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구판절판


"하지만 용정으로 나가 살아가면서 차츰 나라가 없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됐소. 태어난 나라가 없으니 우리에게는 당도 없소. 나라도 없고 당도 없는 자에게는 민족도 없는 것이오. 중공당에 가입한 뒤부터 나는 내 혈관에는 국제주의의 피만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국제당만이 우리의 당이고 나라고 정부요. 내가 알기로 지금 간도 땅에서 진정으로 항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중에 국제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일본놈들만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증오하오. 지난 시기, 그들은 가짜 정부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참된 애국자들을 학살했소. 그런 내가 민생간 감투를 쓰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소."-231쪽

"사람을 죽이고 나면 얼마간은 미쳐 있게 마련이오. 다시는 누군가를 죽이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오. 물론 그것도 진실이오. 하지만 나는 톨스토이를 버렸소. 설득과 타협으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이상 세계를 만들겠다는 중학 시절의 드높았던 포부를 버렸소. 가족과 애인과 개인적 미래를 다 버렸소. 그 대가로 나는 진실에 눈뜨게 됐소. 진실이란 전혀 아름답지 않지. 그런 추한 것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진실을 보게 된다오. 그리하여 이 세계가 너무나 잔혹한 곳이라는 것을, 그 잔혹함마저도 기실은 진실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나 역시 잔혹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받아들이게 됐소. 그러고 나면 두 눈으로는 한 인간을 성장하게 만드는 모순과 투쟁만이 가득한 세계가 보이게 된다오. 물론 그런 것 따위는 몰라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소. -235쪽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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