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베트남과 친구되기
김현아 지음 / 책갈피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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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참전군인, 그 혼돈과 절망

베트남에서 민간인에게 총을 겨누었던 대부분의 젊은 청년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 때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거부’할 수 없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라고만 교육 받았고, 상관의 명령이 곧 법이었으며, 복종하지 않는 군인은 처벌의 대상이자 조롱의 대상이었다. 전쟁에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한가. 내 신념과 의지와 다른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가. 이것은 체제와 시스템의 문제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전장에서 이들의 몸의 주인은 이들이 아니었다. 국가의 명령으로 이들은 총을 쏘고,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징집에서 전투까지 국가는 개인을 점령하고 지배한다. 개인의 의지와 가치판단은 무력해지고 군대 혹은 국가의 의지가 나를 움직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 몸의 기억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몸이 기억해내는 혼란과 절망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고, 국가는 이들의 기억 중에 필요한 부분만 선별하여 재생한다. 국가폭력은 한 개인의 꿈과 상상력을 제한하고 망가뜨린다. -219쪽

나는 베트남과 관련된 혹은 전쟁과 관련된 책과 영화는 다 찾아서 봅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를 해석하고 정리하기 위해. 그러나 전쟁 이야기 그 어느 곳에도 가족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참전군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혼돈.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전군인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되고 망가지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자기 자식을 전쟁에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늘 전쟁 영화가 조금만 사실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사람이 사람의 배에 칼을 꽂고, 아기에게 총을 쏘는 것이라는 걸 솔직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용감한 사나이 신화는 없다는 것을. 이 세상 어느 전쟁에도 자식들을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영혼을 망가뜨리고 정신을 파괴합니다.
-227쪽

우리에게 한 번만이라도 "민간인 죽이지 마라. 아이나 노인이나 여자 죽이지 마라. 강간하지 마라." 한 번이라도 얘기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겁니다. 단 한 번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월남 가는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배 안에서, 월남에 도착해서 내가 들은 이야기는 "강간을 하고 나서는 반드시 죽여라, 죽이지 않으면 말썽이 생긴다. 아이들도 베트콩이니까 다 죽여야 한다"였습니다. 베트남전의 성격을 알기만 했더라도, 베트남의 역사를 한 번이라도 읽었더라도 나는 그렇게는 안 했을 것 같아요. "김수병님 우리 비겁하게 싸우다가 용감하게 귀국합시다." 아끼던 후배였던 오용석 일병이 하던 이야기였지요. 월남전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오일병은 그날 짜빈동에서 전사했습니다.

-229쪽

나는 이 나라가 자유와 민주가 보장되지 않는 한 한 개인은 언제라도 남의 전쟁에 끌려가 개처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는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입니다. 나뿐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과 참전군인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기념관이 서고 그와 함께 우리를 파병했던 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있는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정의가 서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이 땅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는 늘 벼랑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229쪽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전쟁이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따라다니는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안 되거나 큰 사고가 날 때면 죄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군인입니다. 내가 죽인 사람의 어머니의 눈빛과 통곡을 눈 앞에서 본 사람보다 더 불행한 군인이 있을까요. 내 정신의 외상엔 늘 피가 흐릅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였던 그 영령을 위로하고 우리 때문에 피해입었던 민간인들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비는 것이 내 생에 마지막 할 일입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셨다가도 차마 고개를 못 들고 우는 저에게, "그때 따이한들도 20대 초반이었지. 뭘 알고 했겠어. 불쌍하게 왜 그래"라고 말해준 그 베트남 할머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아픔을 나누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이겠는가’가 내 화두입니다.
-230쪽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갔던 대부분의 병사들은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베트남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베트남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말로만 듣던 야자수, 정글 너머로 태양이 이글거리는 남국의 정취가 묘한 동경심을 불러 일으켰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구체적인 욕망이었다. 당시의 사병들에게 40~50불 정도의 돈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한 번쯤 참전을 결심할 수 있는 매력을 풍겼다.
-232쪽

