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5
시미즈 레이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귀야행의 작가 이마 이치코는, 본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맛보기로 의미심장한 컷과 대사를 꼭 초반에 보여준다. 그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으나, 본편의 이야기가 다 끝난 뒤 다시 되돌아가서 살펴보면 그 숨겨져 있던 의미와 은유가 드러나면서 작품을 더 맛깔나게 만든다. 그런 연출 기법은 그의 전매 특허는 아니지만 자주 쓰기 때문에 연상되어버렸다. 이 작품,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에서도 그런 기법이 연출되었다.  

누군가 시체를 파묻고 있다. 그는 절규하고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그 시체는 누구의 짓이었을까. 파묻고 있던 그가 죽인 것일까. 그들의 관계는? 

시간은 이제 점프한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어한다. 60년 전 그가 유괴해서 죽여 파묻었던 아이가 묻힌 위치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체가 발견되는데 밀랍처럼 변한 시랍화 사체. 그 사체를 두고 법의 제9 연구소가 투입된다. 

재밌는 것은, 노인이 말한 장소에서 발견된 어른 사체는 노인이 죽인 어린 아이 사체가 아니었다. 노인이 죽인 아이는 60전 전에 죽었고 이미 공소시효도 끝났지만, 같은 자리에서 발견된 남자 어른 시체는 20~25년 전 사체로 추정되며 시효가 만료되지도 않았다. 검시관 유키코는 이 사건을 파헤치길 원하지만 언제나 냉철한 마키 경감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어쨌든 그녀의 고집대로 사체의 뇌를 스캔하는 작업이 진행되는데...... 

매번 그랬지만 마키 경감의 안목은 놀랍기 그지 없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사체에 얽혀 있을 여러 전황들을 파악해낸다. 마치 의뢰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어떤 길로 어떤 과정을 거져서 어떻게 왔는지를 한 눈에 파악해 내는 홈즈처럼.  

매력적이고 뛰어난 검시관인 유키코가 이번 이야기에선 마키에게 제대로 한 방 먹는다. 아니, 그녀 자신의 덫에 스스로 걸렸다고 보아도 좋겠다. 감정이 앞서면 안 되는 그들 직업군의 세계에선 더 그러하다는 뼈아픈 교훈을 새긴 채. 

책의 맨 뒤에는 에필로그가 하나 실렸는데, 한 인상하는 오카베의 눈물 섞인 외침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MRI 수사가 없으면 죄를 억제하지 못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라고. 이건 문화도 과학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마치 짐승들만 사는 세상에서나 필요한 수단이라고. 어째서 가족 안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고! 

기술이 더욱 발달해질 게 분명한 미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지만, 실상은 이미 많은 기술이 발달한 지금 시점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대목이다. 우리는 점점 더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소통하려 들지 않고 점점 더 가혹하고 무지한 법률로 범죄를 억죄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정작 범죄 환경이 잉태하지 않게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사이버 모욕죄니 짚시법이니, 갖잖은 법률들이 우르르 떠오른다.  

책의 잔상이 강해서, 주제 의식이, 충격적인 결말들이 마음을 요동치게 해서 읽은 지 한달이 지나서야 리뷰를 쓰게 되었다. 언제나 충격과 감동과 메시지를 함께 주는 시미즈 레이코, 이런 작가들이 맘껏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많이 부럽다. 이 나라는..... 원....ㅠ.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09-01-2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그냥 만화가 아니고, 잘짜인 드라마를 보는 거 같아요.

마노아 2009-01-24 22:40   좋아요 0 | URL
영화로 만들면 대박날 것 같은 소재인데 어째 잠잠해요. 이상하여라...

BRINY 2009-01-25 09:57   좋아요 0 | URL
영화로 잘못 만들면 욕 엄청 먹을 거 같아요 ㅎㅎ 누가 마키역을 잘 해낼까요?

마노아 2009-01-25 10:37   좋아요 0 | URL
그렇게 작고 어려보이는데, 게다가 아름답고 또 명석하기까지 한 수사관이라... 역시 쉽게 찾긴 어렵겠네요. 설정을 좀 바꿔야 할지도...^^;;;;

2009-02-04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만화로만 있는게 더 좋을 듯.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에 훨씬 못 미쳐버릴겁니다. 그럼 실망할테니, 이대로가 더 좋다는. 잘 읽고 갑니다!

마노아 2009-02-04 20:54   좋아요 0 | URL
원소스로만 남기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작에 못 미치는 2차 리메이크는 참 많기는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