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의 장교였던 휴인 응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국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게 식민지 경험이 있다. 식민지의 고통을 겪었던 민족이라면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는다. 한번 식민지 경험을 한 민족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하에 있었다. 미국이 한국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한국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분단의 경험이 있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한 한국 민족은 다른 민족의 고통을 알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타민족을 침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죄가 있다면 자주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요구에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102쪽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제3공화국 정부는 당시에 처해 있었던 대내적인 정치 경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파병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정책 결정으로서 제3공화국의 정치적 돌파구였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에 대한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태도는 열광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모자 혹은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식인들은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105쪽
과거에 독립운동가였고, 야당의 정치지도자이기도 했던 박순천은 비행기 위해서 이 풍요와 다산성의 대지를 내려다보고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베트남 땅에 입을 맞추며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감격,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동아일보>에 기고한 적이 있다. 남의 나라에 조국의 들판을 빼앗긴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나라 정치인의 인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시인 모윤숙은 ‘또 다른 전선에서 국군을 본다’라는 시를 써 베트남 파병은 "자유를 잉태하러" 가는 길이니 "죽음도 마다 않고" "잘 싸워라"며 "가도가도 깊어지는 밀림 수렁"으로 젊은이들을 몰아넣는다. -106쪽
미국 내에서도 반전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해 1968년 존슨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온 세계가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반전 시위를 하고 있었을 때도 한국에서 반전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대한 뉴스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여전히 부산항에서는 여학생들이 눈물의 손수건을 흔들었고, 파병 군인들의 용맹성은 과장되어 미디어를 장식했다. 베트남전의 성격 규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진보적 잡지였던 <사상계>에서조차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는 단 한줄도 내지 않았다. 마치 미국 정부의 대변인처럼 언론은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109쪽
위문편지 쓰기 운동과 위문품 보내기 운동에 동참한 일반 시민들이 파병된 군사들이 보내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카메라에 매료되었을지언정 불과 몇 년 전 우리가 겪었던 전쟁을 똑같이 겪고 있는 아시아 민중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정보의 차단 속에서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회피는 대부분의 국민을 전쟁의 공모자로 만들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월터 C 랑거는 "독일의 광기를 만든 사람은 히틀러임과 동시에 독일의 광기가 히틀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박정희가 연인원 32만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방조와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 역할을 못 한 언론과 지식인의 침묵은 정권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박정희와의 암묵적 공조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발전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 말해선 안 된다"라는 논리와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과의 또 하나의 공조체제로 이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110쪽
베트남 전쟁은 위기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정권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서고 암울한 폭압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폭압정치의 실현에는 대다수 국민들의 일조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한 폭압정치의 물적 토대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이성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한 베트남 전쟁이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촉발시켰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10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한진 등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0억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벌어들인 것만 계산할 뿐, 우리가 치러야 했던 대가나, 파병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거둘 수 있었던 경제적 성과를 의미하는 기회비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의 용병이었다는 역사적 오명은 영원할 것이고, 이러한 명분이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고, 인권탄압을 자행하고도 국가의 이름으로 이것을 정당화하는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베트남전에서 벌어들인 10억 달러는 박정희의 독재를 공고화하고 군사 문화를 이 땅에 뿌리 깊이 심는 데 기여한다. 장기집권, 의문사, 고문, 전두환의 집권과 광주학살 등이 베트남전으로 배태되었다고 한다면 그 10억 달러는 이후의 한국현대사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부채가 된 셈이다. -110쪽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 자체의 도덕성과 그 전쟁에서 한국군의 행위가 도덕적이었는가에 상관 없이 베트남 전쟁이 한국에서 ‘반공성전’이 되었던 것은 그 전쟁에 파병했던 권력이 만들어낸 신화였다. 전쟁의 부도덕하고 추악한 이면, 국가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고, 특정 권력 집단의 기억만이 공식적인 기억으로 정착되고 기록되었다.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키고 그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집단은 전쟁에 대한 기억마저 독점하려 하는 것이다. 교육과 문화와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의식은 다시 왜곡된 기억을 재생산한다. -111쪽
6장. 새로운 만남
여람 마을에서 동네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한국인에게 부탁한 것은 위령비다. 이건 비단 여람마을만의 요구가 아니었다. 위령비가 없는 민간인 학살지에서 가장 소망하는 것이 위령비다. 베트남 사람들이 조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못지 않았다. 그들은 집집마다 제단을 차려놓고 매일 향과 꽃과 차를 바쳤다. 제단은 집안의 가장 중앙에 차려져 있고, 살아남은 이들은 아침 저녁 따스한 차를 바치며 그들을 기억했다. 죽은 사람은 잊혀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곳은 응접실 공간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인터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40쪽
