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베트남과 친구되기
김현아 지음 / 책갈피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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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한 개인의 삶에만 파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도덕적 성숙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미국이 만일 최첨단 미사일이나 그린베레의 힘 대신 기억의 힘을 믿었다면 이번 테러에 대해 결코 전쟁이라는 보복 수단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믿는 기억의 힘이란, 오직 존 웨인식 ‘합리적 보복’의 전통에 대한 것뿐이다. 합리적 보복이라니! 그들은 존 웨인의 분노 이전에 거기 무엇이 존재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수의 총을 뽑아들기 전 그곳에 이미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이라든지 창공의 푸른 별, 땅의 체온, 반짝이는 물, 빛나는 솔잎, 해변의 모래톱이 존재했으며, 그 자연과 더불어 산 조상들에 대한 추억과 경험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원주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결코 기억하지 못한다. 이번 전쟁 역시 그런 기억에 대한 전통과 능력이 부재한 미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11쪽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참전군인들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이역만리 월남땅에서 벌어진 전쟁은 마치 동화속 낯선 세상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그것은 전쟁의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 그림책에서나 보던 남십자성과 야자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거기에 돈이 더해졌다. 거기에 다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명분이 보태졌다. 아주 적은 수의, 전후의 폐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당대의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허덕이던 아주 적은 수의 지식인들은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을 시험해 보겠다는 무지막지한 기도를 숨긴 채 미군 수송선 바렛드호에 자청해서 몸을 싣기도 했다. 그렇게 전쟁은 다가왔고, 세월은 흘러 이제 전쟁에 대한 기억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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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아예 자신들의 생의 지평에서 그런 전쟁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에 대한 기억’은 불쾌하다. 처음 한 번은 "아니, 그런 게 있었어요?"하고 호기심으로 귀를 빌려줄 것이고, 두 번째는 "아, 그 이야기?"하며 심드렁해 할 것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전쟁 그 자체가 불쾌하다기보다, 자신들이 간섭할 기회조차 없던 전쟁에 대해 기억 운운하는 것부터가 불쾌할 것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 모두 기억하자고 말한다.
물론 그는 안다. 기억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니, 기억은 많은 경우 오히려 불쾌하다는 것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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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아픔과 상처가 왜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일까. 그건 바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간단하다. 전쟁은 상대방이 있다. 우리의 아픔이 있으면 그들의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간단한 진실의 정체인 것이다. 그것을 배제하고 난 이후의 모든 사유는 결코 올바른 출구를 보장받지 못한다.

타자를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으면 주체도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근대’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 아닐까.
(소설가 김남일)
-21쪽

1장. 상상의 영토, 베트남

내 마음의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나라 베트남.
그러나 때로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과 한 번도 꿈꾸어 보지 않은 그 일이, 사실은 내 오랜 열망의 결과라는 걸 가끔은 인정하게 된다.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그 우연을 만들기 위해 하늘 속으로 돌탑을 쌓아올렸던 건 바로 나였음을.
-28쪽

1998년,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봄이었다. 그전 한해 동안 나는 절멸의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류가 이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류의 절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산한 달이 제 빛을 못 내고 여위어가는 도시, 매연과 소음, 배반과 불신, 죽어나가는 물고기, 파괴되는 숲, 더럽혀진 강, 희망 없는 일상, 썩어가는 정신...... 키를 넘는 욕망들이 눈을 희번득이는 자본의 도시에서 나는 때때로 숨을 쉴 수 없었고 자주 구역질을 했다. 우리에게, 이 오만하고 방자한 종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의 파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감당할 수 없는 이 속력의 끝은 어디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귀같은 탐욕만이 기승을 떠는 이 별에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인류의 절멸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29쪽

아프리카는 겸허와 다양성이 미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미래로 가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 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31쪽

이주노동자 문제나 장애인 문제를 풀어가는 일을 ‘나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답사의 형식을 빌려오기로 했다. 장애인들이 가진 꿈 가운데는 늘 ‘여행’이 있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는 것은 그들이 일생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돈을 벌러 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돈이 드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불법체류자가 대부분이었다. 없는 듯이, 존재를 최대한 감추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존재가 그 존재를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의 문화 역사 전통을 말하기에 그들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33쪽