전쟁이 슬픈 건 가난한 사람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가난한 사람을 제일 먼저 굶주리게 만들고, 제일 먼저 죽어가게 만든다. 어디에도 안전하게 깃들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 혼돈의 와중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233쪽

밀라이 학살 사건에서 미군측에서도 한 명의 흑인이 부상을 당했다. 흑인병사 카터는 이 야만적인 학살행위를 참을 수 없어 스스로의 발등에 총을 쏘았다. 그가 이 학살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에게 총을 쏘는 것이었다.
-240쪽

밀라이 학살은 구정대공세 직후에 이루어졌다. 구정대공세는 1968년 1월 31일 시작되었다. 약 6만 7천 내지 8만 4천의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이 거의 모든 도시를 동시에 집중공격해 점령했다. 44개의 지방수도 중에서 36개를 공격했으며, 242개의 읍들 중에서 64개를 공격했다. 사이공도 기습해 미국대사관 마당까지 침입했다. 구정대공세는 미국 지도자들과 언론, 일반 국민에게 결정적인 심리적, 정치적 충격을 주었다. 미국인들은 정부의 발표처럼 베트남에서 미국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결코 승리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목격했다.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실체도 목격했다. 군사적 승리의 환상이 여지 없이 무너지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무너졌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미국의 힘의 한계를 넘은 무모한 시도이며 실수라는 인식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242쪽

미국의 TV들은 죽어 넘어간 미군 시체들을 연일 보도했다. 또 사이공 대통령궁을 공격한 13명의 특공대원이 인근 아파트에서 저항하는 장면을 16시간이나 방영하였다. 그 중에서도 더욱 결정적인 장면은 월남 치안국장이 베트콩 포로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이었다. 이것은 미국과 전 세계는 물론 남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준 끔찍한 장면이었다. 구정대공세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이 군사적으로도 충격적인 저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술은 전투의 승패를 떠나 심리적,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정치전이었다. 구정대공세는 미국 내에 반전 무드를 조성하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데 크게 성공했다.
구정대공세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를 추진한다. 베트남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하기 위한 모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와, 캄보디아를 비롯한 인근지역으로 전장을 확대하는 정책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정대공세 이후 미국이 전개한 베트남 파괴 전략은 세 가지 형태를 띠었다.
-243쪽

첫째, 대량공습작전이었다. 특히 B-52 폭격기를 동원한 융단폭격과 전투기들에 의한 네이팜탄 공격이었다.
둘째, 지상군을 이용해 베트남 마을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셋째, CIA가 진두지휘한 피닉스작전을 통해 대량체포, 고문 및 암살을 자행했다.
-243쪽

협상테이블에서 보다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전 베트남 민족을 대상으로 대량파괴와 인간적 고통을 가하는 것이 미국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밀라이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밀라이 학살사건은 결코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미국이 추구한 전략의 하나였다. 학살 직후 미군사령부는 진실을 왜곡한 채, 학살사건을 거대한 승리로 바꾸려고 했다. 출라이에 있는 미군본부는 수백 명의 기자들에게 1968년 3월 16일 저녁에 뉴스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들은 밀라이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이 전투는 자정 늦게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128명의 적군을 사살했고, 13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됐고, 총 3자루를 노획했다고 발표했다. 사이공에 거주하던 기자들이 제공한 뉴스에 따라 이 기사는 <뉴욕 타임즈>와 다른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다.
-244쪽

말라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세이무어 허시 기자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밀라이 학살을 처음 안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학살사건이 일어난 뒤 스위스 제네바의 베트남 평화협상 때 북베트남 쪽에서 학살사건 기록을 기자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러나 어느 미국기자도 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한 신문만이 이를 보도했다."
"미국 국민들은 밀라이 학살사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존 웨인 영화에서처럼 미국인들은 항상 옳고 선하다고 믿어왔는데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당시 한 여론조사는 53%가 밀라이 학살을 믿지 않았으며 나머지 학살을 믿은 사람 가운데서도 대다수가 기사화는 되지 말았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246쪽

