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의 책 21
유인선 지음 / 이산 / 2002년 3월
절판


베트남이 중국과 처음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말 한 무제가 남 비엣(Nam Viet, 남월(南越)을 무력으로 정복하면서부터. 이때 시작된 무력 지배는 10세기 전반 베트남이 독립할 때까지 천 년 이상 계속. 베트남인들이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부터. 이들은 ‘조공제도’를 통해 정기적으로 중국 각 왕조의 조정에 사신을 보내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조공을 한 일차적 목적은 친선관계를 맺음으로써 중국의 무력 침략을 사전에 막아 보자는 것이었고, 다음은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11세기 후반에는 문묘가 세워지고 과거제도가 실시되었으며 국자감도 설치. 그러나 14세기 말까지 유학은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당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불교 승려들이었으며, 권력의 핵심층은 왕실 귀족들. 과거시험은 부정기적으로 실시, 합격자 수도 적었고, 과거 합격자가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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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명실상부한 유교국가가 된 것은 15세기 초 레 왕조(1428-1788)때부터다. 특히 4대 타인 똥(1460-1497)은 유교 도덕을 전파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타인 똥 사후 일어난 내란이 왕조 말기까지 이어지면서 각 세력이 무력의 강화에 치중하면서 유학의 보급은 상당히 저조했다.
유학의 보급은 19세기 초 응우옌 왕조(1802-1945)에 이르러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때에는 지방행정단위인 부와 현에도 학교를 설치하고 교수와 훈도라는 관리를 두어 지방교육을 맡게 했다. 그러나 중부에 위치한 후에(Hue)에 도읍을 정한 응우옌 왕조는 북부나 남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그들이 시도했던 것만큼 유교교육이 보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더욱이 응우옌 왕조의 유교 이념은 1880년대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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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날 많은 동남아시아 역사 연구자들은 베트남을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다루기보다는 동남아시아 문화권의 일부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인은 중국의 끊임없는 무력침략을 당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베트남 역대 군주들이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국 황제와 자신을 대등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응우옌 왕조의 민 망(1820-1840) 황제는 오늘날 베트남이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한자명 월남이 청나라가 승인해 준 이름이라 하여 다이 남(大南)이라고 국명을 바꾸고 옥새도 만들었다. 다이 남이란 중국이 북쪽에 있는 나라라면 베트남은 남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동등하다는 관념이 강하게 깔려 있다. 중국과 베트남을 북국과 남국으로 대비시킨 예가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11세기이며 이후 베트남인들은 이런 정체성을 대대로 강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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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유교를 수용했지만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베트남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과 어느 정도 대등, 대가족보다 핵가족이 일반적 형태. 친족개념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베트남 가정에서는 부인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 베트남의 가장 큰 명절인 설(Tet)에도 우리처럼 자식들이 부모가 있는 고향집으로 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당연히 중국적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 사회의 특성. 베트남 사회에 끼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논할 때, 북위 18도선 이북을 가리키며, 그 이남 지역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베트남 중부 지방은 예로부터 북쪽의 다수 종족인 비엣족(월족)과는 인종과 문화를 달리하는 참족(Chams)의 거주지. 이들은 일찍부터 인도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 나름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남부지방은 캄보디아의 영토로 크메르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 역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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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와 남부로 베트남인이 진출한 것은 이른바 ‘남진’의 결과였다. 북부 홍 강 델타의 인구 과잉으로 인해 남으로의 이주를 계속한 베트남인들이 후에 근방에 도달할 때는 15세기 후반 레왕조의 타인 똥 치세였다. 이후 남진을 계속하여 베트남인이 남부지방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18세기 말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일이다. 이 남진을 통해 북부의 문화가 남으로 전파되었고, 동시에 참족과 크메르족의 문화도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외국학자들은 베트남이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국가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별개의 두 지역으로 나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북위 18도선 이북이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면 그 이남은 인도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8쪽

결론적으로 말하면, 베트남 문화는 우리와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적지 않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베트남 이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읽고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 했다는 남만을 베트남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중국 삼국시대의 남만은 지금의 중국 윈난 성 서부로, 미얀마 동북부와 맞닿은 국경지대에 있었다. 그 당시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오(吳)와 밀접했으며 촉(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베트남이 중국에서 볼 때 ‘남만’에 속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그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9쪽

전체 면적은 33만 제곱킬로미터. 우리나라보다 1.5배 크기. 산지가 국토의 73%. 베트남의 지형은 기다란 S자형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전체 길이가 1,650km에 이른다. 길이에 비해 폭은 좁은데 북부가 600km, 남부가 375km, 중부의 가장 좁은 곳은 50km 정도로 허리가 잘록하다. 베트남에서는 전국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북부, 중부, 남부로 부르는데, 프랑스가 19세기 후반 베트남을 점령하고 이들 지역을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로 명명하고 나서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명칭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

-15쪽

오늘날 베트남인들의 주요 생활 중심지는 북부의 홍 강 델타와 남부의 메콩 강 유역이다. 1년에 이모작을 할 수 있는 홍 강 델타 지대는 일찍부터 베트남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인구가 조밀하여 농민의 생활은 고달팠다. 남부의 메콩 델타는 홍 강 유역보다도 훨씬 광대하다. 총 길이가 4,220km로, 티베트에서 발원하여 윈난,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거쳐 베트남에 이른다. 메콩 강 하류지역은 17세기까지 캄보디아 영토였지만 대부분 늪지라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베트남인과 중국인이 이주해 와서 땅을 개간하고, 19세기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근대적인 토목기술을 이용하여 오늘날처럼 개발되었다.
베트남은 아열대지역으로 기온이 매우 높다. 그러나 겨울날씨는 남북이 조금 다르다. 호찌민 시(이전의 사이공)의 연평균기온은 섭씨 26.9도이며 북쪽 하노이의 평균기온은 23.4도이다. 가장 낮을 때 호찌민 시의 월(12월) 평균 기온은 25.8도이지만 하노이의 월(2월) 평균기온은 이보다 훨씬 내려간 14도 정도이다.(겨울철에 하노이는 기온이 10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다.)
-16쪽

따라서 베트남인들은 남부의 기후를 이야기할 때는 기온보다 강우량의 차이를 가지고 우기(5~11월)와 건기(12~4월)로 구분하는 반면, 북부의 경우는 기온과 연관시켜 사계절, 곧 봄(2~4월), 여름(5~8월), 가을(9~11월), 겨울(12~1월)이 있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의 기후는 위도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고도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진다.
-17쪽

베트남의 강우량은 전국적으로 1,800mm 이상이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많이 다른데, 1년에 3,000mm 이상 내리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800mm도 채 안 되는 곳도 있다. 한 가지 문제는 강우량이 매년 일정치 않고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여하튼 비는 늦봄부터 초가을에 걸쳐 집중적으로 내리고 겨울철에는 거의 내리지 않는다.
베트남의 인종 분포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복잡 다양하여 54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비엣족(월족), 일명 낀족(경족)으로 전체 인구의 87%나 된다. 이들은 평야지대에 살면서 역사상 중국 문화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비엣족의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어처럼 6성을 가지고 있다.
-18쪽

