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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벌판
응웬옥뜨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베트남에 대한 자료를 찾을 때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그 다음은 '베트남어'.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베트남 사람들의 '삶'이었다. 잠시 여행 가서 들여다보는 것 말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문학을 찾아보았고, 그때 이 책을 알게 되었다. 200쪽도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이 소설, 베트남을 '응웬옥뜨' 열풍으로 가득 채웠다는 찬사가 잔뜩 담겨 있다. 뚜껑은 열어보아야 알지,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이 소설. 흔히 얘기하는 뚜렷한 기승전결의 구도도 아닌, 시점조차도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왔다 갔다 하는, 소설인데 시 같고, 시인데 산문같기도 한 이 소설은, 갖고 있는 많은 장점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마음'을 울린다는 점에서 쏟아지던 찬사가 과장이 아님을 인정하게 했다. 이 소설, 참 아프다.
메콩 강을 둥둥 떠가는 거룻배.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에 불과한 이 작은 배에 아버지와, 이제 18세 된 누이와, 17세 된 남동생이 함께 타고 있다. 이들은 오리를 키우며 강가를 떠돌지만 쌀 한톨도 구하기 힘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오리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가난은 이들의 것만이 아닌, 그곳 메콩 강가에 사는 모든 이들의 체험이고 삶이고 운명이었다. 그 '가난'이 이 작품에 깔려 있는 배경이자 사건들의 이유, 그네들 슬픔의 원천이었다.
어느 나라인들 가난하지 않은 국민이 있겠냐마는, 그곳 가난한 처녀들이 우리나라 시골 노총각들에게 시집 와 기구하게 사는 이야기들을 지금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우리는, 그네들의 처연한 삶이 남일 같지 않다. 더군다나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비극을 함께 겪었던 비슷한 역사를 가진 공통성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작품은 거의 대부분 누나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아홉살 때부터 눈물이 멎지 않는 병에 걸렸다. 아이가 눈물이 멎지 않게 된 건 어떤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었다. 옷감 장수가 마을에 들어왔고, 엄마는 유난히 화려하고 반짝거리던 옷을 맘에 들어했고, 그 옷 한 벌의 대가로 아버지가 없는 사이 옷장수와 몸을 섞었다. 아이들이 집을 비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집에 있었고, 현장을 목격한다. 그때부터, 남동생은 눈물이 멎지 않는 아이가 되었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 밝히자 엄마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후로 아버지는 돌변한다. 마치 '여자'라는 종족에게 원한이 서린 것처럼 무수히 많은 여자들을 옆자리에 앉혔고, 아무렇지 않게 버렸고, 그들에게 상처와 모욕을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십 년 가까이 보고서 성장한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상처를 끌어안느라 온통 만신창이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집을 나간 엄마뿐 아니라 그 비슷한 많은 여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누구에게도(심지어 이 무정한 아버지에게조차도) 윤리적인 비난을 던지지 않는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두려움과 연민이 공존하지만 그것을 원한으로, 원망으로, 저주로 바꾸지 않는다. 슬픔을 분노로 바꾸는 방법 따위도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유혹해서 꼬드긴 그 여자들도 가정이 있었고, 자식이 있었다. 그 모든 걸 다 내던지고 따라오던 여자들을 버리고, 욕하고, 모욕주고, 상처를 주어서 내치는 아버지 역시 가슴 속에 깊은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되물림이 된다. 아이들은 몸은 자라지만 내적인 성숙을 함께 갖추지 못했고,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청하는 방법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그 무심한 아버지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아버지로 인해 또 다시 내쳐진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아들이 그 여자를 찾아 떠나면서부터였다. 딸과 단 둘뿐이라는 것. 그 딸도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이 아버지에게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저 가난한 삶에, 남편과 자식을 버리는 어미, 아비만 나오겠는가. 저 가난하고 신산한 삶 속에서 배우지 못하고 일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들은 얼마나 고약하게 망가질 것인가. 그런 환경에서 예쁘기만 하고 나약한 이 처녀가 자신을 지킬 방법이라는 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비참한 결과가 무수히 따라나오는 순간이다.
겁탈의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고, 자신 안에 들어선 물컹한 무언가가 아기로 변하게 될까 봐 처녀 아이는 눈물을 떨군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 아이가 상상하는 앞날이란 독자를 당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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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내가 아이를 낳을 수도 있어. 비록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녀석에게는 고난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그래, 아이 이름은 반드시 뜨엉이나 녀, 또는 지우, 혹은 쑤엔, 흐엉......으로 지어야지. 아빠 없는 아이지만 반드시 학교를 다니게 할 거야. 아이가 한평생 즐겁고 생기발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줘야지. 엄마의 가르침으로, 때때로 어른들의 잘못도 용서할 줄 아는, 속 깊은 아이로 키워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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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독한 현실 앞에서 눈물 떨구며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다음 순간을 준비한다. '고난'이 몸에 익어서 습관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용기와 희망을 배웠는지 태어날(만약 태어난다면!) 아이에게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 어떤 지독한 가난도, 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파괴할 수 없을 듯한 모성을, 생명력을 이미 지닌 채로 말이다.
이 정도의 각오가 그네들의 참혹한 현실을 버티게 해 줄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애잔한 삶에 조용한 응원을 보내게 되는 미소를 짓게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끝없는 벌판'에도 어김 없이 다가올 인생의 어떤 따뜻한 순간을 상상해 보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베트남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정부 당국은 희망의 전형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미풍양속을 헤쳤다고, 작가의 도덕, 정신적 교육을 운운하기까지 했다. 이 책이 그곳에서 최고의 작품상을 받으면서 그런 움직임들은 죽어버렸지만, 작품이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재를 받고 검열을 받는 그 현실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를 언뜻 떠올리게 하는 구조, 그러나 그보다 더 담담하고 보다 가슴을 저미는 구석이 있다. 한 소녀의 성장기, 혹은 보편적으로 가난한 어느 민중의 처연한 삶의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내가 만난 첫번째 베트남 문학, 반갑고 아프다.
덧글)번역이 정말 훌륭하다. 메콩 강가의 그 방언을 옮길 수 없기에 표준어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올곧이 옮겨왔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