미국기자들은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부대에 찾아가 군인들을 찾고 언론에 보도된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과 목격자들이 매일 언론에 나타났다. 그리고 헤브럴즈의 사진들은 참혹했던 현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미국 국민들은 흥분했다. 미국의 아들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살인자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경악했다. 세이무어 허시 기자는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세계 최고 국민으로서의 오만을 꼬집었다.
"이제 많은 미국인들이 전쟁에는 영웅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론도 미국 군부에 대해 서슴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좋은 변화다."
그는 밀라이 학살에 참여한 미국 병사들도 피해자라고 했다. 결국 책임은 핵심 정책 입안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케네디, 헨리 키신저, 미국 정보기관 등 권부 핵심에 대한 비판과 탐사보도를 아직까지 멈추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47쪽

재판이 시작됐으나 모든 장교들이 가벼운 재판을 받고 사면됐다. 결국 모든 책임은 1소대장이었던 켈리 한 사람에게 전가됐다. 켈리는 형을 받고 월급과 수당도 빼앗겼다. 군대에서도 제명당했다. 그러나 재판 하루 만에 닉슨은 켈리를 석방할 것을 명했다. 켈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나중에 조지아 주에서 유명한 보석상이 되었다.
-248쪽

9장. 화해로 가는 먼 길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소속 치과의사들 중 광주에서 온 회원들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료단 중 3조가 밀라이에 간 날이었다. 3조에는 광주 팀이 많았다. 광주 사람들은 그 사진들 속에서 자신들의 형을, 동료를, 어머니를, 누이를 본 것일까.
-256쪽

화해는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 화해는 우아한 장면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통곡과 울부짖음, 거품을 물고 내뱉는 저주의 욕설과 오열로 바닥을 뒹굴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엎어져 발버둥을 치는 것.
그렇게 한다 해도,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화해가 있다.
우리는 지금 베트남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밀라이의 사진은 광주와 닮아 있다. 가족들의 시신 앞에서 통곡도 잊은 채 넋이 나간 어머니,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아낙, 머리가 터지고 깨져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기, 살아남은 사람들의 퀭한 시선...... 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화해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던가.
-257쪽

이제 광주는 5월이면 최루탄 대신 고상한 사람들의 헌화가 줄을 잇는다. 작년에는 김종필이 헌사를 바치고 올해는 국무총리 이한동이 기념사를 했다. 각 정당의 대표들이 꽃을 바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된다. 그들은 다시 무덤 속의 시신들을 능멸하고 비웃고 있다. 광주는, 죽었다. 그들이 황금마차를 타고 줄을 지어 광주에 오는 순간, 광주는 화석이 되었다. 살아 춤추던 광주, 우리의 생명이던 광주는, 아주 오래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득한 역사 속으로 등떠밀려 들어갔다.
저 자들은 80년 5월에 무엇을 하던 자들인가. 저들의 화려한 수사는 내 무덤에 뱉는 침이다. 무덤 속의 시신들이 일어난다. 오월 그날이 다시 왔는데,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학살의 책임자들은 평안하고 자유롭다. 마음의 평화를 그들의 것이다. 과거는 과거, 미래를 보자고 손을 내민다. I am sorry 하면 That's ok 하란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다시 옹졸하고 못난, 어쩔 수 없는 인종들이라고. 그러니 80년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뒷통수를 향해 돌을 던진다.
-258쪽