다수 종족인 비엣족 외에 소수민족으로는 크메르족과 참족, 그리고 중국인 화교가 평지에 살고 있다. 크메르족은 메콩 강 유역이 아직 캄보디아 영토였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캄보디아인들의 후예로, 이들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소승불교를 신봉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베트남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참족은 예전 참파 왕국의 후손들로 극히 소수가 베트남 남부의 판랑 지방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크메르족과 마찬가지로 인도 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인종적으로 말레이-폴리네시아 어족에 속한다. 중국인 화교들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상당수가 해외로 탈출하였고 더러는 강제로 추방당했다. 1986년 ‘도이 머이’(쇄신) 정책의 채택 이후 다시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18쪽

평야를 떠나 산간지대로 들어가면 이전 베트남인들이 경멸조로 ‘모이’라고 불렀던 각종 소수민족들을 만날 수 있다. 모이란 ‘야만’이란 뜻인데, 프랑스인들은 이들을 ‘산지민’이라고 불렀다. 산지민들은 대부분 화전경작을 하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늘 새로 개간할 땅을 찾아 이동한다. 토양은 척박한데다 농업기술도 원시적이어서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인구 증가 역시 매우 저조하며 물질문명의 수준도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19쪽

이들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거의 독립적으로 자치를 해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때 이들의 거주지가 전략적으로 중요해지면서 사이공 정부와 하노이 정부 모두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인구수에 비해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커졌다. 전후 하노이 정부는 베트남이 비엣족만의 배타적 국가가 아니고 다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소수민족에게 보조금을 지불하는 등 이들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도이 머이’ 도입 이후 베트남 정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자립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져 이들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다.

-20쪽

베트남 최초의 국가 반 랑. 오늘날 베트남 사람들은 락 롱 꿘과 어우 꺼를 자기네 시조로 생각하며, 훙브엉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그래서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이 되면 하노이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빈 푸(반 랑의 수도) 성(省)에 있는 훙 브엉의 사당에서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건국 설화가 기록상에 나타난 것은 14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설화집 <영남척괴>가 처음이며, 이 책보다 약 100년 뒤에 서술된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내용이 유교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23쪽

반 랑 건국에 관한 설화가 단순히 신화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 발굴조사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고대 베트남에서 청동기 제조기술이 절정에 달한 기원전 7세기 동 썬 문화의 발견이 그것이다. 동 썬 문화의 대표적 유물은 태양과 새, 그리고 머리가 새 모양인 사람 등이 정교하게 새겨진 청동제 북 동고이다. 그 밖에도 각종 청동기가 발견되어 정치권력이 지배층에 집중되는 성읍국가가 출현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24쪽

고고학적인 면에서 반 랑이 멸망하는 기원전 3세기에는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의 이행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락’이란 베트남 민족의 토템인 용, 곧 락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베트남어로 하천이나 수로 등을 의미하는 ‘라익’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26쪽

락 사회에서는 여자가 비교적 높은 지위를 누렸다. 베트남이 중국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중국에 저항하여 여자들이 지도자로 활약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런 여자들의 활약은 분명 락 사회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성과 다르지 않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락민은 몸에 문신을 하고 빈랑 나무의 열매를 씹으며 또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관습도 가지고 있었다. 빈랑나무의 열매는 이후 베트남인들의 생활에서 꼭 필요한 생필품이 되었는데, 귀한 손님이 오면 빈랑나무의 열매를 내어 대접했으며, 약혼 때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보내는 예물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락민은 홍수와 맹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우리의 원두막처럼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다가 집을 짓고 살았다. 락민의 종교는 토템 숭배로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28쪽

어떤 이는 락 사회의 봉건적 계층조직이 북방의 타이계 종족의 조직과 많이 유사하다고 한다. 다른 한편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신화의 이원성, 빈랑나무의 열매를 씹고 기둥 위에 집을 짓는 풍습 등은 인도네시아어계나 몬-크메르어계 종족의 남방문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9쪽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제국은 시황제 사후 곧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때 난하이군의 군위였던 런샤오는 중원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북쪽과 관계를 끊고 독립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병이 나서 포부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휘하의 찌에우 다를 불러 자기 뜻을 계승케 했다. 런샤오에 의하면, 난하이 군의 북쪽은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고 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영역 또한 광대하므로 이곳 중국인들이 서로 도우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울 만하다는 것이었다. 난하이 군 룽촨 현령이던 찌에우 다는 런샤오의 군위 직을 이어받고 그의 뜻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북쪽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는 한편, 진이 멸망하자 구이린 군과 샹 군을 병합하여 남 비엣(남월)을 세우고 수도를 지금의 광둥 성 판위에 정한 다음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했다.(B.C.207)

-34쪽

오늘날의 광둥과 광시 지방은 시황제의 남방 정벌로 중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그 주민은 인종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홍 강 델타의 주민과 비슷했으며 북방의 중국인과는 많이 달랐다.
중국을 다시 통일한 한의 고조는 국내가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또한 북방 흉노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방의 남 비엣을 무마할 목적에서 찌에우 다를 남 비엣 왕(남월왕)에 봉하기 위하여 기원전 196년 루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35쪽

기원전 183년 한의 고조가 사망하자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여후가 섭정을 했다. 여후는 남 비엣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남쪽 변경 지대의 시장을 폐쇄하고 철 금 농기구 우마 양 등의 판매를 금지했다. 이에 찌에우 다는 군대를 보내 지금의 후난(호남) 성 창사(장사) 지역을 공격하여 초토화시키는 한편, 자신을 무제라고 자칭하며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B.C.183) 여후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남 비엣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가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번지는 바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여후가 사망하고(B.C.180), 문제가 즉위하자 두 나라 사이에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루자가 다시 남 비엣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찌에우 다는 앞으로는 호아제라 칭하지 않고 한에 대하여 신하로서 예를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만 그러했을 뿐 국내에서는 여전히 황제라 칭하고 행차 때는 이에 상응하는 의식을 갖추었다. 찌에우 다의 이런 태도는 이후 베트남 군주들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원형이 되었다.

-36쪽

남중국에서 나라를 세우고 북부 베트남을 병합하여 두 지역을 최초로 통일시킨 찌에우 다는 기원전 137년경 세상을 떠났다. 찌에우 다는 중국의 관리로 출발하여 중국과 대립하는 왕조를 세운 인물이었기에, 후일 중국 사람들은 이단자로 보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숭앙했다.

