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을 묶으며 사계절 그림책
테드 랜드 그림, 빌 마틴 주니어 외 글, 김장성 옮김 / 사계절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언니가 강추라며 적극 밀어준 책이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럴까, 잔뜩 기대를 품고 책을 펴들었다. 기대가 커서 실망이 커지면 안 되는데,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내게 만족과 감동을 주었다. 어느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자.



또 얘기해 주세요, 할아버지.
제가 어떤 아이인지. 

                여러 번 했잖니, 아가야.
                너도 다 외웠겠다. 

그래도 할아버지 얘길 듣는 게 좋아요. 

                그럼 잘 들어라.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뇨. 싫어요, 할아버지.
마지막이란 건 없어요.
약속해요,
저하고 약속해요. 

                약속 같은 건 안 한다.
                할애비는 널 사랑해.
                그게 약속보다 훨씬 낫지. 

저도 할아버질 사랑해요.
그러니까 또 얘기해 주세요,
제발요. 

첫장의 대사를 부러 모두 옮겨 보았다. 번역이 얼마나 매끄럽고 맛깔스럽고 또 잔잔한지 전해주고 싶어서.  

이 책은 내용도 훌륭하지만 번역이 정말로 기가 막히다. 외국 책이 아니라 한국 책을 읽는 것 같은 언어의 자연스러움과 만족감을 주고 있다.  

그림도 살펴 보자. 그믐 달이 떠 있는 어느 깊은 밤, 모닥불을 피워놓은 할아버지와 손자. 듣고 또 들어서 이미 다 알고 있고 외우기까지 한 이야기를 소년은 다시 또 청하고 있다. '마지막'이란 단어를 거부하는 손자. '약속'보다 '사랑'이 더 앞선다고 말해주는 할아버지. 그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전달해주는 소년이 이 땅에 태어난 얘기를 같이 들어보자.



소년이 태어나던 날은 거친 바람이 온통 불어닥치던 까만 밤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끈을 갖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디마디 매듭이 묶여 있다. 매듭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이가  태어날 즈음 할아버지는 골짜기를 말을 달려 할머니를 모셔온다. 할머니의 축복이 없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급 제동 거는 말발굽의 거친 파열음이 들리는 듯하다. 빛과 어둠을 제대로 사용한 그림 작가에게 경의를!



아이는 약하게 태어났다. 눈도 뜨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안고서 밖으로 나오자 커다랗고 푸른 말 두 마리가 달려왔다. 그리고는 아가를 내려다 보았다. 그 말들은 아가의 형제가 되어준다. 푸른 말들이 아기에게 살아갈 힘을 준 것이다. 

여기서 아가의 이름이 정해진다. '푸른 말의 힘' 이것이 바로 아가의 이름이다. 굳세고 튼튼한 이름. 아가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아이는 성장하고 어둠의 산을 헤쳐나가는 걸 배운다.  

명 문장을 좀 더 옮겨보겠다. 

전 벌써 어둠의 산을 여러 개 헤쳐 지나왔어요. 

                    더 많은 산이 있단다, 아가야.
                    어둠의 산은 늘 우리 둘레에 있으니까.
                    산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낄 때 
그것들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 아가야.
                     운명 앞에서 우리가 두려울 때
                     어둠의 산은 그 앞에 서 있지. 

전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하나요? 

                     그렇단다. 너는 눈앞에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태어났지.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보는 방법은 많이 있어요. 

                      그렇고 말고.
                      넌 어둠을 뚫고 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
                      넌 할 수 있단다.
                      너에겐 푸른 말의 힘이 있으니까.



아이는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오감으로 모든 것을 느끼고 만지고, 그려고 그려냈다. 아이의 얼굴에 드러난 환희의 표정. 푸른 색이 어떤 색인지 설명하는 할아버지의 표현을 들어보자.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감탄도 떠올려 보자. 이렇다. 

                      아가야, 넌 아침을 알고 있지? 

네, 전 아침을 느껴요.
아침은 밤의 장막을 걷어 내어요. 

                      넌 동이 트는 것도 알고 있어. 