내미는 손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고문을 했던 자들은 그것을 잊을 수 있지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고문을 했던 자들은 화통하게 웃으며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지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다.
극복되지 못하는 상처라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치유 불가능한 상처라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폭도가 열사가 되고, 고아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이 되고, 음울하던 묘역이 말끔하게 치장되고, 그 자신이 피해자였던 대통령이 화해를 하자고 해서, 피냄새가 덜 가신 그들의 손을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전두환이 언제 한 번 광주에 대해 진실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들이 언제 한 번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역사의 심판을 받았는가.
-259쪽

이 세상에는 한 번 망가지고 부서지면 그 어떤 것으로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화해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상처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섣부른 화해나 어설픈 악수를 청하지 말고 상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261쪽

베트남과 친구 되기-‘나와 우리’가 베트남과 만나는 방식
‘나와 우리가’ 베트남 문제를 풀어가는 중심축은 두 가지다.
첫째는 피해자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문제다. 이것은 정부의 사과와 배상과 상관없이 피해자들이 받은 상처에 주목하고, 이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찾는 일이다. 이 일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역을 실제로 답사하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들의 분노와 이들의 억울함을 함께 듣고, 죽은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으로 진혼의 의식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그들의 상처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은 이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바탕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까지 우리는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50년이 지나서야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 때문이었다. 가난한 식민지의 딸이 겪어야 했던 조직적 강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할 자신의 사적인 체험으로 전락하고,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여성을 성노예화했던 사실은 조직적으로 은폐됐다. 강간당한 여자, 순결하지 못한 여자라는 이데올로기는 할머니들의 나머지 삶을 더욱 곤궁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270쪽

피해를 당한 쪽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일 때 그 피해는 더욱 은폐되고 묻혀진다. 독일에 의한 피해국이 프랑스나 영국이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 의한 피해국이 약소국이었다는 사실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불완전하게 처리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베트남 내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생존자와 유족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 중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전쟁이 끝나고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하소연할 데 없는 이 억울하고 서러운 죽음에 대한 진혼으로, 생존자와 희생자들의 상처를 감싸안는 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영혼을 치유하고, 그들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나와 우리’는 생각한다.
망각과 경제교류만으로는 타민족과의 신뢰를 쌓아갈 수 없다. 상처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노력만이 새로운 21세기 동아시아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베트남 전쟁 진상 규명 움직임은 보여주고 있다.
-271쪽

둘째는 한국 사회 내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찾기를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전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전에는 우리 사회의 반공이데올로기, 군사문화, 가부장제, 국가폭력의 문제가 얽혀 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다치고 상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군사문화는 굳건히 뿌리내리고, 반공이데올로기는 온 몸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아시아와 제3세계에 대한 편견은 무지를 넘어 폭력으로 치닫고, 남북의 분단극복은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호흡이 달라진다. 많은 여자들이 군사문화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성폭력에 희생당한다. 지식인들과 문화권력은 서구세계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적 식민지의 삶을 살고 잇다. 아시아인이면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 불안한 존재인 우리는 늘 서구의 가치와 문화를 지향한다. 베트남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모든 문제를 광장에서 토론하고 논의하는 열린 구조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터져나왔을 때 반응은 다양했다. 일부 참전군인들의 폭력적 대응은 예상했던 바였다. 솔직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래도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광주 민중항쟁을 거치면서 얻은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무관심하다.
-272쪽

반공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건재하고, 국가는 점점 교묘하게 개인과 일상을 통제한다. 폭력과 억압의 방식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파고들며 몸과 시간까지도 통제한다. 국가보안법은 언 땅 위에서 목숨을 걸고 단식시위를 해야 개폐가 논의되고, 노동자들은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동성애자 등 소수자들의 인권탄압의 바탕에는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인종주의와 국가폭력, 가부장제가 있다. 국가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억압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정치 권력은 반대자를 없애기 위해 종족적인 차이, 인종적 차이, 종교적 차이, 지역 간의 불평등 등의 사회적 균열의 공간을 언제나 활용하려는 유혹을 가질 수 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차이와 다름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권력과의 싸움이다.
탈정치화는 또 하나의 정치다. 포스트 모던의 시대, 개인주의와 합리성은 전제된 것 같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환상은 개인을 역사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들의 미래 역시 폭력과 야만으로 얼룩질지 모른다.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써 평화에 대한 신념체계를 만들어 현실적인 힘을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념이 체계를 갖추면 인권을 보장할 길이 생길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돕는 일이고, 또한 우리가 다시는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을 약속하는 신뢰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273쪽