위령비가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의 느낌은 좀 달랐다. 위령비는 개인의 죽음이 사회화, 역사화 되는 기점이다. 즉 하나의 사건이 기억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나 밀라이 박물관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취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혀 전쟁 범죄와 그 비극을 널리 알리고, 이 지구상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으로 인한 인권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진 인권 박물관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흔적을 남겨 그 뜻을 기리고 추모함과 더불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곳은 젊은 세대에게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하는 역사,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훈을 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관은 소수의 힘으로 시작해 국가권력에 맞서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41쪽
"한국인인 내가 밉지 않으세요?" "당시의 한국 군인들은 증오하지. 그러나 당신들은 그때 겨우 태어난 사람들인걸. 그런데도 이렇게 우리를 찾아와주니 고마워." 세 번째 답사를 다니며 나는 베트남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정책적 고나점과 승리의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한 짐작을 해보았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라는 현 베트남의 정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증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아량 또한 이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동기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여기엔 사회주의적 도덕성과 베트남인들의 기질 또한 포함될 것이다. -148쪽
푸옌성의 당서기장 응웬 탄 꾸앙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베트남에는 응웬 짜이라는 영웅이 있다. 명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 대파한 장군이었다. 전쟁에 지고 달아나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그는 식량을 내주고 배를 내주었다. 이것은 베트남의 중요한 역사적 전통의 상징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승리를 해왔고 이후에는 화해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화해를 하려는 노력들을 해왔다. 화해를 원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노력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정이다. 우리의 전통이고 역사다. 누군가 우리의 자유, 독립, 행복을 침해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일어서 싸운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건 행복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150쪽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라는 말은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과거를 덮어두자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한국과 베트남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자는 거다. 한국과 베트남 사람 모두가 자유를 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또한 자신들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다. 똑같이 그렇게 원했는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죽였다면 분명 어느 한쪽의 잘못이 있다는 얘기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한국 군대가 다른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참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진실을 찾지 않고는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은 명확하다. 전 세계 모든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과거를 닫는 노력은 양국이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를 닫을 것인가.
-151쪽
푸옌성의 당서기장 응웬 탕 꾸앙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역사를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또한 재산이다. 역사를 떠나 현재의 삶이 존재할 수 없다. 지금 현재의 삶이 미래를 결정하듯이 과거를 떠나 존재하는 삶이란 건 없다. ...... 나는 한국 정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 민족 전체가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 그 잘못은 군대를 파병한 당시 한국 정부에 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한국에서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NGO들의 호라동이 이어지고,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될 때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미국도 노근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한국 정부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급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세대가 원한과 증오와 복수심을 가졌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책임도 우리 세대에게 있다. 여러분들의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이런 노력이 증오와 분노를 지워가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155쪽
시인 이니는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미국인들이 베트남전을 형상화한 글은 아주 흥미롭다. 미국인들이 베트남전에 그렇게 천착하는 것은 결국 그 전쟁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한국군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은 침략을 당했던 베트남 사람들보다 침략을 했던 미군이나 그것을 도왔던 한국인들에게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베트남 사람에게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이 명확했다. 당연히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전쟁이 발생한다면 나는 또 사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를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한국군인이 야만적이고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면 분명 그는 이 행동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전쟁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내가 했던 행위를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함이 전점 더 나를 미궁으로 몰고 갈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인지, 내가 왜 그곳에 갔는지를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전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전쟁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전쟁의 상처를 메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노력에 감동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인간의 가치다. 과거를 직시하고 비판하는 노력은 우리 세대에 있어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사람들은 점점 탈정치화되고 과거에 대해 정직한 시선을 주지 않는다." -157쪽