-37쪽

찌에우 다의 통치하에서 유지되었던 남 비엣과 한 제국 사이의 균형은 그가 사망하자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찌에우 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손자 호는 아주 유약하고 통솔력이 부족했던 인물로 즉위 이듬해(B.C.135)에 민월이 쳐들어오자 응전도 해보지 않고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민월을 평정한 한은 좡주를 남 비엣에 보내어 반 브엉에게 친조(親朝)를 명하니 문왕은 장자 아인 떼를 대신 보냈다. 아인 떼는 즉위하기까지 10여 년간 한의 장안에 볼모로 잡혀 가 있었다. 당시 한이 호에게 내린 칭호는 번속국의 왕이었는데, 이는 이후 양국관계를 규정짓는 전형이 되었다.
무제 치하에 있었던 한은 남 비엣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승상 르 쟈가 중심이 된 토착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남 비엣의 조정이 이처럼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한은 친한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르 쟈는 마침내 반기를 들고 왕의 이복형이자 자신의 사위인 끼엔 득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남 비엣의 마지막 왕 투엇 즈엉 브엉이다.
-40쪽

이에 한의 무제는 장군을 남 비엣에 보내 수도 판위를 점령케 하니, 남 비엣은 얼마 못 가 멸망했다.(B.C.111) 한은 남 비엣을 멸망시킨 그해 남 비엣의 판도 내에 7개 군을 설치하고 각 군 아래 현을 두었다. 7개 군 중 난하이, 창우, 위린, 허푸는 오늘날의 광둥 성과 광시 성에 위치했으며, 쟈오 찌와 끄우 쩐 및 녓 남 세 군은 베트남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의 행정력이 이들 남방 군현까지 두루 미친 것은 아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남 비엣 때와 마찬가지로 토착 지배층-락장과 락후-을 통제하고, 각 현은 락장과 락후가 다스렸다. 토착 지배층은 한의 통제를 받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독자적으로 주민을 다스리며 한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남방의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칠 뿐이었다.

-41쪽

한 무제가 남 비엣을 정복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진출한 목적은 자국 변방의 안정과 남방 물산을 획득하기 위해서. 서기 9년 왕망에 의한 왕위 찬탈로 중국 본토가 혼란에 빠지자, 당시 쟈오 찌 자사로 있던 덩랑은 왕망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북쪽 변경을 폐쇄하고 남쪽의 안정을 도모. 이 무렵 적잖은 한의 관리와 지식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으로 이주. 이들은 중국의 교양인으로 현지 중국인 관리들의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현지의 관리들도 종래의 방임주의에서 탈피하여 한층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를 이식하려 애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광과 런옌. 런옌은 화전과 어로, 수렵으로 살아가던 끄우 쩐의 주민들에게 소를 이용한 농경법과 철제 농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민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했다. 시광과 런옌 등이 행한 통치정책은 새로운 행정조직이나 이질적인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종래의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토착 지배계급에게는 중대한 위협. 베트남은 중국의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기후도 많이 달랐기 때문에, 파견되어 오는 관리는 대부분 천박한 인물들. 이들은 임지에 머무르는 동안 오로지 주민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는 데만 몰두, 그래서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의 불만이 커져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43쪽

후한이 건국된 후 덩랑과 시광은 왕망에 저항한 공로로 작위를 받고 쟈오 찌를 떠났으며, 런옌도 곧 중원으로 돌아갔다. 시광의 뒤를 이어 새로 쟈오 찌 태수로 부임한 쑤딩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이미 중국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토착사회는 쑤딩의 착취와 지배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고, 마침내 쯩 짝과 쯩 니 두 자매가 중국 지배에 대항하여 베트남인 최초의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A.D.40) 중국인 고나리들이 점차 직접 통치를 해나가자 자신의 권위가 위태롭게 된 토착 지배계급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면적으로 들고 일어나 쯩 짝의 세력은 순식간에 65개 성으로 확대되었다. 쯩 짝은 이처럼 성공을 거두자 메 린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44쪽

한의 지배권력에 의해 토착 지배계층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음을 방증해 주며 한편 이들 토착세력이 여성을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권위가 강했던 모계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쯩 짝은 출가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고, 또 저항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왕이라 칭하고 도읍을 친정이 있는 메 린 지방에 둔 것도 친정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남성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상당히 독립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쯩 짝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그녀를 도와준 지도급 인물들 중에는 여성이 꽤 많이 있었다.

-45쪽

쯩씨 자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후한 광무제는 이듬해 마위안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약 3만의 병력을 주고 남방으로 진군하게 했다. 마위안은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42년, 마침내 이들을 대파하고 메 린 현의 딴 비엔 산으로 도피하는 쯩씨 자매를 추격했다. 이듬해 정월 마위안은 쯩씨 자매를 사로잡아 사형에 처하고 델타 지방에 한의 권위를 다시 확고히 세웠다. 델타 지방을 평정한 마위안은 끄우 쩐의 쯩씨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응에 안 지방까지 쳐들어갔다. 마침내 쟈오 찌와 끄우 쩐의 두 군을 완전히 평정한 마위안은 44년 봄 낙양으로 개선할 때까지 한의 통치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46쪽

마위안은 군현제도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 동안 현의 통치제도였던 락장 락후제를 폐지했다. 락장 락후제는 현지민을 지배하는 데는 용이하긴 했지만 언제든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지도세력으로 바뀔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한은 3군 56개 현에 중국인 관리를 파견했고 병력도 주둔시켰다. 마위안은 또한 한의 법률과 토착민의 고유법 사이에 상충되는 10여 조를 낙양의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베트남인들에게는 반란 이전에 시행되었던 중국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엄령을 내렸다. 마위안의 원정과 그에 뒤따른 개혁은 베트남의 역사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의 토착 지배계급이었던 락장과 락후의 이름이 사라지고, 이들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중국 관리와 이주자 및 이들과 현지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한은 종전과 달리 베트남을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여 보다 적극적인 직접 지배로 이행하면서, 토착 풍습과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한의 법률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후한이 점차 쇠락하면서 베트남 토착세력이 한의 통치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47쪽

당시 남방에 부임해 오는 한의 관리는 도착하자마자 부를 축적하기 바빴고, 그것을 이용하여 중앙의 관리에게 환심을 사서 중국 본국으로의 전출을 꾀했다. 한편 중국인 이주자들도 관리와 결탁하여 베트남인들로부터 남해 물산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쌓아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북부 베트남 각지에서 발견되는 한나래 때의 전묘이다. 당시는 후한의 전성기로 한의 권위가 토착사회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여 서기 1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잠잠했다. 그러나 후한이 정치적 부패와 혼란으로 쇠락해 가자 반란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48쪽

1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베트남은 북방에서 오는 한인 이주민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농업생산이 향상되었고, 호구 수도 뚜렷이 증가했다. 결국 2세기에 일어난 반란들은 후한의 과중한 수탈로 인한 일반 주민의 저항의식에 새로운 지배계층의 지도력이 결합하여 나타난 조직적인 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53쪽