독일 뮌헨 근처의 다하우란 조그만 마을에는 예전 나치 강제수용소를 복원한 전시관이 있다. 인간의 잔인성이 벌인 극치의 행각을 보여주는 전시실 출구 바로 위에 쓰인 산타야나의 글 하나가 방문객들을 짓누른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과거를 다시 경험하도록 단죄받는다." 부끄러운 과거를 담은 수용소 유적을 후대의 산 교육장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절대 잊지 말자고 글귀로 다짐하는 독일 사람들. 자신들의 만행이 인류범죄임을 고백하고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했기에 독일은 세계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의 세계국가를 자처하는 일본은 지난 범죄행각을 힘의 논리로 포장하여 미화하기 바쁘다. 죄책감과 책임감은 안중에도 없다.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과거의 극복은 ‘함께 기억하는 것’이지 ‘혼자 묻어버리는 것’이 아님을.(이기상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한 일간지에 실렸던 글이다. ‘일본’이라는 말 대신에 ‘한국’이 대입되어도 모든 문장은 성립한다. 우리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지배권력의 기억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가 마주보아야 하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음을.
-274쪽

10장. 저항하고 재해석하기
278
지금까지 내가 본 베트남전 필름이나 영화에서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피해자로만 그려졌었다. 늘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베트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보는 이 필름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적들을 맞아 힘차게 싸우고, 대통령궁으로 탱크를 밀고 들어가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라하지도 않고, 미개해 보이지도 않고, 무모해 보이지도 않았다. 용감한 투사들, 민족해방을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고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는 승리자의 모습이다. 카메라의 권력, 렌즈의 세계관이 바뀌자 등장 인물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본 대부분의 필름은 미국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들의 카메라에는 미국인의 고통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하는 필름에서조차 총을 쏜 병사의 자괴감과 후회와 반성은 있었지만, 그 총을 맞은 사람의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때때로 베트남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늘 ‘대상’이었다. 오랜 세월 역사와 문명을 이루고 살아온 인류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들이었다.
-278쪽

‘서구 문명의 이름으로’ 그들의 카메라에 비치는 베트남인들은 한없이 왜소하고 미개해 보였다. 그런데 카메라는 참 미묘한 힘이 있어 이런 필름들을 보노라면 나 역시 미국인의 눈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나 또한 아시아인이고,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는 나라에 살고, 전쟁을 겪은 부모를 두었으면서도 내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에 투사되곤 했다. 카메라에 권력이 있음을 간과하는 순간, 렌즈의 권력은 거침없이 내 의식을 점령한다. 한국 전쟁 때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도 이들의 눈에는 이렇게 비쳤을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미군 장교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자신이 인도차이나에서 느꼈던 인상들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이고 원시적이다. 게다가 모든 것을 더럽힌다. 그들이 없다면 베트남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다."
베트남 사람이 없는 베트남이라. 미국이 꿈꾸었던 베트남 혹은 아시아는 아시아인이 없는 아시아가 아닐까. 문화는 권력이 내재하는 이데올로기다.
-279쪽

