 쓰고 싶은 책은 고고학 책인데 외국의 사진을 저작권료 지불할 재간이 없어서 못 쓰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도판 사용료는 미술이나 건축처럼 사진을 많이 쓰는 출판 분야에서 책을 못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비싼 도판의 경우 책 한 페이지 정도 크기로 쓰는 데 10만 원 가량 들기도 한단다. 300쪽 짜리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사진 100장 정도 쓴다면 수백 만원에서 1천만 원 정도가 도판 사용료로 들어가니, 책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 어마어마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비용을 건지려면 최소 3천 부는 팔려야 하는데 우리나라 출판문화와 독서 문화를 생각한다면 가능하지 않은 손익 분기점이다. 책 한 권 내고 출판사 망하라고 할 수도 없고, 사재를 털어 책 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부분들이 보완될 수 있게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급한데, 그런 성숙한 풍토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우린 그저 고고학의 즐거움을 '마스터 키튼'으로 달래야 한단 말인가!
훌륭한 책을 쓰기 위해서 영어는 기본으로 깔고 가고, 독일어 불어에, 심지어 라틴어까지 1차 사료 강독이 가능한 저자들의 지적 수준을 보며 입이 쩍 벌어진다. 그래, 학문의 길은 이렇게 치열하구나! 이분들이 펜을 꺾는 일이 없도록 오래오래 지지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함께 할 일이다.
대학에서는 논문 발표만 중요한 성과로 취급하고, 책을 출판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는 분위기라는데, 그런 것도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학문이라는 것이 소수 엘리트들만을 위한 지적 허영심으로 자족해야 하겠는가.
초반에는 리뷰 쓸 생각에 메모를 하면서 읽었는데, 그 후 수개월 방치해뒀다가 이번 주에 다시 읽으면서 촤르륵 읽는 바람에 메모를 못 했다. 좀 더 성실한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이 막 미안해지고 있다. 인상깊었던 책들을 다시 찾아 읽는 것으로 그 미안함을 달래보련다.
다음엔, 인터뷰어 구본준 기자의 글쟁이로서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의 서재도 너무 궁금하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이, 이 인터뷰보다 훨씬 재미있었음은 물론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들도 이런 만남, 이런 인터뷰, 그들의 저작물들의 도움이었겠지만. 아무튼 간에!
참, 인터뷰이들에게서 글쓰는 Tip이 인터뷰 말미에 나오는데, 뒤로 갈수록 그게 사라진다. 팁도 안 준 분들은 왜 안 주셨을까? 혼자만의 비법으로 남겨두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