후한 말 중국 본토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무렵, 쟈오 찌 지방은 오히려 전보다도 더 평온했다. 이런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쟈오 찌 태수로 있던 스셰(베트남어 발음은 씨 니엡)의 통치력 덕분이었다. 스셰의 지배 아래 쟈오 찌가 살기 좋아지자 전란에 시달리던 많은 중국인들이 난을 피하여 남하했다. 더욱이 스셰는 학문을 애호하고 학자를 후대했기 때문에 적잖은 수의 학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 중국인 유학자들은 삼국이 정립되면서 중국 대륙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자 대부분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베트남 사회에 어느 정도 족적을 남겨 놓았다.
스셰가 개인적으로 학자들을 후대하긴 했지만, 그 자신은 중국 문물을 베트남에 이식하는 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스셰 시대에 불교가 발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54쪽

쟈오 찌의 불교는 애당초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들여왔고, 그리고 얼마 후 남중국으로 전파되었다.
동남아시아 무역은 스셰 정권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무역을 통한 동남아시아 및 인도와의 접촉은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중국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57쪽

참족이 언제 럼 업(훗날 참파)을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세기 말 쿠 리엔이라는 사람이 세웠다고 한다. 그 주민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로 특히 항해술이 뛰어났다. 이들은 베트남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인도 문화를 수용하여 인도식 국가를 건설하고 인도의 종교를 신봉했다. 럼 업은 3세기 중엽에 녓 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뒤에는 끄우 쩐의 변경까지 자주 침범했다. 럼업의 북침에 대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는 토벌군을 파견했고, 때문에 베트남은 자주 다른 민족들간의 각축장이 되어 주민들이 곤경에 빠지곤 했다. 따라서 베트남 사회에서는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토착 지배계층이 들고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세력이 도씨였다. 도씨의 지배 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남방 럼 업과의 관계는 그 말기부터 악화되기 시작하여 다시 혼란에 빠졌다.

-61쪽

당시 강남의 왕조들은 이민족이 세운 북방의 왕조와 끊임없는 긴장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남방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으며 쟈오 쩌우에 부임해 오는 관리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치부에만 관심이 있었다. 토착 지배층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65쪽

502년 중국의 남조에서 이제까지의 제를 대신하여 양이 들어서자, 토착민 출신으로 당시 쟈오 쩌우 자사였던 리 카이가 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그에게 호응해 주지 않았고, 또 다른 토착민 출신의 관리 리 딱이 오히려 그를 죽이고 그의 무리를 토벌했다. 제국의 권위에 도전할 능력이 없었던 리 딱은 양의 지배를 거부하느니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다른 한편 이는 베트남에서 아직 민족의식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는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쟈오 쩌우 자사가 되었지만 양이 베트남에 개입할 길을 터 주었다. 양은 이전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쟈오 쩌우를 직접 지배 아래 두고 제국의 일부로 통합시키려 했다.

-68쪽

541년 쟈오 쩌우의 토호 리 본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하여 쯩씨 자매 이래 최대 규모의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 양은 영남 여러 주의 자사가 중심이 된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병사의 6,70%를 질병으로 잃어 실패했다. 북의 위협이 잠시 사라진 순간 남쪽의 럼 업이 득 쩌우로 침공을 해왔지만 팜 뚜가 격퇴했다. 남과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무사히 막아낸 리 본은 국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544년 그는 자신을 남 비엣의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티엔 득(천덕)이라 했으며 나라 이름은 반 쑤언이라 했다. 그리고 롱 비엔성을 도읍으로 삼아 궁궐을 짓고 찌에우 뚝을 태부로 임명하는 등 백관을 설치하고 이들과 더불어 정사를 돌보았다.
-69쪽

반 쑤언의 성격은 분명치 않지만, 중국계 토착 지배층과 순수한 토착세력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베트남을 지배해 온 중국은 새로이 출현한 베트남의 자주적 독립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545년 초 양은 베트남으로 쳐들어왔다. 이듬해 산간지대로 들어가 양군과 대치한 리 본. 대패하고 다시 라오족의 고지로 피신했으나 그곳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머리는 양나라 군대에게 보내졌다.(547) 이리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획득하려던 리 본의 꿈은 산산이 깨졌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운동은 그후 몇십 년 동안 계속되어 베트남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의식을 갖게 했고 마침내는 훗날 독립을 실현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70쪽

581년 북중국에서 일어난 수나라는 300년 가까운 중국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남방에서는 잠시 혼란이 계속되면서 각지에 유력자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 쟈오 쩌우에서는 리 쑤언이라는 사람이 대도독을 자칭했는데, 그가 바로 리 펏 뜨였던 것 같다. 수 문제는 장군 양쑤(양소)를 파견하여 이들 반란을 진압해 나갔다. 수년 내에 광둥과 광시 지방이 평온을 회복하고 수의 세력이 확립되자 리 펏 뜨는 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속했다. 그러나 리 펏 뜨는 600년, 수의 권위를 부정하기 시작하고 602년 초에는 마침내 대내외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76쪽

수 문제는 양쑤의 천거로 류팡을 정벌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류팡이 이끄는 27개 군단은 쓰촨에서 윈난 고원으로 진격했으나 피로와 질병으로 많은 장교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류팡은 대부대를 뒤에 남겨놓고 건장한 병사 수천 명만을 선발하여 진군을 계속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무방비상태였던 리 펏 뜨는 류팡의 권고를 받아들여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리 본 이래 62년 간 치열했던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 류팡의 원정에 의해 베트남을 확보한 수는 똥 빈 성(지금의 하노이)에 쟈오 쩌우 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른 주들은 모두 군으로 격하시켜 그 관할 아래 두었다. 류팡은 베트남을 정복한 지 3년 뒤인 605년 다시 남쪽으로 진출하여 럼 업을 공격했다. 럼 업은 또다시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77쪽

수는 진과 마찬가지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궤멸했다. 618년 결국 리위안(이연)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리위안이 당을 건국한 뒤에도 중국 대륙은 계속해서 10여 년 간 혼란을 겪었는데, 그 동안 쟈오 찌 지방은 태수 추허의 통치 아래 평온을 유지했다. 622년 당은 쟈오 쩌우에 총관부를 두고 추허를 대총관에 임명하는 등 수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628년 이를 도독부로 개칭하고 50년 뒤인 679년에는 다시 안남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안남은 글자 그대로 ‘남쪽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인들에 의해 ‘안남’으로 불려지기 시작했고, 훗날 우리나라나 일본 및 서양에도 안남으로 알려졌다.

