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강머리 앤을 아주 어릴 적에 읽었다. 그 다음에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으로 보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금년에 다시 재방송을 한 것을 알지만 매번 챙겨볼 수는 없었고, 가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조카가 보고 있는 화면을 추억에 젖어 잠시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 앤의 이야기를, 100주년 기념판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무려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 이야기를 말이다.

책을 받아들고는, 잠시 당황했다. 작가 이름이 '몽고메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허거덕! 홍보문구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었다. 몽고메리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만들어낸, 일종의 헌정 소설이었던 것이다.

아, 사실 나는 좀 실망스러웠다. 그 완벽한 앤의 이야기를 다른 작가의 입을 빌려서 듣는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고, 원작 만한 영화를 보기 어려운 것처럼, 또 1편 만한 2편을 보기 힘든 것처럼 실망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 기대 없이! 그리고, 놀랍도록 빠져들고 있다는 자신을 깨닫고는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건 진짜 앤이잖아!

그랬다. 이 책에는 앤이 살아있었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 때부터 무럭무럭 성장하는 어린이 앤과, 온갖 고난에도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쳤던 바로 그 주근깨 빼빼 마른 앤이, 여기에 살아서 통통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내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작가분이 얼마나 앤을 열심히 연구했는지, 공부했는지, 얼마나 멋지게 재현해 냈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분명히 그녀는 앤을 사랑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동화되어서 앤을 다시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캐나다에선 현재 가장 유명한 작가분이라고 했는데 국내 번역서에선 그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명인을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몇 시간 동안 줄기차게 한 책을 읽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보통은 다른 일들이 생겨서, 다른 궁금한 것들이 생겨서 이것저것 번다하게 참견하고 진행하느라,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 독서를 못하곤 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앤의 다음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했고, 그녀가 표현해내는 그 진귀한 세상에 나 역시 푹 빠져서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어느새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해버렸다. 아, 즐거웠다. 사랑스러웠다. 행복했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로구나. 이것이 예술의 기쁨이구나.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런 작품이 있는데, 무려 100주년 기념판인데, 진짜로 앤이 여기에 살아 있어요. 앤의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라고!

앤 셜리. 그녀에게도 당연히, 훌륭하고 멋진 부모님이 계셨다. 불행하게도 3개월 만에 돌아가셨지만. 앤은 부모님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을 알았던 이들은 그들이 지녔던 자애로움과 평온함과 지적인 아름다움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앤의 엄마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고용되었던 토머스 부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 덕분에 힘들게 일에 치여 살던 그녀가, 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무 후견인도 없을 때에 그 형편에도 불구하고 앤을 선뜻 맡겠다고 말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토머스 부인은 인류애가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의 현실은 늘 잔인했고 가혹했으며 그녀는 그것들을 포용할 만큼 마음이 넓거나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앤은 그 집에서 다만 '자랄' 뿐이었다. 토머스 부인의 무수한 아이들을 아직도 충분히 어린 앤이 키우고 돌봐야 했고, 부엌 일을 해야 했고, 온갖 청소와 빨래도 앤의 차지였다. 토머스 부인은 앤을 딸처럼 대하지는 않았다. 오갈데 없는 불쌍한 고아를 데려다가 적선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아이의 노동력에 기대어 힘겨운 일상을 버티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앤은- 이 놀라운 아이는, 그 고단한 삶을 바꿔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작가분이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었다. 11살의 나이로 고아원에서 막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기차역에 도착한 그 빨강머리 소녀가, 분명히 신산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어찌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졌는지. 도대체 앤의 어린 인생에 무엇이 있었길래 이 아이의 아름다운 바탕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에 집중한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만남'에 맞추었다. 혼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아름다운 심성을 살려줄, 지켜줄 누군가가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작가는 온전히 상상력에 의지해서 만들어냈다. 완벽하게!

토머스 부인의 집에서는 큰 딸 일라이져가 그 역할을 했다. 앤에게 로열 리더의 시들을 읽어주었고,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녀가 시집을 가면서 앤이 다시 버려지긴 했지만. 앤은 그 사건으로 큰 상처를 받는다. 시집가는 일라이저를 배웅하지도, 포옹해주지도, 인사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만큼 앤의 배신감이 컸던 것이고, 그래야 할 만큼 앤은 완벽하게 어렸었다.