그래요. 전 새들의 노랫소리로
동이 트는 걸 들어요. 

                      하늘 또한 알고 있지? 

네, 하늘은 제 얼굴을 어루만져요.
양털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전 그 부드러움을 들이마시죠. 

                      푸른색이란 그 모든 것이란다.
                      푸른색은 봄날의 시작과 같은 느낌이지.
                      해 보렴...... 보도록 해 보렴, 아가야. 

푸른색? 푸름?
푸름은 아침...... 동터오름......
하늘...... 새들의 노래......
아! 보여요!
푸른색! 푸른색!
푸른색은 기쁨이에요.
느낄 수 있어요......
내 마음 속에서! 

푸른색은 기쁨이라고 한다. 아이의 저 표현은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하다! 할아버지가 푸른 색으로 인도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멋지고 완벽한가. 저런 사람들에게는 앞을 못 보는 것이 결코 재앙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인디언의 문화와 그네들의 이야기는 낯선 문화를 가진 우리들로서는 늘 신비롭고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또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명을 초월한 어떤 영적인 울림 같은 것! 

푸른 말의 힘이란 이름을 가진 이 소년. 푸른 말과의 각별한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그 푸른 말이 새끼를 낳은 것. 새끼의 이름도 소년 못지 않게 훌륭하다. 바로, '무지개' 

무지개 뜨는 날 태어난 이 망아지는 소년의 눈이 되어준다. 이 망아지를 타고서 소년은 거침 없이 달리고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또한 자유로웠다.



'부족의 날' 열린 아이들 말 경주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은 안장도 걸치지 않은 채 말 갈퀴를 잡고서 열심히 달린다. 푸른 말의 힘이 아이의 온 몸에서 뿜어지는 것을 온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면서.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아이는 완주했다. 그리고 웃었다.  

어둠을 뚫고서 아이는 경주로의 모든 굽이를 볼 수 있었다. 무지개를 통해 느낀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어둠의 산'을 가로질렀다.  할아버지의 축복의 인사를 옮겨보자. 

"넌 어둠과 경주해서 이겼다.
이제 넌 네 마음으로 볼 수 있단다.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단다.
네 용기가 네 앞길을 비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할아버지는 끈에 매듭을 하나 추가하셨다. 저 끈에 새겨진 매듭이 바로 이야기의 숫자다. 끈이 매듭으로 가득 차면 아이의 마음 속에 이야기가 가득 찰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아이의 마음에 새겨져 아이를 더 강하게, 굳세게, 용기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할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을 담아, 아이가 무지개와 함께 보낸 시간과 함께.  

언젠가 할아버지는 아이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때에도 저 매듭은 남아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추억이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셀 수도 없는 놀라운 가치와 함께. 또한 사랑을 담아.......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가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면서, 그 아이가 성장해 가는 통과의례를 또한 보여주면서, 할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전해주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멋진 번역가를 알게 된 것도 몹시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 책은 언니네 책이니 내 책으로 하나 더 주문해야겠다. 또 다시 두근거린다. 이 멋진 만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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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2-1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언니네 책으로 보셨으면 지름신 부르지 마셔용~ㅎㅎ
이것도 보관함에 담고 차일피일 하다가 날려버린 중고도서였어요.^^
마노아샘 언니가 사갔나 봐~~~ㅋㅋㅋ

마노아 2009-02-19 01:40   좋아요 0 | URL
노려보다가 놓친 작품은 모두 울 언니를 의심해 보아용~ ^^ㅎㅎ
(울 언니는 저를 의심한답니다..;;;)

니나 2009-02-20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교회 어린이 도서관에서 읽어줬는데 너무 너무 좋더라고요. 차마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조아했드라는 말은 못할 뿐이고 ^-^

마노아 2009-02-20 13:04   좋아요 0 | URL
어른들도 동화에 흠뻑 빠질 뿐이고~
저 어제 데스 노트에 관한 얘길 쓰다가 '니아'를 '니나'라고 쓰고서 한참 머리를 갸웃거렸어요. 뒤늦게 깨닫고는 수정했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