-78쪽

당은 자기에게 복속한 주변 민족들에 대해 대체로 자치를 허용했지만, 상당히 강력한 몇몇 민족에 대해서는 자치를 맡길 수 없어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감시했다. 당시 주요 도호부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에 설치된 안동도호부를 비롯하여 여섯 개가 있었는데, 안남도호부도 그 중의 하나였다. 당이 한 무제 이래 800년 가까이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던 베트남에 새로운 정복지와 동일하게 도호 행정을 실시한 것은 이전부터 중국이 추구해 온 군현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는 중국의 태도가 미온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수백 년에 걸친 베트남인들의 계속된 저항을 막을 수 없어 중국이 직접 지배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안남도호부는 다른 도호부들이 당의 의욕적인 진출에 의해 설치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안남도호부 밑에는 주, 그리고 주 아래에는 군과 현이 두어졌다. 이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것이 푹 록 쩌우로 럼 업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80쪽

681년 안남 도호에 임명된 류옌유는 부임하자마자 당시까지 중국의 절반 수준이던 안남의 조세를 두 배로 올려 본토와 똑같이 부담토록 했다. 687년 류옌유는 살해됐고 난은 진압되었는데, 이 난은 종래의 여러 반란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했다. 이전의 반란들이 주로 토착 지배층의 기득권 유지 내지는 권력 장악을 위해 일어났다면, 이번의 경우는 당의 지배정책으로 살기 힘들어진 농민층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722년에는 호안 쩌우의 소금제조업자인 호족 마이 툭로안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당의 지배체제에 도전했다. 마이 툭 로안은 응에 안을 비롯한 32개 주의 주민은 물론 밖으로 럼 업과 쩐랍(지금의 캄보디아) 등과 연계하여 3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흑제’라 칭했다. 흑제라 칭한 것은 피부가 검기 때문인데 아울러 럼 업 등과 연계한 것으로 보아 그가 순수한 베트남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많다. 당은 10만의 원정군을 보내 간신히 진압했다.

-81쪽

8세기 중엽 당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 중국의 혼란으로 당 조정의 도호부에 대한 지배체제가 느슨해지자 주변국은 안남을 자주 유린했다. 안남은 767년 곤륜사파(곤륜은 중국인이 동남아시아 해안지대의 주민을 통칭할 때 쓰던 이름이며, 사파는 오늘날의 자바를 가리킨다)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직면했다. 자바의 침입은 당 행정관료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대신 군관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키고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된 상황 속에서 토착민 지도자가 군대를 이끌고 도호 행정을 반대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82쪽

당 지배하의 안남은 잠시 남해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본래 해상무역의 중심지는 중국 광저우였으나 중국 관리들의 지나친 횡포 때문에 외국 상인들이 광저우를 기피하는 일이 잦았고, 게다가 758년에는 광저우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도시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교역의 중심이 쟈오 쩌우로 이동했는데, 당의 권위가 재확립되면서 무역의 중심지는 다시 광저우로 옮겨 갔다.

-84쪽

당 관리들의 상반된 행동은 베트남 내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을 형성시켰다. 하나는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인과 당 지배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었다. 전자는 델타 중심부를 기반으로 하는 온건파로 당의 지배를 별 불만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지만, 후자는 과격파로 델타의 주변부에 살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변경 산간지대의 주민들과 단결하여 당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온건파도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독립이었으며 당에 대한 협조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이었다. 온건파와 과격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당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권위를 빌려 산간지방 소수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한 반면, 후자는 산지 주민들과 손을 잡고 당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는 점이다. 9세기 중반 윈난 지방에서 남조의 세력 강화는 이런 두 파 사이의 대립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한편 당시 내리막길로 치닫던 당은 안남도호부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남조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전략적으로 필요한 이곳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85쪽

전투는 남조와 당군이 벌인 것이었지만, 그 와중에 피해를 입은 것은 베트남 사회였다. 때문에 남조의 침입은 베트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찍부터 품고 있던 독립의 결의를 더욱 다지게 만들었다.

-87쪽

남조의 침입을 초래했던 반당세력은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안남은 가오펜의 치하에서 다시금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가오펜 치하에서의 이런 평화와 번영은 예술 방면에도 영향을 끼쳐, 미술과 건축에서는 이른바 다이 라 양식이 발달했다. 이 다이 라 양식은 후대 베트남 예술 양식의 원형을 이루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황차오(황소)의 난이 일어나(875-884) 당 왕조를 멸망의 길로 치닫게 함으로써 베트남에 대한 당의 통치는 이름만 남게 되고 실질적인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88쪽

당이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베트남을 지배하는 동안, 베트남인의 저항은 상당히 격렬했고 민족적 자긍심도 높았던 만큼 당 문화의 영향도 제한적. 그렇지만 당의 지배가 300여 년 동안 지속되면서 중국 문화의 영향이 앞선 어느 시대보다도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베트남이 중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5세기 레 왕조가 성립된 다음부터이고 그 이전, 특히 중국 식민지시기에 베트남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았다. 베트남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중국의 대베트남 정책이 한몫 했다. 중국이 베트남을 지배한 데는 두 가지 목적 있었다. 첫째는 남방에서 산출되는 진주, 물소 뿔, 상아, 산호, 비취, 향약 및 다른 진귀한 물건들을 획득하기 위한 것. 둘째, 당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의 중심지인 홍 강 델타와 이를 둘러싼 주변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 시대가 지날수록 무역의 중심지가 중국인이 말이 몰리는 지금의 광저우로 옮겨가면서 홍 강 델타의 중요성도 줄어들었지만,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면 다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곤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남은 만이의 침략에 대비한 완충지대.-89쪽

당대에 들어오면 베트남 사회는 그대로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이 멸망하고 500여 년 뒤 베트남에 세워진 레 왕조의 법률이 그 체제나 내용에서 당률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레 왕조의 법에서 당률을 수용한 부분이 주로 지배자에 대한 충성, 궁중 예절, 관리의 행동규범, 치안의 확보, 호구 조사 등과 같은 지배권력의 유지와 관련된 사항들이라는 점이다. 반면에 결혼풍습이나 재산상속 및 기타 가족제도 또는 촌락제도 등에는 베트남의 전통적 관습법이 그대로 반영되어 베트남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당 문화의 영향이라는 것도 외형적인 데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베트남 사회에 영향을 끼친 중국 문화는 주로 상층 문화였으며 이를 받아들인 것은 중국인과 접촉이 있었던 현지 사회의 소수 지배층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90쪽

당시 베트남 사회는 전술한 바와 같이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일부 지배계층에서는 중국 문화를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예가 있었지만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의 정치적 지배와 중국 문화의 수용은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인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교육을 통해서였다. 상층계급의 사람들이 먼저 중국식 교육을 받고 중국인의 가치관념에 익숙해져 자연스레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관리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오는 일반 문인들도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 문인은 베트남에 주로 귀양을 온 사람들이었는데, 체류 중에 교육이나 문학작품을 통하여 현지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91쪽

베트남 사회에 끼친 당 문화의 영향은 학문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두드러졌다.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도 생겨났고 당의 서울 장안에 가 고승으로 추앙받는 베트남인들도 나타났다. 이미 수세기 전부터 발달해 온 베트남의 불교는 당대에 이르러 베트남을 찾아와 영주하든가 인도나 동남아시아를 방문하는 길에 잠시 체류하는 중국인 승려들에 힘입어 더욱 융성해졌던 것이다.
많은 중국인 순례승들이 베트남을 서방으로 가기 위한 단순한 기항지로 생각한 데 비하여, 또 다른 일부 중국인 승려들은 베트남에 영주하면서 중국 불교를 전파했다.
-92쪽