온통 힘겨운 노동의 연속 뿐이던 그 집에서 앤에게 구원이 되어준 것은 달걀을 파는 존슨 씨였다. 숲속 외딴 집에서 과거의 상처에 마음을 닫아 걸어버린 괴퍅한 아저씨. 그는 앤에게 단어 선생님이 되어주었고, 상상력을 맘껏 펼치도록 응원을 해주어서 앤을 몽상가로, 멋진 시인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리고 앤에게 '용서'와 '자비'도 베풀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존슨 씨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게 되는 아치볼드 부인은 앤에게 첫 생일 선물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그 빨강 머리에 파란 리본이라니. 확실히 눈에 확 드러나는 배합이다!

그리고 앤에게 인생의 '절정'을 만들어준 것은 '학교'였다. 그곳 노바스코샤의 훌륭한 교육 정책은 취학 연령에 다달은 아이들을 반드시 학교에 보내게 하였고, 그 일은 앤을 무수한 가사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줌과 동시에 글을 읽고 쓰고 만들어 주었으며, 앤의 배움에 대한 갈망과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앤이 학교에 가게 되면서 겪는 기쁨과, 또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맞닥뜨려야 하는 커다란 절망들은 반복해서 앤을 공중부양 시켰다가 또 바닥으로 추락시키곤 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 능독적인 학구열에 대한 부러움과 교육의 힘도 생각하게 만든다.

토머스 가족에게 생긴 불상사, 그로 인해 해먼드 집에 맡겨진 앤. 그리고 그곳에서 무려 8명의 아이를 돌보며 11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앤의 모습은 들장미 소녀 캔디도 울고 갈 억척스러운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적어도 고아원에 보내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친구들 케이티 모리스와 비올레타는 앤이 고통을 견뎌내게 해주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것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앤 자신에게서 나왔다. 그 작은 몸에서, 그렇게 강렬하게 말이다.

앤의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해먼드 부부에게 들이닥친 재난은 기어이 앤을 고아원으로 밀어넣었고, 그곳에서 생기를 잃어버린 가엾은 앤의 모습이 재현된다. 그러나 독자는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남은 페이지는 적었고, 앤은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가는 기차를 분명 타게 될 테니까. 독자의 짐작 그대로 앤은 마침내, 드디어, 기어이, 천국행 기차를 타고 만다. 물론, 첫 만남에서 앤이 기대했던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을 테지만, 그래도 끝내는 그 초록 지붕에서 행복하게 살 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은 필요가 없다.  

   
  그들은 달걀을 거뒀고, 존슨 씨가 알려준 새 단어 다섯 개를 공책에 적고, 조심스럽게 달걀 가방에 집어넣었다. 거기 적힌 단어들은 '비탄', '희망', '용기', '자신감', '자비'였다. – 273쪽  
   

앤에게는 인생이 그렇게 먹구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존슨 씨가 그랬고, 헨더슨 선생님이 그랬고, 상상의 친구들도 물론 그녀의 훌륭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그러나 앤이 누군가의 도움과 영향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그 사람들이야말로 앤으로부터 인생의 귀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연과 배신으로 마음의 문을 닫았던 존슨씨도 그랬고, 인생의 역경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쳤던 토머스 씨도, 또 박복한 팔자를 비관하던 토머스 부인과 아이 낳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75세 평생을 미스로 살았던 해거티 양마저도 앤같은 딸을 원하게 될 만큼 앤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고아원에서는 어땠던가. 평생 사랑 받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못했던 칼라일 양은, 앤을 입양시키기로 결정한 순간 그녀의 격렬한 포옹에 생애 처음으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어찔해진 앤을 보고 걱정스런 한마디를 던질 수 있을 만큼!