하노이에서 만난 소설가 바오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전쟁을 치루었고,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절망감은 없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싸우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간이 상처를 덮도록 도와주었다. 잊어버릴 수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몽고와 중국과 프랑스와 미국과 그 오랜 전쟁을 치루며 망각이라는 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전쟁과는 의미가 너무 다른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은 명확하게 미국의 침략에 대한 독립 전쟁이었다. 베트남은 오랜 세월 전쟁을 겪으며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이 되었다. 코소보 내전에 우리가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158쪽
해방 전쟁은 필요했고 많은 피를 흘렸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베트남 성인 남자 17명 중 1명 꼴이 남베트남 땅에서 죽어갔고 공습과 폭격으로 북쪽이 입은 손해는 GNP 17억불이었던 당시에 4억 불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상처 뿐인 승리’였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희생은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남아 새로운 기운으로 작용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스타일대로 일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가 앞으로의 역사의 지평을 열 듯 앞으로의 역사가 과거 역사의 진실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7천 명이 죽었고 4만 명이 투옥된 3.1 운동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그리고 그 운동의 기억이 독립을 향한 두어 세대의 역사를 너끈히 지탱했듯이 인간의 역사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행해온 민족해방운동 과정이 민주적이고 현실적이며 민중적이었다면 그만큼 그 작업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해방 전쟁의 경험이 앞으로의 역사에 중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긴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쁨과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 가려는 새로운 기운이 베트남을 이끌어 갈 것이다. -159쪽
7장.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어머니는 신음하다, 울고, 비명을 지르고, 내 이름을 불렀지요. 런, 런, 아아, 런 어디 있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밤은 왜 그렇게 길고, 어머니는 왜 그토록 오래, 질기게도 내 이름을 불렀는지.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 다음 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신음과 울부짖음은 그대로 내 살에 박혀 내가 되었습니다. 피부를 쓸어내면 거기 어머니의 비명이 묻어나고, 귀를 파면 한웅큼 어머니의 신음이 따라나오지요." 그의 몸을 만져본다. 부드러운 다리 속에 파편이 만져진다. 섬뜩한 이물감이다. 살 속에 파고든 금속덩어리는 녹슬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차갑게 그의 살을 파고든다. 나이가 들며 총탄은 더욱 시리게 그의 몸을 떠다닌다. -165쪽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도 힘이 들었지만 전쟁 후가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숲은 망가지고, 우물은 다시 파야 하고, 수많은 지뢰를 제거해야 하고, 게다가 이런 일을 할 장정들은 다 죽어없어지고. -169쪽
"왜 미국은 베트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탄타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공동의 경험과 개인의 경험이라는 면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전쟁은 모두의 문제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동으로 치유할 수 있었죠. 전쟁으로 인한 슬픔과 비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공동으로 나누어야 할 과제였지요. 그러나 미국의 참전 군인들에게 전쟁은 개인의 문제였습니다. 전쟁의 경험은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되었고, 전쟁에서 받은 상처는 함께 감싸야 할 공동의 고통이 아니라 그 전쟁에 참여한 개인이 혼자 풀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175쪽
"베트남에는 수천 년 저항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전통은 집단 공동의식을 발전시키지요. 그리고 항미 전쟁 당시는 베트남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되고 정착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집단, 집체 시스템이 개인에게 작용해 개인화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집단, 공동의식을 고양시키고 발전시키는 제도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베트남의 어느 가족도 상실이 없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나 혼자 특별히 불행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통과 아픔은 모든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나만 특별하게 불행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대해 사람들은 덜 무겁게 느끼는 법이지요. 그러나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미국 가정이 상실의 경험을 한 건 아닙니다. 참전 군인들은 그 개인들이 불행한 사람들일 뿐이었고, 그들은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176쪽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한국에선 여전히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러 갔던 귀신 잡는 해병대에 경의를 표했고, 아무도 베트남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참전군인은 한 집안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고, 경제발전의 주역이기도 했다. 월남전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이도 없었고,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그와 함께 참전 군인들이 겪어야 했던 혼돈과 갈등 또한 묻혀졌다. -177쪽
한국 전쟁이 분단과 상실과 이산, 기형적 사회구도를 낳았다면 베트남전은 무엇을 낳았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휴전과 통일은 전후의 사회를 재건하는 데 현격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휴전은 끊임없는 군비경쟁을 낳았고, 국가보안법을 낳았고, 최장기 양심수를 낳았고, 색깔론을 낳았다. 군사문화가 사회를 지배했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사이렌이 울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전쟁의 긴장은 많은 사람들을 주눅들게 했으며, 군대에서는 폭력이 난무해도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사회의 원죄는 휴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풀린 것은 아니었죠. 베트남 전쟁은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전의 베트남화로 전략을 바꾼 이후 이 전쟁은 동족끼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었지만 우리에게도 이 전쟁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한 전쟁이었지요."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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