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품절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는 건 상관없다와는 다르다. 상관있지만, 할 수 없다. 그건 또 그것대로 부닥치는 수밖에. 어떻게 하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까부터 고민해봐야 아무 결종 못 한다. 출발점은 내가 그걸 얼마나 원하느냐, 여야 한다. 그런 후 그다음을 감당해가는 거다. 순서가 그렇다.
만약 내게 묻는다면, 나라면, 동생에게 고백한다. 이기적이지 않고서 한 사람을 독점적으로 사랑할 순 없는 법이다. 그게 배타적인 사랑의 본질적 속성이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럼 종교인이 되어야 하는 거다. 언니에게도 착하고 동생에게도 착한 사람이 되고자 자신에게 닥친 사랑을 포기한다면 애초 그런 사랑은 할 자격이 없다는 게 내 새악ㄱ이다. 물론 고백한다고 된단 보장은 없다. 동생에겐 동생 나름의 고민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좋은 게, 공짜일 리 없지 않은가. 도전해야지.-222쪽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지금 당신의 진짜 문제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게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 아예 선택 자체를 피해버린다. 그렇게 선택으로부터 도망가면 결국 다른 사람이나 시간이 당신을 대신해 선택을 한다. 결과라는 건 그렇게 당신이 선택을 하든 않든,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닥치기 마련이다. 그 경우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 어느 쪽이 됐건 반드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시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고백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망설이다 그냥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당신이 그 고백을 유보하기로 결심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후회될 땐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다.-224쪽

애인, 남이다. 그리 말하면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 들리나. 아니다. 애인이 남인 걸 인정 않고 어른의 사랑, 못 한다. 남, 자기 뜻대로 못 하는 거다. 사랑, 단점과 차이를 없애는 거, 아니다. 그에 개의치 않는 거지. 게다가 사랑이란 게 영원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그게 된다는 상상까진 좋다. 그러나 그 판타지를 상대더러 실제로 구현해내라는 강요, 그거 폭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 수용할 수 없는 자, 사랑 말할 자격도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든, 당신 수용 한계 초과하거든, 헤어지는 게 옳다. 사람, 고쳐 쓰는 물건 아니다. 당신이 뭔데. 당신의 통제 강박과 일장 훈계를 오로지 사랑이라 간주하고 당신에게 기꺼이 포박, 훈육되고 싶어하는 자 만나시라. 그래서 실컷 인간 개조해주시라. 아마 있을 게야. 없으면. 그럼 니가, 하와이 가야지 뭐.-255쪽

연인, 남이다. 연인이 남이라는 걸, 이 기본적인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참 많다. 그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울부짖는다. 이런 자들과 놀면 안 된다.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이런 자들은, 사랑과 폭력을 구분할 줄 모른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257쪽

그렇게 모든 관계가 본질적으로 거래라면서 왜 정산을 말라는 거냐. 연애가 거래라는 건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다. 그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까지 포괄해 서로가 주고받는 것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그렇게 교환 가치를 갖는 것의 목록이 지독하게도 물질 편향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관계에 있어 정산이란 곧 경제적 정산만을 의미한다. 그 이외의 정산법, 모른다. 지금 당신처럼. 그리고 당신의 여친처럼. 바로 그런 경제적 정산을 말라는 거다.-262쪽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흔히 왜 애초부터 솔직하지 못했냐고 탓한다. 마치 그게 결심만 하면 되는 일인 양. 큰 착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한다는 건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누구다 결심만 하면 박지성 되나. 액면가의 자신과 마주하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데엔 대단한 분량의 성찰과 용기가 필요하다. 기회를 박탈당하고 도태될지도 모를 리스크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거고, 그 결과를 억울함이나 한탄 없이 고스란히 수용하겠다는 거다. 본능과 습성에 반하는 거라고. 그럴 수 있다는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능력이다. 해서 당신 탓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그저 딱 수컷 평균만큼만 보잘것없었을 뿐이니까. -265쪽

세상엔 두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 내가 쟤보다 키 커서, 돈 많아서, 잘생겨서, 그런 비교 우위 통해 획득하는 자신감. 이건 나보다 키 크거나, 돈 많거나, 잘 생긴 상대 앞에서 바로 죽는다. 상대적 자신감. 반면, 상대가 돈 많거나 잘 생긴 게 내가 보유한 자신감의 총량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유형이 있다. 왕자병과의 차이는, 상대가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겼다는 자체는 인정한다는 거. 하지만 그게, 그래서 난 못났다, 로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분을 스스로 농담거리로 만든다는 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만족스럽게 긍정한다는 거지. 이거, 절대적 자신감. 그렇게 자신의 취약점과 하자에 개의치 않는 건, 결국, 섹시하기까지 하다. 다 섹시하자고, 이 지랄들인데 말이다.