권력은 정신과 일상을 교묘하게 조작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고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제도교육과 미디어, 다양한 상징을 통한 지배논리는 개인의 일상을 치밀하게 파고들어와 삶 자체를 그들의 논리로 내재화한다. 은밀한 폭압적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이 논리들을 내면화한다. 무엇이 억압인지를, 무엇이 자발적 복종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일상의 파시즘은 우리 사회의 소수집단들과 제3세계 민중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내 몸 속에 면면히 흐르는 반공 이데올로기, 자기 검열, 체제 순응적 태도, 가부장성, 외국인에 대한 이중 잣대, 무관심....... 내면화되어 정신과 의식을 지배하는 이 일상의 폭력, 일상의 파시즘을 직시하지 않는 한 나 역시 언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일지,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박해하는 데 일조할지 알 수 없다.
-280쪽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인하는 일부의 참전군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군인들이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유태인을 학살했던 나찌의 대원들도,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공수부대원들도 똑같이 말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군인이 되는 순간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사라지고, 명령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까. 실제 전장에서 이들을 움직이는 건 명령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어떤 판단을 할 것인지는 명령이 결정한다. 이 명령에 가치판단을 하거나 거부하는 길은 봉쇄되어 있다. 국가의 결정에 대한 가치판단은 할 수 없는 것인가. 국가의 가치판단과 개인의 가치판단이 다를 경우 국가는 개인의 판단을 억압하고 탄압할 수 있는가.
-281쪽

베트남 파병의 바탕에는 국가주의(국가주의란 국가의 정당성을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이념이다.)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보편적 이해로 등치시켰다.
국가는 "때로 자신의 존립을 위하여 자신의 주민을 학살하고 성폭력을 범하는가 하면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고 주민에 대한 그들의 범죄를 묵인한다. 식량위기, 실업위기로 인한 주민의 안전한 삶이 위협받아도 대규모 군비경쟁을 하느라 국민의 세금을 소비"한다.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과 질문이 봉쇄되어 있는 한, 앞으로도 개인의 몸과 꿈과 상상력은 늘 국가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282쪽

일상의 폭력에 대한 의심과 훈련이 개인의 인권을 지키고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은 내 몸과 의식을 점령하려는 권력과 국가주의와의 싸움이다. 정서의 일부로 만들어진 반공주의와 국가주의가 실제로는 내 영혼의 상상력을 짓누르고, 내 삶의 영역을 축소하고, 내 인식의 한계를 결정짓고, 나 스스로의 해방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항하고 재해석하기.
의도적으로 거슬러 읽기.
다양한 해석을 통해 지배적인 의미를 바꿔놓을 때, 내 몸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리라.
-283쪽

11장. 맺는 글

‘나와 우리’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역 답사를 다녔던 마을들에 한국 정부는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 마을들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는 건 제3세계 원조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뿐이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이 주는 ‘국민기금’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정부차원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정부가 돈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바란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 일을 인정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 일은 인권과 자유와 정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289쪽

(한홍구)베트남과 한국은 아름답게 만날 수도 있었던 나라였다. 두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곁에서 독립과 자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자존심 센 민족이었으며, 똑같이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19세기의 말에 두 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베트남이 우리보다 먼저 식민지가 되었는데, 그 불행한 역사를 기록한 <월남망국사>는 한말 민족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 두 민족은 모두 민족자결주의에 큰 기대를 갖고 대표를 파견했으나 열강들의 무시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 일제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두 민족은 각각 열강의 뜻에 따라 분단되고 말았다. 이렇듯 베트남은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우리와는 너무나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온 나라였다. 그런 베트남의 해방 전쟁에 우리는 군대를 보냈고 30여 년이 지나 민간이 학살의 의혹이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298쪽

아직 삶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어린 청년들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면서,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무얼 하는 곳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라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 젊은이들을 베트남의 정글로 보낸 자가 18년,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군내에서 승승장구한 자들이 정권을 이어받아 12년을 보낸 나라에서 정작 참전 군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든 아무도 괘념하지 않았다. 피부에 반점이 돋고, 이유 없이 아프고, 그리고 자식들마저 픽픽 쓰러져도 그게 고엽제 때문이란 것을 안 것도 미국에서 고엽제가 문제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299쪽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음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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