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구판절판


"저기 말이다. 앤, 내가 매주 너를 위해 특별히 멋진 단어를 다섯 개씩 준비하고 있으마. 네가 쓰는 걸 연습할 수 있도록 공책에도 써줄게. 그걸 쓸 수 있는 작은 공책과 연필도 줄게."
그들은 길바닥에 떨어뜨렸던 달걀 담는 천 가방을 찾으러 나갔다. 가방이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달걀이 무거웠고 눈도 꽤 깊었지만, 앤은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날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195쪽

"학교 일을 하는 그 남자 분이 서머스 씨인가봐요. 그분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아오. 저는 무척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읽는 방법을 얼마나 빨리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날개 달린 천사처럼 행복할 것 같아요."-214쪽

"옛다! 이거나 받아라! 그게 잘난 척하는 네 년 머리통을 부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랜돌프는 앤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운동신경도 발달돼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사전을 잡아 가슴에 끌어안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무너무 고마워, 랜돌프. 이렇게 너그러운 선물을 줘서."-242쪽

앤의 끝없는 재잘거림에 피곤해 하던 토머스 부인은 그녀가 이야기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자신을 깨닫곤 했다. 토머스 씨는 자신이 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앤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었따. 전에는 그녀와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하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
......
호러스조차 앤을 괴롭히는 행동을 삼갔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녀가 세상 전체에 화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268쪽

"스토브에 수프를 데울 테니까 그것도 좀 먹도록 해라. 그런 다음 나가서 달걀을 가져오도록 하자. 달걀을 가져온 후에 새 단어 다섯 개를 가르쳐주마. 그리고 너는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감자를 썰어야지. 그중 한 녀석한테 물 한 양동이 퍼서 가져다 달라고 해. 부탁한다고 말해라. 그 말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단다. 토머스 씨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면 그를 바라봐. 미소 지을 것까지는 없지만. 네가 그냥 그를 쳐다볼 수 있는지 알아보는 거야. 그 집에서 그 사람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잖니. 그에게 희망을 주렴"-272쪽

"하지만 나더러 빨강머리 마녀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 알아. 하지만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틀림없이 진심이었을 거예요! 머릿속에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밖으로 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아저씨가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넌 자주 옳은 말을 해. 하지만 지금은 틀렸어. 술 취한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가 종종 있단다. 그리고 맨 정신일 때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지. 나도 너만큼이나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니. 그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란다. 나도 아직 그걸 못하고 있어. 하지만 그를 그냥 쳐다보는 건 할 수 있지 않겠니?"
"확실하게 약속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 생각해볼게요."-272-273쪽

그들은 달걀을 거뒀고, 존슨 씨가 알려준 새 단어 다섯 개를 공책에 적고, 조심스럽게 달걀 가방에 집어넣었다. 거기 적힌 단어들은 '비탄', '희망', '용기', '자신감', '자비'였다.-273쪽

보기 드물게 따뜻한 날씨에 지친 날개를 시험하러 나온 커다랗고 기운 빠진 나비 한두 마리도 눈에 띄었다. 가벼운 바람이 긴 풀들과 마른 잡초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지만, 추운 것보다 격려해주는 느낌이었다. -285쪽

대지를 볼품없어 보이지 않게 하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꾸준히 색채를 제공하는 것은 상록수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에는 기다림이 있었다. -292쪽

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내가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에요. 토머스 부인, 나도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난 아줌마를 도울 거예요. 하지만 때로는 내가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나이 들기 전에 어린애로 대접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349쪽

"넌 어떠냐, 앤? 어떤 이름이 좋을지 생각해봤니?"
앤은 자신 앞에 초록빛 초원과 햇살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이 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깐 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네, 있어요."-429쪽

"앤, 너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구나. 널 알게 된 후로 노처녀가 되기로 한 나의 결정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너 같은 아이가 내 아이였을 수도 있으니까. 나에게 구애를 한 남자들이 상당히 많았어. 내 몸이 이렇게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보이기 시작하기 전에는 꽤 예뻤거든. 내가 20년만 더 젊었다면 널 받아들여서 내 딸로 입양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일흔다섯 살이야. 몇 년 지나면, 네가 날 돌봐줘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 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돌봐왔잖니. 하지만 난 널 원했어."-465쪽

그는 어느 헛간 옆의 조그만 널빤지 벽에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때때로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도덕적인 의무 사이에서 전쟁을 벌이던 이 서른다섯 살의 남자는 엉엉 울어버렸다.-468쪽

내 인생에서, 나한테 정말로 멋진 것들도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목록을 만들어볼게요. 처음 나를 태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요. 아주 탁월한 재능을 주신 것에 대해 지극히 감사해요. 떠나가기 전에 나를 사랑해줬던 일라이저 언니, 내가 항상 슬프거나 화나거나 지루하지 않을 수 있게 상상력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단어를 가르쳐주시고 달걀을 먹을 수 있게 해주신 존슨 씨를 만나게 해주신 것, 토머스 가족이 나를 해변으로 데려가준 것, 내 모든 사랑을 쏟아 부을 어느 누구도 없었을 때 케이티 모리스와 비올레타를 주신 것, 나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신 너무나 아름다운 헨더슨 선생님, 노아와 줄리 애너와 로더릭, 해먼드 부부의 지하실에 있던 책 상자, 다섯 자매와 거울 웅덩이, 소들과 까마귀들과 고양이들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것들을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발, 내 소중하고 관대한 별님들, 예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 하나 없는, 이 황량하고 구슬프고 비참한 고아원에서 이제 나를 꺼내주세요.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나를 내려놔주세요. -518-519쪽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해요.

앤은 의자에서 기어 내려와 조용히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5분 만에 잠이 들었다. -5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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