당대에 베트남에 전파된 중국 불교는 유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지식계급만 믿었을 뿐 일반 대중은 여전히 토속신앙을 숭배했다. 베트남인으로 당 조정의 고위 관직에 진출했던 자는 845년까지 8명이 채 안 되었으며, 과거의 최종시험에 합격한 자도 10명이 못되었다. 당대에 베트남인 과거합격자의 숫자가 이처럼 적었다고 하는 것은 당 문화의 영향이 적어 당 조정에서 원할 정도로 그들의 학문적 수준이 높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당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데다, 당 조정 또한 이 지역에 중국 문화를 이식시키려고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다. 베트남인은 비중국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도호부 제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도호부는 중국의 정규 행정기구와는 다른 특수기관으로 그 주요 임무는 변경지방의 치안 확보에 있었다. 군사적인 문제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행정은 늘 등한시되었고 따라서 관직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94쪽

그러나 중국 문화는 개인들의 노력과 베트남으로 이주해 오는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해 300년 가까운 당의 통치 기간 동엔 베트남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사회 내부에는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 존재했다.
남조의 침입과 파괴적인 약탈은 일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집단의 위상을 높여 주었지만, 당의 세력은 곧 베트남을 지배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당에 저항하는 세력은 힘을 모아 베트남을 독립의 길로 이끌어가게 되었다.
-95쪽

안루산(안록산)의 난 이래 쇠퇴의 길에 접어든 당의 운명을 재촉한 황차오의 난이 가까스로 수습되는가 했더니, 곧이어 지방의 절도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당 조정은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그 통치는 이름뿐 이미 싸움을 조정할 능력이 없었다. 이처럼 중국 내정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 대하여 간섭할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96쪽

칭하이(청해) 절도사 류옌은 915년 후량에게 자신을 남 비엣 왕에 봉해 주도록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그 뒤부터 진공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917년에는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월이라 칭하고, 이듬해에는 한(곧 남한)으로 고쳤다. 923년 중원에서는 후량이 멸망하고 후당이 일어났다. 한편 남한의 류옌은 중원의 정세변화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북쪽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고는 종래 생각하고 있던 베트남 합병을 실현하기 위해 930년 마침내 원정군을 파견했다. 남한의 군대는 다이 라 성을 점령한 후 다시 남으로 진격하여 현재의 다 낭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참파의 수도로 쳐들어가 많은 보화를 약탈해왔다. 베트남의 병합은 남한의 오랜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는 1년이 채 못되어 끝났다. 남한의 지배가 홍 강 델타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지만 남부의 아이 쩌우와 호안 쩌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두 주(州)는 델타 지방에 비하여 중국 문화의 영향을 훨씬 덜 받은 곳이다.
남한의 베트남 공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938)
-98쪽

응오 왕조(939-965)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를 세운 응오 꾸옌. 아버지는 주의 목(牧). 하노이 서북쪽에 위치한 딴 비엔 산 근처의 홍 강 유역.
바익 당 강의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일천 년 넘게 이어져 오던 북속에서 해방되어 베트남인의 염원이었던 독립왕조 실현.
939년 왕위에 오른 뒤 행정중심지였던 다이 라 성을 버리고 어우 락 시대의 도성인 꼬 로아에 도읍을 정했다. 천도를 결심한 것은 민족의식 작용. 그러나 응오 꾸옌이 새 도읍에서 실시한 제도는 관리들의 관복 색깔까지도 중국의 것을 모방. 고유한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탓과 중국 문화에 익숙해 있었던 탓. 그의 한계성.
-102쪽

딘 왕조(966-980)
딘 보 린은 966년 황제를 칭하면서 중국의 천자와 대등함을 주장. 베트남의 진정한 독립이라고 역사가들 평가.
나라 이름을 다이 꼬 비엣이라 하고 도읍을 호아 르에 정했다. ‘꼬’는 쯔놈으로 고(古)와 통하여 ‘나라’를 의미. 다이 꼬 비엣은 ‘큰 나라 비엣’이라는 뜻. 1054년 리 왕조의 3대 왕 타인 똥이 ‘꼬’자를 빼고 국호를 다이 비엣으로 바꿀 때까지 이름 존속.
딘 보 린은 970년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타이 빈(태평)이라 정하고 다섯 황후를 두었다. 다섯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뜻하며, 각 지방의 강력한 세력집단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국내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전략. 상속권이 남녀 모두에게 동등했던 베트남 사회에서는 이런 결합을 통해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107쪽

딘 보 린은 문무백관의 직제를 만들어 공신들에게 포상. 관직 이름에서 당시 베트남 사회에 불교와 도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또 조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자오쾅인(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워(960)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세력 병합. 974년 딘 보 린은 송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한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국내 방비를 철저히 함. 후에 내분이 일어남. 이에 광시 성 융저우의 지주가 송 태종에게 상소하여 베트남 병합 권유. 진군.
-110쪽

띠엔 레 왕조(980-1009)
980년 레 호안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다이 하인 호앙 데(대행황제)로, 띠엔 레 왕조의 문을 열었다. 레 호안은 아이 쩌우 출신의 무인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인물.
송나라는 986년에야 비로소 그를 징하이 절도사에 임명하고 993년에는 다시 쟈오 찌 군왕에 봉해 주었다. 주목할 것은, 레 호안이 송 황제의 조서를 받들 때 절하기를 기피했다는 사실. 만족과 싸우다 다리를 다쳐 말에서 내리기 힘들다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신하의 예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북쪽 변경이 안정되자 레 호안은 남쪽으로 관심을 돌려 참파 원정에 나섰다.(982) 참파의 서울 인드라푸라에 쳐들어가 도성과 종묘를 파괴하는 한편,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궁중의 무희들과 인도인 승려를 포로로 붙잡아 귀환. 이런 유형의 전쟁은 베트남은 물론 전근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이들 나라에서 필요로한 것은 토지보다 인력이었기 때문.
-113쪽

레 호안의 침략 후 참파는 1000년 북쪽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쉬운 인드라푸라를 버리고 도읍을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빈 딘 근처의 비자야로 옮겼다. 남북으로 대외문제를 평정한 레 호안은 왕조의 권위를 드높이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내치에 전념. 984년 새로운 궁궐을 딘씨의 옛 궁전 가까운 곳에 짓도록 하고 티엔 푹이라고 하는 동전을 만들어 사용. 베트남 최초의 주화. 이전에는 중국 동전 사용.
본래 문신 습속은 고대 베트남인들 사이에 널리 행해져, 이들은 몸에 용 문신을 새기기도 하였는데, 후대로 갈수록 문신은 점차 왕실이나 금위군의 독점물이 되어 리 왕조나 쩐 왕조 때에 이르면 하층계급은 문신 불가. 그러다가 쩐 왕조의 아인 똥이 몸에 용의 자문을 꺼리자 이때부터 역대 황제는 문신을 하지 않음. 따라서 특권 신분의 표시로서 문신 관습 점차 사라짐. 그러나 이마에 하는 자묵은 그후 성격이 바뀌어 죄인들에게 행해짐
-115쪽

