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일지매 전8권 세트 (MBC ‘돌아온 일지매’ 드라마 원작)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90년대 초에 장동건이 주연했던 드라마 일지매. 허리춤에 숨기던 수리검이 인상적이었다. (그거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은 게 없다.) 

작년 여름 쯤 방영했던 이준기 주연의 '일지매'는 몹시 재밌었다. 고우영 원작의 일지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는데, 원작 없이 갔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훌륭했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영웅과는 다른 민중적 영웅이랄까. 평범한 사람들 모두 위에 군림하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의 영웅이 아니라, 그들이 지켜주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모두의 영웅이 탄생한 것에 난 열광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지금 방영 중인 '돌아온 일지매'의 바이블인 셈인데, 드라마는 1편 보고서 재미가 없어서 끊었고, 만화 원작을 주섬주섬 챙겨 읽었다.  초반엔 좀 심드렁했는데, 확실히 고우영 화백의 내공이 있는지라 뒤로 갈수록 재미가 커진다.  

고관 대작의 첩실 아들로 태어났다가 버림 받은 아이. 그 아이를 한 걸인이 줏어다 키우고, 같이 아이를 봐주던 스님이 아이를 청나라의 어느 고관대작 집에 양자로 보내버린다. 청나라에서 청나라 사람으로 자라면서 쿵푸를 배운 이 아이가 어쩌다 보니 조선 땅에 돌아와 친 부모를 찾는데, 그 과정에서 쓰디 쓴 인생의 고배를 너무나 여러 차례 마시게 된다. 키워준 양아버지는 배신감에 아이를 죽이라고 자객을 보냈고, 친부는 나는 너를 모른다고 아이를 내쳤고, 제 목숨을 구해준 심마니 부녀는 역모죄에 휘말려 눈앞에서 참수를 당한다. 인생사 쓴맛에 이미 질려버린 아이는 키워준 거지 아버지 걸치를 찾아가지만, 그곳 남쪽 섬에서도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리니, 이름하여 여난이라 하겠다. 



그 자신, 필요하다면 기생으로 변장하여 정보를 빼내기도 할 만큼 미모가 출중한 일지매. 그 잘난 얼굴 덕에 여자들이 끊임없이 꼬이고, 치정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고, 여러 여자 신세를 망치게 된다.  

이 작품이 연재된 것이 1975년도이고, 또 스포츠 신문이다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가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슬픈 영웅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일지매가 제 어미마저 죽고 나서는 사람이 변한다. 처음에는 말 그래도 '의적'이었지만 살상을 하지 않는 순수 청년이었는데, 이젠 눈에 살기가 번뜩인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나쁜 탐관오리들을 향해 가차없이 칼을 내리치는데, 그러면서도 나라 향한, 임금 향한 충심은 어찌나 절절하던지 불편해서 혼났다. 

검열의 시대였던지라, 만약 임금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을 굶기고 울리고 핍박하는 자라면 용서 못한다!라고 했다면 당장 연재 중단되지 않았을까? 뭐,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현실이긴 하다.(ㅡ.ㅡ;;;) 

작품 속 임금이 '인조'인 까닭에, 일지매의 일편단심 충성은 굉장히 짜증이 난다. 인조가 어떤 임금인가. 제 자식까지 죽여버린 표독한 임금뿐 아니라, 외교도 깽판 놓아서 전쟁을 두 차례나 일으킨 화상이 아니던가.  

작품은 말미에 일지매가 청나라 황제를 만나서 담판지으러 가는 길에서 끝이 난다. 연재가 중단이 된 건지, 복원이 덜 된 건지 생뚱맞은 결말이었다. 작품에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그냥 그렇게 끝을 냈던 게 맞나 보다.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다소 답답한 마무리였다.  

그런데, 읽으면서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속도 상하고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뒷편으로 넘어가고, 뒷내용이 궁금하고, 일지매를 응원하게 된다. 그 기구한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 (더불어 무수한 여인네들의 운명도 안타까워하면서.) 

연재 당시 단행본 원고는 3줄 편집을 모조리 4줄로 바꿔야 했고, 평양 사투리가 모두 표준말로 고쳐지는 둥 칼질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냉전 시대였던지라 북한 말이 못 나오게 막은 것은 알아듣겠는데, 4줄 편집을 왜 고집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랏님이 위에서 백성들을 찍어누른다고 생각한다면, 백성들은 응당 일지매 같은 '의적'의 출현을 기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절이 하수상할 수록 이런 이야기가 더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일지매 같은 영웅 한 사람을 기대기 보다, 이 사회의 기본 토대가 건강하여서, '법'으로 국민들이 지켜질 수 있는, 약자가 보호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더 소망한다. 매화 한 가지를 표식으로 남겨두는 이 매력적인 사내는 그저 상상의 영역에 남겨둘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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