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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조각들 - 타블로 소설집
타블로 지음 / 달 / 2008년 10월
평점 :
우리나라에선 학벌이 좋으면 일단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나도 뭐 그닥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연예인이라면 더 신기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면에서 타블로는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한 인물이었다. 두드러지는 그 학벌에서 기대되는 어떤 특성이나 이미지와 달리 타블로는 어리버리한 컨셉이었고, 그게 꾸민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녹아 있었다. 라디오 진행하는 것을 들어보거나 토크쇼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렇게 번번이 나를 즐겁게 놀래키던 타블로가 이번에 제대로 큰 기쁨을 주었다. 몇 달 전에는 그의 가족(형이었던가?)이 책을 냈었는데, 이번엔 타블로 자신이 단편 소설집을 낸 것이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의 기간 동안 영어로 썼던 글들을 다시 타블로 자신이 한글로 번역했다. 그 바람에 번역투의 문장이 가끔 나오긴 한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고 매끄러웠지만 영어 문장 원본은 아마도 더 훌륭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다소 아쉽지만 그랬다면 나와 만나지 못했을 테니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1998년이라면 타블로가 아직 십대일 때였는데, 그때 이미 이렇게 솜씨 좋게 글을 썼다고 하니 역시 타고난 재주꾼이란 생각이 든다.
초반 글에는 좀 허무한 느낌이 가득했다. 모든 소설에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무사항은 없지만 읽고 나서 에? 끝이야? 이런 식의 반응은 독자로서 섭섭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런데 읽다 보니 자꾸 마력이 생긴다. 미용실에서 잠깐의 대기 시간에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집에 돌아와 내내 읽게 만들었으니.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여러 상황이, 여러 사건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이뤄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거대 도시 뉴욕일 수도 있고, 그저 '뉴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도시일 수도 있다.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이 작품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허허롭다. 그 허허로움을 달래느라 담배를 피기도 하고 대마를 피기도 하며 술, 섹스에 탐닉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재함과 부조리함을 거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제목 아래 하나의 주제,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만약 장편 소설을 쓴다면 어떤 에너지를 보여줄 것인가 사뭇 기대가 된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여러 번 겹쳤는데, 그들은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면서 또 전혀 다른 사람의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이 역시 작가가 안배해 놓은 재미난 트릭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타블로는 책 머리에 고인이 된 친구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단편 중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내용에 베트남인이 인종차별로 무참히 살해당한 장면이 나온지라 혹 어떤 관련이 있을까 괜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방송에서의 타블로는 엉뚱한 면이 많아 소위 4차원 인물로 통하기도 하는데, 그의 그 엉뚱한 발언들은 묘하게도 진지함이 있었다. 개구쟁이 소년 같지만 그 내면엔 어른의 침착함과 책임감 같은 것들이 비치기도 한다. 이렇게 탄탄하고 성숙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니 분명할 거라고 나는 또 혼자 강력히 주장해 본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수작이었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쥐'와 '최후의 일격'이다. 일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떠올리게 하는 '쥐'는 점증하는 긴장감으로 인해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준 작품이다. 단편 영화의 소재로도 아주 훌륭할 듯 싶다. 모처럼 등장인물이 많았던 '최후의 일격'은 '용기'와 '겁쟁이'라는 단어를 교차해서 사용함으로써 그 대조적인 성격들이 충돌할 때의 파워와 긴장감이 제법 거셌다. 게다가 결말의 그 부분도 강렬한 인상이 이미지처럼 남아 있다.
이 작품집의 제목은 '당신의 조각들'이다. 타블로라는 한 개인-연예인이기도 하고 소설가이기도 한 아티스트이면서 자연인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인생의 경험과 추억과 상상력 등등, 그 모든 것들의 작은 조각조각들이 하나하나 박히어 한 권의 책으로 독자에게 안긴 느낌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독자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키는 우리 안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근간에 나오는 소설 책 중에는 값이 좀 센 편이었다. 사진이 많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어지러운 뉴욕의 이미지 없이도 책은 충분히 제 값을 해냈을 법하지만, 안고 가는 사진들이 주는 시각적 멋스러움도 꽤 매력적이다. 더구나 안에 쓰여진 여러 폰트의 미적 가치도 얼마든지 손을 들어주고 싶다. 여러모로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다음 작품을 크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