레 호안의 정책을 보좌한 사람은 딘 보 린 이래 정치고문을 맡아 왔던 광월대사. 승려들은 당시 사회 주요 지식층. 외국 사절과 시작(詩作)할 때 승려가 주관. 조정에서 승려의 권위 강함. 중국 기록에 의하면 1005년 레 호안이 송에 사절을 파견하여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진종이 하사했다고 함.
레씨 왕조는 30년이란 짧은 기간으로 종말을 고함.
-116쪽

리 왕조는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200여 년(1009-1225)이란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왕조. 국토의 대부분이 중앙정부의 직접적이면서도 완전한 지배 아래 놓여 있던 통일적 중앙집권적 국가라고 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견해. 최근 일부 외국 학자들은 리 왕조가 직접 지배했던 지역이 하노이에서 홍 강 델타의 서남부에 걸친 지역이었다는 주장 제기. 델타의 여타 지역에서는 각각 그 지방의 호족이 세력을 장악하고 델타 주변 산간지대는 소수민족의 반독립적인 토호국들이 존재했다고 함. 이렇게 본다면, 리 왕조는 우리나라 고려 초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방 호족 세력과의 타협 및 연합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리 왕조가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송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하는 사실은 정권이 대내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줌.
-117쪽

리 왕조의 건국자 리 꽁 우언(타이 또). 제위에 오른 뒤 다이 라 성으로 천도. 리 왕조는 각종 종교를 복합적으로 수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킴. 하지만 탕 롱 천도를 결정하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호아 르가 좁은 계곡 지대여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유리하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델타의 서남쪽에 치우져 있어서 경제적 중심지와 멀리 떨어졌기 때문. 게다가 호아 르의 지배층은 배타적인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리 왕조가 전국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려면 델타 중심부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집단과도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 타이 또는 민간신앙뿐 아니라 불교의 보호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음. 다른 리 왕조의 역대 황제들도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 장려함으로써 왕조의 영속을 꾀함. 따이 또는 지방의 행정체계를 개혁하기 시작. 새로운 조세제도를 만들어 세수의 확보에도 노력.
-118쪽

리 왕조의 쇠퇴. 조정의 관리들 부패. 관작 매매. 농민 수탈. 황제에게 아첨. 농민들 도적떼가 되어 각지 유랑. 지방 호족들 중앙에 반기 들기. 외부로부터 무력침략 빈번히 발생. 결정타는 쩐씨 세력의 대두를 가져온 콰이 쩌우와 당 쩌우 지방 세력의 반란.

-136쪽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수립된 쩐 왕조 역시 200년 가까이 장기 집권.(1225-1400) 쩐 왕조는 리 왕조와 자신을 차별화. 한편으론 리 왕조의 전통 계승. 왕위 계씅 부계제와 장자 상속제 엄격히 확립. 황제는 생존 중 태상황으로 물러앉고 장자를 왕위에 앉힘. 아울러 황태자의 황실근친혼, 다수가 아닌 한 사람의 황후 선택, 그리고 황태자의 조기 간택 등과 같은 관습 창안. 인드라 신과 어느 정도 뒤섞인 불교는 쩐 왕조 전시대를 통하여 리 왕조 못지않게 융성. 역대 황제는 불교를 보호, 선(禪)의 경지 추구하여 스스로 대사라 칭함. 13세기 후반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왕권을 보호하려던 경향 약화. 과거제도에 의해 선발된 유교적 소양을 쌓은 문신층이 서서히 정치 무대에 등장.

-139쪽

관리는 과거에 의하여 선발. 최초의 시험은 1232. 리 왕조 때에는 과거 부정기적 시행. 쩐 왕조에서는 1246년 이후 7년마다 실시하기로 규정되어 한층 체계 잡힘. 1247년에는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장원, 방안, 탐화의 칭호 줌. 그러나 중국에서처럼 회시까지의 3단계 시험은 쩐 왕조 말기인 1396년에 실시. 관료제의 확립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출신 관료의 영향력 미미. 쩐 왕조에서 권력의 핵심은 쩐 왕실의 친족인 왕공과 귀족으로, 이들은 행정과 군대의 고위직을 독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농노를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사병을 조직하여 훈련시키기도 함. 한편 몽골족이 발흥하여 북방으로부터 위협이 거세지자 군비 강화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사회 내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임. 쩐 왕조의 군대는 평상시 10만. 몽골 침입 때 20만까지 늘어남. 쩐씨는 어업으로 세력을 키워왔기 때문에 수군의 조직에도 많은 관심 보임. 그래서 몽골이 침입했을 때 해전에서 많은 전과를 거둠.

-143쪽

몽골은 처음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 데 주력했으나 곧 이어 남쪽으로 관심을 돌려 송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킴. 1252년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윈난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이듬해 이를 정복하자 몽골과 베트남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윈난 지방에 주둔하면서 인근의 민족들을 토벌하던 우리양카다이는 1257년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 쩐 왕조 거절. 몽골군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인 쩐꾸옥 뚜언(일명 쩐 흥 다오)에게 맡김. 식량 부족, 습한 기후에 몽골군 곧 철수. 쩐 왕조 반격에 나섬. 1257년 12월, 쩐 왕조는 이듬해 곧 사신을 몽골 조정에 파견하여 화약을 맺고 3년에 한번 입공할 것을 약속.

-144쪽

쩐 왕조 특유의 태상황제도는 제위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어린 황제에게 정치훈련을 쌓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울러 중국에 대한 조공을 태상황의 이름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중국 황제와의 대등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타인 똥의 치세 중에 쩐 왕조와 몽골과의 직접적인 무력충돌은 없었으나 쿠빌라이가 즉위하면서 몽골군은 베트남을 압박. 1260년 세조 쿠빌라이는 사절을 보내 이전의 3년 1공의 약정에 따라, 유사 의사 음양복서에 능한 사람들은 물론 금 은 주사 물소뿔 상아 진주 등의 공납을 요구하는 한편,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쩐 왕조의 내정 간섭하려 함. 1267년에는 다시금 베트남 왕의 친조, 왕자의 인질, 군역의 차출, 부세의 수납 등을 강요. 쩐 왕조는 화친정책을 취하여 코끼리를 헌납하고 왕자를 입조시킴. 그러나 원의 태도 더 강경해짐. 이렇게 고착상태에 빠졌을 때 교섭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유학의 소양을 쌓은 문사들. 조정 내 문사들 지위 점차 높아짐. 불교에 대한 비판 거세짐. 불교는 후대로 갈수록 대중들과 밀착하여 권력의 수호자인 유교에 대항하는 사회적 불만세력의 온상이 됨

-145쪽

유교경전을 배우면서도 쩐 왕조의 지식인이 자기네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음. 따라서 당시 ‘유자’라는 말은 유학자라기보다는 단순히 ‘지식인’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 오늘날 우리가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는 것처럼, 그들도 단지 베트남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참고문헌으로 중국의 고전들을 읽었던 것.