위안부 할머니들과도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할머니들에게 기억을 꺼내는 것은 고통이다. 그런 밤이면 할머니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지만 할머니들에겐 그 일이 고통이 된다. ‘나와 우리’는 그냥 할머니들과 일년에 두 번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짙어가는 단풍을 보며 이승에서의 한 나절 잠시 즐거우시라고, 그렇게 할머니들을 모시기로 했다.
-34쪽

피스보트는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를 계기로 만들어진 일본의 시민단체다.
-35쪽

신차오-안녕하세요
신로이-미안합니다
까믄-고맙습니다(感恩)
공식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65년이지만, 사실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베트남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이후부터 미국과의 전쟁은 막이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아시아의 한 작은 국가가 식민모국 프랑스를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친 군사적 대승리였으며, 베트남 민중의 저력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테이블에 앉아야 했고, 그 결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제네바 협정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인 고 딘 디엠 정권을 세우고 대리통치를 시작한다. 고 딘 디엠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통한 통일정부라는 제네바 협정의 규정 이행을 거부한다. 약속대로 남북 총선거가 시행될 경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의 승리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38쪽

호치민이 통일베트남의 대통령이 된다면, 베트남의 공산화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것이 바로 미국이 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을 세우고 지원한 논리였다. 이른바 도미노 논리다.
‘도미노 논리’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에 담긴 내용 중 핵심적 요소의 하나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제3세계의 어떤 지역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이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에 대한 환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현실화시켜나갔다.
2차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산업을 부흥시키고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제3세계의 모든 지역을 미국의 잠재적 개입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세계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야망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총선거는 무산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남베트남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져간다. 1955년에서 1963년 기간에 미국은 남베트남 군사 예산의 85%를 원조했으며, 민간부문과 군사부문을 합한 전체 사이공 정부 예산의 2/3를 제공한다.
-39쪽

독재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조직망만 더 넓혀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고 딘 디엠 정권은 붕괴되고, 연이은 수 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거치면서 미국은 직접 개입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그 신호탄이 1964년 8월에 일어났던 통킹만 사건이다.
통킹만 사건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3월 2일 북폭을 함으로써 미국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다.
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무력,힘,군사력,과학, 기술 등 물질만능주의와 민족해방,사회혁명,자주와 독립, 정신주의, 동양적인 토지소유와 관련된 농민들의 의식과의 대결 등 20세기 총체적 모순과 갈등이 뒤엉켜 있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40쪽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공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이 전체적으로 사용했던 6백만 톤보다 1.5배나 많은 약 9백만 톤의 폭탄을 그 좁은 땅에 퍼부어 베트남 전 국토의 초토화에 전력을 쏟아부었다.(미국은 새로 발명된 온갖 신형무기를 그곳에서 사용하였다. 핵무기를 제외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하노이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1,500억불의 전쟁비용을 소모했다. 이것은 1968년 한국의 정부 예산이 10억불 미만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150년분에 해당하는 금액이 된다.)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68년에 정치적 전환점을 맞는다. 1968년 1월 31일의 구정대공세는 대부분의 농촌과 도시를 잠시나마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장악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은 이에 경악한다. 당시 미국의 공식 분석으로 남부 베트남의 공산게릴라는 29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구정대공세는 그들의 수가 50만에서 60만 정도로 추산할만한 숫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정대공세는 공산게릴라가 남베트남의 농민 대중들과 맺고 있는 연대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에 대해 미국민들의 의심이 본격화하는 시점이었다. 미국 내에서의 반전 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유럽에서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1968년 5월 혁명이 그것이다.
-41쪽

미국은 오직 전쟁의 승리에만 집착했을 뿐, 한번도 베트남 사람들의 생명, 인간의 존엄성 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거나 고려한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베트남의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베트남인들의 참혹한 시체 위에 그들이 세우고자 한 자유와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전쟁에 한국군이 파견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부도덕한 전쟁, 인류의 양심에 칼을 긋는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베트남 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파병된 것이다.
-42쪽

