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앞에 나가기 싫어! 난 책읽기가 좋아
다니엘 포세트 글, 베로니크 보아리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목요일. 아이는 목요일만 되면 배가 아프다. 엄마는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초콜릿 때문에 '목요일'에만 배가 아플 리는 없다.  

아빠는 아이가 게을러서 학교 가기 싫은 핑계를 대는 거라고 생각하신다. 아이는 물론 씩씩해지고 싶지만 자신의 배는 전혀 씩씩하지가 않다.  

부모님들은 짐작으로 무얼 알아내셨을 때 기분이 우쭐해지시는 듯하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아이가 왜 배가 아프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으신다. 당신들의 짐작이 사실일 거라고 확신만 하실 뿐. 



아이가 목요일마다 배가 아팠던 것은, 목요일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 하나를 지목해서 칠판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게 하시기 때문이다. 아이는 칠판 앞이 너무 무섭다. 겁이 나면 숫자도 제대로 안 세어진다. 창피해서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알게 되면 모두들 아이를 놀리고 말 테니까. 선생님께도 말씀드릴 수가 없다. 선생님은 구구단도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냐고 그러실 것이다.  

게다가 여자 친구 폴린느가 칠판 앞에 나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다 외우던 것을 떠올리면 자신이 더 바보스럽기만 하고 그래서 배가 더 아파진다. 




선생님의 시선이 아이들을 한 번씩 훑을 때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아마 호흡도 가빠질 것이고 어쩌면 정신이 혼미해진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저 심정이, 이해가 간다.  

대학 때 영어 회화 시간에 원어민 교수님이 들어오시면 뭐라뭐라 말씀을 하시고 이것저것 시키시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나빼고 다른 아이들은 다 척척 알아듣고 뭔가를 하는데, 난 알아듣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뭔가를 하지도 못하고 수업 시간에는 영어만 쓰도록 되어 있는데 물어보기도 힘들고,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그때 생겼던 증상이 바로 '치통'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가 막 아파오더니, 강의가 모두 끝나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진다. 아, 이런 게 바로 신경성 증상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결국 영어과에서 못 버티고 전과를 감행했던 쓰라린 기억이 나는구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자기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내 자리는 맨 뒷자리였는데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잘 안 보인다고 얘기했는데 엄마는 언니들 쓰는 안경이 부러워서 내가 눈이 나쁜 척한다고 생각하셨다. 당시 내 시력은 1.0에서 1년 만에 0.3으로 뚝 떨어졌는데,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을 주르륵 불러서 차례대로 뒷줄까지 답을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때 '확률'에 관한 문제였는데 난 보이질 않아서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하지 못했고 질문과 답을 다 모르겠는 것이다. 내 앞줄까지 모두 정답을 말했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칠판이 안 보여요.'라고 작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논스톱으로 모두 정답을 말해서 무척 신나 하셨는데 산통이 깨져서 아쉬워하시는 듯했다. 사실 나도 아쉬웠다.ㅠ.ㅠ 

그때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유독 수학에서 확률 부분이 약했다. 연합고사 볼 때도 확률 문제만 하나 틀렸다. 이렇게 칠판 앞에 나서기 무서워하는, 그 때문에 저토록 머리 속이 어지러워지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대처나 반응이 몹시 중요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이 책은 여기서 끝나나 싶었는데 더 중요한 얘기가 나온다. 일종의 반전이랄까.  

선생님이 연수를 받으러 가셔야 해서 다른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이분의 표정이 이렇다. 



귀까지 얼굴이 빨개져 버린 선생님, 손수건을 돌돌 말고 계시는 선생님.  

새로 오신 선생님도 당황하고 계신 것이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는, 22명의 아이들이 44개의 눈을 들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에 어찌할 줄 몰라하시는 저 모습! 그건 바로 칠판 앞에 나가 있을 때, 또 그걸 상상하며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어쩌면 선생님도 배가 아프실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이는 큰 공감과 함께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았다. 선생님이 자그마한목소리로,  

"자, 누구 칠판 앞에 나와 보겠어요?" 

라고 물었을 때 손을 번쩍! 들고 칠판 앞에 척척 나가는 쾌거까지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은 구구단을 모조리 다 외워버렸다는 기막힌 이야기... ^^ 

선생님이 하려던 질문은 원래 그게 아니었지만, 이 아이 덕분에 한바탕 웃고 긴장도 확 풀고, 더 편한 마음으로 수업을 하게 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역시, 이제 목요일 배아픈 병은 깔끔하게 나았을 것이다. 자신은 이제 칠판 앞에서 벌벌 떠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냈으니 말이다.  

초등 저학년용 책인데, 특히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실제로 그 나이 또래 학생 권장 도서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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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4-1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은 항상 날짜에 따라 학생들을 칠판 앞으로 부르셨지요. 오늘이 17일이니까 7,17,27...이런식으로 하셨는데... 7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우거지상이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밝은 얼굴표정들이었지요.^^ 특히 저는 칠판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주눅이 들어 다 까먹곤 했답니다.^^
특히 수학은 죽어라고 싫어했고요.~ㅎㅎㅎ

마노아 2009-04-17 11:00   좋아요 0 | URL
번호 폭격! 우리 모두 경험이 있지요. ^^ㅎㅎㅎ 중학교 때는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는 진도 나가기 바빠서 그렇게 앞으로 나와서 문제 풀이 시키는 선생님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영어샘이 각자 교과서에 풀어보라고 시간을 주셨는데 모르겠는 부분만 손가락으로 가리고 있었더니 다가오셔서 제 손을 툭 튕겨버리시더라구요. 엄청 민망했어요. 제 속내가 다 보였나봐요.^^ㅋㅋㅋ

잎싹 2009-04-2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사진리뷰로 보니 더욱 괜찮은 책 같네요.
울 아이도 무척 좋아하던데...추천하고 가요.

마노아 2009-04-23 00:0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표지만 볼 때랑 실물 볼 때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역시 실물을 봐야 느낌이 제대로 살지요. 추천 감사함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