p.s. 그 자양분은 지성이다. 지성의 출발점은 자기객관화이고, 자기객관화에 도달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밖에서 보기'.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은 뜬금없게도, 그만 징징거리고, 여행, 가능한 한, 많이 하라는 거. 이상.-266쪽

충분히 세계를 돌아보고 나면 어느 순간 믄득 깨닫게 된다. 세계는 우열로 나뉘는 게 아니라 차이로 나뉜다는 걸. 그리고 그 차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으레 통하기 마련인 인류의 보편 상식을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세계를 여행하려거든 이걸 명심하자. 지금 잘 살고 있는 나라 가서 주눅 들지 말고, 어려운 나라 가서 유세 떨지 말 것. 그만한 꼴불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래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만날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면 여행은 뭐 하러 가겠나. -271쪽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독일에 패하자 언론들은 이 정도면 잘했다는 거국적 자위에 즉각 착수했다. 분했다. 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패배를 원만하고 익숙하게 처리하는 우리의 숙달됨이. 평생 다시 오기 힘들 결승 기회 놓친 걸 며칠은 충분히 분해해도 좋으련만. 습관성 탈구처럼 패배를 다루는 그 수습 동작에서 20세기 우리네 굴국의 역사와 화이트콤플렉스가 스며있는 것 같아, 참, 속상했다. 땡깡 부리는 이탈리아가 차라리 부러웠다.

상대가 강하다 말하는 게 공포가 아니라 냉정한 상황 인식이려면 자기긍정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다행히 박주영의 세대는 그게 된다. 막상 부딪혀보니 오히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들을 위해, 나는 이제 우승 못 해 분하다 말하는 감독을 원한다. 우리가 세계의 벽이라 말하는 감독을 원한다. 호기가 곧 승리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미 이긴 경기만 이기는 법이다. -272쪽

그렇게 자기 상처 사방에 문대봐야 지 털만 빠진다. 연애로 말미암은 희열이 온전히 당신 것이었듯 그로 인해 비롯된 비탄도 고스란히 당신 몫이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 이치다. -274쪽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주길 바라진 말라고. 남자가 능력 없는데 그 집이 능력 된다는 게 어떻게 당장 결혼의 조건이 되나. 그 집과 결혼하나. 그건 성장 지체를 넘어 노예 근성이야.

당신이 왜 선택을 못 하는지 아나. 진짜 사랑을 몰라서가 아냐. 잘못 선택하면 손해날까 두려운데, 대체 잘, 선택하는 게 뭔지 자기도 몰라 황망해 그러는 거야. 선택은 상대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달린 거라고. 당신은 당신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나.
-290쪽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291쪽

우리 사회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이란 개념 자체가 어색한 사회다. 아마 우리 손으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해 근대적 개인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데다 군바리 정권의 통제 습성이 불순물처럼 남아서일 게다. 개인들이 가진 각자의 지각으로 그 사행심을 적절히 통제해 스스로 자기 상황을 책임질 수 있다는 걸, 기본적으로 신뢰해주지 않는다. 그러지 못하는 소수의 경우가 있다 해서 그 나머지 스스로 적절히 제어할 능력을 갖춘 다수의 자기결정권까지 간섭해선 안 된다는 생각, 별반 하지 않는다.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려는 것이 지독하게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주민번호가 그대로이니 개명으로 인한 혼란은 사실상 개인적인 수준인데도, 국가의 관리 혼란에 대한 우려가 자기 이름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우선해왔다. -324쪽

자기 이름 자기가 바꾸겠다는데 국가의 허락을 그렇게까지 받아야 한다는 거, 말이 안 된다. 제 몸에 어떤 무늬를 그려 넣든 말든 철저히 자기결정의 문제임도 문신 작업을 보건 범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요컨대 무면허 의료 행위로 불법화함으로써 문신 자체를 막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신 의사가 문신하면 불법 아니란 거다. 바보들.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보다 대마로 인한 국민 건강을 말하면서도 정작 재활 치료는 나 몰라라 하는 이율배반에 이르면, 화가 난다. -324쪽

이 모든 게 국가가 국민을 계도, 계몽할 대상으로만 취급했던 시절의 잔재다. 기본적으로 개인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의 가치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에 대한 결과 역시 스스로 책임진다는, 자기결정권의 개념이 우리에겐 그동안 너무 약했던 게다.-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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