1965년 미국은 ‘베트남전의 국제화’를 통해 대베트남 군사 개입의 대외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25개국에 참전을 요청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만 필리핀 타일랜드 영국 한국 등 단지 7개국만이 베트남전에 참전을 하게 된다 .그나마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은 대부분 포병대와 공경대 등 실제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부대를 파견했다. 특히 영국은 거듭되는 미국의 요청에 사이공 탄선넛 공항에 6명의 의장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간신히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6명의 의장대 파견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한국전 당시 미국의 신세를 톡톡히 진 한국이 도저히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나라를 꼽는다면 당연코 영국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조상이 같은 형제국이며, 1차세계 대전은 물론 2차세계대전에서도 나치독일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단말마적인 순간에 영국을 구출해준 것도 미국이며, 전쟁으로 인한 총체적 파탄으로 삼류국가로 전락한 영국을 마샬플랜에 의해 다시 일류국가로 발돋움하도록 도와준 나라도 미국이었다. 이런 영국조차 6명의 의장대를 보내는 것으로 그친 명분 없는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등을 돌린 이 전쟁에 한국은 32만의 병력을 파병한다.
-43쪽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작전을 수행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여간 청룡, 백마, 맹호부대 등 총 31만 2,853명의 따이한이 머나먼 열대의 땅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 중 4,687명은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이 열대의 땅에 부려놓고 원혼으로 돌아갔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전투 이외에도 길을 닦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생필품을 지원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는 등 대민지원 사업에도 공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군 활동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한국 군인들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진실은 무엇일까.
-45쪽

한국과 베트남. 20세기의 중반까지 두 나라의 역사는 아주 비슷하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관계로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으나 끝까지 주권국가로 남았다는 것. 근대에 들어서며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을 때 그들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것,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것처럼 베트남 역시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이후에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 나라 모두 북에는 소위 ‘사회주의’ 정권이, 남에는 자본주의 정권이 들어섰다는 것, 그리고 그 남과 북이 또 한번 전쟁을 치룬 것.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 운명인지.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두 나라는 극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반도가 그 전쟁의 결과 남북으로 분단되어 휴전의 상태로 긴장을 유지하는 반면, 베트남은 그 전쟁에서 통일국가를 세우게 된다.
-46쪽

2장. 다른 기억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원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들을 유격대원이라 부르기도 하고 해방전선대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56쪽

당시 붕따우 마을의 주민수는 50~60명 정도였다. 그 중에 45명이 그날 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증오비는 당시 죽은 45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쩐 반 호아는 유격대원이 된다.

-58쪽

민간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합리적인 이성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는 건 심장을 꺼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를 규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이 원하는 누군가가 되라고 협박하고 고문했다. 내가 누구인지 머리를 쪼개 보여줄 수도 없었고,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나를 나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너는 누구인가.
인간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63쪽

전쟁 중의 일은 전쟁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은 그들의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 중의 기억만을 되살리고 발췌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전후로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야만 전쟁과 전쟁의 기억이 한 인간의 삶과 영혼,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7쪽

한 여자가 자신의 삶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리라.
탕 티 카 내 가난한 자매에게, 지옥같은 삶을 견뎌내고 버티어낸, 봄향기같은 딸을 낳고 그 딸에게는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살고 있는 내 가난한 자매에게 나는 주고 싶다. 내 마음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연대.
-79쪽

3장. 전선 없는 전쟁, 반공주의, 이미지의 공포

해방공간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아니 ‘죽여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었고, 베트남전 역시 이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빨갱이라는 근거불명의 막연한 의심만으로도 사람들은 죽어갔고, 이미 월북했거나 피신해버린 사람들 대신에 그 가족이나 친지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역시 베트콩으로 의심되거나 그 마을에 베트콩이 있을 거라는 의심 하에 온 마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온 몸을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현대사의 체험과 기억은 우리의 의식에 기형적인 반공주의를 각인했고, 반공의 이름으로라면 아이도 여자도 죽일 수 있었던 문화와 논리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94쪽

우리는 흔히 학살이란 말의 무게 때문에 학살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모든 병사들이 각종 선진적인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현대전에서 학살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학살에는 분명히 정치적 목적이 들어있음도 또한 명심해야 한다.(한홍구,<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

한 발의 총성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되어 진행된다. 계급적, 정치적, 경제적 손익계산과 분석을 마친 후 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집단이 발포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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