   
  "앤, 너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구나. 널 알게 된 후로 노처녀가 되기로 한 나의 결정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너 같은 아이가 내 아이였을 수도 있으니까. 나에게 구애를 한 남자들이 상당히 많았어. 내 몸이 이렇게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보이기 시작하기 전에는 꽤 예뻤거든. 내가 20년만 더 젊었다면 널 받아들여서 내 딸로 입양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일흔다섯 살이야. 몇 년 지나면, 네가 날 돌봐줘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 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돌봐왔잖니. 하지만 난 널 원했어." – 465쪽  
   

단어를 배우자마자 그 단어를 표현해내는 멋진 문장을, 상상력에 섞어서 공기 중에 내보낼 줄 알았던 이 아이. 하루종일 재잘거리는 그 수다스러움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지만, 그 조그만 입술이 닫히는 순간 공기가 막히는 것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는 이 아이. 억척스럽고 완벽하게 고된 노동을 해내지만 자신은 아직 어린아이이고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이 당찬 아이. 아, 앤이 만난 그네들처럼 독자 역시 앤에게 이미 푹 빠져버렸다. 헤어나올 수가 없다.

   
  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내가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에요. 토머스 부인, 나도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난 아줌마를 도울 거예요. 하지만 때로는 내가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나이 들기 전에 어린애로 대접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349)
 
   

작가는 철저한 고증과 연구로 100년 전 앤이 살던 그 고장의 풍습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재현해 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기적이고 솔직한, 때로 악하면서도 때로 선하기까지 한, 그 모든 인간 군상들을 열심히 표현해 주었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과 만날 수 있어 독자는 진정으로 기쁘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나를 울린 무수한 문장과 씬들은 이미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내게 박히고 말았다. 특히나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사진을 훔쳤던 앤에게 그 섬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던 선생님의 갈등과 번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서른 다섯 살의 이 남자가 길가에 멈춰 서서 엉엉 울어낼 만큼.

내 어린 날의 동심을 되살려주고, 감동의 눈물이 주는 편안한 위로를 함께 선사해준 버지 윌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음악이 느껴지는 멋진 번역을 선사해 준 역자분께도 역시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지극히 사랑스럽고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멋진 인생을 사는 빨강머리 앤에게 나의 환희를 전하고 싶다.

   
 

내 인생에서, 나한테 정말로 멋진 것들도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목록을 만들어볼게요. 처음 나를 태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요. 아주 탁월한 재능을 주신 것에 대해 지극히 감사해요. 떠나가기 전에 나를 사랑해줬던 일라이저 언니, 내가 항상 슬프거나 화나거나 지루하지 않을 수 있게 상상력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단어를 가르쳐주시고 달걀을 먹을 수 있게 해주신 존슨 씨를 만나게 해주신 것, 토머스 가족이 나를 해변으로 데려가준 것, 내 모든 사랑을 쏟아 부을 어느 누구도 없었을 때 케이티 모리스와 비올레타를 주신 것, 나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신 너무나 아름다운 헨더슨 선생님, 노아와 줄리 애너와 로더릭, 해먼드 부부의 지하실에 있던 책 상자, 다섯 자매와 거울 웅덩이, 소들과 까마귀들과 고양이들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것들을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발, 내 소중하고 관대한 별님들, 예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 하나 없는, 이 황량하고 구슬프고 비참한 고아원에서 이제 나를 꺼내주세요.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나를 내려놔주세요.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해요.
앤은 의자에서 기어 내려와 조용히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5분 만에 잠이 들었다. – 518-519쪽

 
   

덧글) 204쪽에 오기가 있다. 밑에서 네번째 줄. '존슨' 부인이 아니라 '토머스' 부인이 맞다. 다음 쇄를 찍을 때는 꼭 수정하시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ookJourney 2008-11-2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새벽에 없던 밑줄긋기가 들어갔네요. 너무 좋아요~ ^^
며칠 동안, 전집에, 기프트에, 낱권 책까지 너무 많이 질러서 자제해야 하는데 ... 마노아님 리뷰를 보니 못 참을 것 같아요~ ^^;

마노아 2008-11-28 21:33   좋아요 0 | URL
아침에 수정했어요. 이어서 빨강머리 앤도 읽으려고요. 이번엔 진짜 몽고메리 버전이네요.
아, 저도 이거 세트로 다시 사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꿈틀거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