-146쪽

1279 남송 멸망. 원이 먼저 참파 공격. 참파는 남해 항로의 요충지로서 중국과 남해 사이를 왕래하는 모든 선박이 경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남해 연안의 나라들을 통합할 목적으로 1281년 참파에 행중서성을 두었다. 그러나 원의 행중서성 설치가 참파의 지배를 의미하는데다 남해 정벌에 필요한 식량까지 원이 강요하자 참파에서는 왕자 하리짓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원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원은 참파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베트남에 군대 경유지로서 길을 빌려달라는 것과 군량의 제공을 요구했지만 쩐 왕조는 거절. 참파 국왕이 산지로 도피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원군은 병력 부족으로 고전. 원은 쩐 왕조에 또다시 원군(元軍)의 베트남 통과와 쩐 왕조 군대의 출병 요구. 베트남 또 거부. 원군은 해로로 지금의 꾸이 년 부근에 이르렀지만 폭풍을 만나 큰 타격 받음. 쿠빌라이는 남방정책 포기 안 함. 육로로 참파를 점령하고자 1284년 아들 토곤으로 하여금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광시 성을 출발하여 베트남의 록 쩌우로 향하게 함. 당시 베트남 군대는 20만.

-148쪽

쩐 홍 다오가 이끄는 쩐 왕조의 군대는 토곤의 몽골군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1285년 초에 탕 롱이 함락됨. 쩐 왕조의 군대는 여러 곳에서 원군을 격파. 1285년 6월에는 다시금 탕 롱 탈환. 8월 토곤은 군대를 이끌고 퇴각. 몽골의 두 번째 침입도 실패로 끝남. 패배에 격노한 쿠빌라이는 당시 계획하고 있던 일본 원정을 포기하고 1287년 말에 다시 토곤에게 수륙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베트남을 침공하게 함. 이 싸움 역시 2년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 1288년. 원의 육군도 쩐 왕조의 복병에 큰 타격 입고 간신히 샛길을 통해 귀국. 년 똥은 원과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곧 사절을 보내 사죄와 아울러 조공을 바치는 한편,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장수들을 송환. 그러나 쿠빌라이는 만족하지 않고 새로 원정준비. 그러나 1294년 사망하는 바람에 실천에 옮기지 못함.

-149쪽

몽골과의 전쟁은 베트남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줌. 전쟁으로 사람들은 각지로 흩어지고 토지는 황폐, 1290년에는 기근마저 덮쳐 무수한 사람이 굶어 죽는가 하면 살아남은 자도 농토는 물론 처자식까지 팔아 연명하는 비참한 지경. 조정에서는 정부가 보유한 곡식을 방출하여 빈민군제에 힘썼으나 어려움은 쉽게 극복되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는 베트남인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줌. 수세기에 걸친 대외항쟁에서 형성되어 온 이들의 민족의식이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더욱 굳건해짐. 모든 사람이 쩐 왕실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싸웠다. 당시 공적으로 세운 장수들 중에는 평민 출신이 있었는가 하면 왕실과 귀족의 노복이었던 자들도 있었다. 산지의 소수민족 추장들도 이에 합세하여 쩐 왕조의 대몽항쟁에 큰 기여. 지배계급 중에는 적군에 항복하여 그들에게 협력한 자도 없지는 않지만, 전 베트남인이 단결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이런 단결은 쩐 왕실이 건국 초기부터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하려 했던 노력의 결실.

-150쪽

베트남인의 단결력에 더하여 전쟁을 승리고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쩐 흥 다오. 그는 천부적인 책략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적이 강할 때에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자 상황이 호전되면 전면 공격을 가하는 등 소수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베트늠 역사상 위대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몽골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민족의식은 민족문화 창달을 가져옴. 쩐 왕조의 과거제 정비 및 몽골과의 교섭 중에 활약한 문사들은 서서히 불승을 대신하여 지식층을 형성하고 많은 한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한문학 작품보다 주목할 사실은 쯔놈으로 쓰인 이른바 국어시의 발달이다. 이런 국어시의 유행은 한자와 한문에 대하여 속자나 속어라고 천시되던 민족 본래의 언어가 문학 언어의 지위까지 올라갔음을 의미. 이는 민족의식의 발흥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올라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민족의식의 발흥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국어시의 발달 덕분에 호 꾸이 리가 쯔놈을 조정의 공식 문자로 지정하게 됨.
-151쪽

년 똥의 뒤를 이는 아인 똥.
아인 똥 때의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일은 오늘날 북부 후에 평야가 있는 오와 리 두 주(州)를 참파로부터 획득한 것. 참파 왕 자야 신하바르만 3세에게 아인 똥의 누이 후옌 쩐 공주를 왕비로 주겠다고 약속. 이듬해 쩐 왕조는 약속에 따라 두 주를 할양받아 행정구역에 편입. 베트남의 영토는 사상 처음으로 오늘의 후에 부근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결혼한 지 1년 후 자야 신하바르만 3세가 죽자 공주는 인도의 서티(Suttee)를 받아들이고 있는 참파 풍습에 따라 분신하여 왕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으며 안 됨. 아인 똥은 조문을 구실로 사신을 보내 책략을 꾸며 공주를 구출. 자야 신하바르만 3세의 후계자인 자야 신하바르만 4세 분개. 베트남의 남쪽 변경 자주 침범. 아인 똥은 1312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참파의 수도 비자야 점령, 왕을 생포. 이리하여 참파는 쩐 왕조의 권위에 굴복했지만 양국 사이의 적대감 깊어감. 아인 똥은 관례에 따라 상황이 되고 아들 민 똥이 제위에 오름. 민 똥은 개혁을 시도하여 문무의 관등을 다시 조정하고 병사들이 해오던 문신 관습을 전면 금지. 중국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베트남 고유의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 중훅화하는 지배계층과 토착의 관습을 고수하는 농민 대중 사이에 점차 간극 발생.
-152쪽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왕실의 내분, 장원의 확대, 불교계의 부패, 참파의 침입 등으로 쩐 왕조 흔들리기 시작. 쩐 왕조는 처음부터 왕족이나 귀족에게 대토지 소유를 허락. 이들이 노예나 농노에게 미개간 토지를 개간시켜 사유화. 몽골과의 전쟁 때 공훈을 세운 공신들이 많은 촌락을 채읍의 명목으로 국가로부터 받고 있었기 때문. 사원 또한 왕실이나 귀족의 기부로 광대한 토지를 소유. 토지 없는 농민의 수 증가. 토지 가진 농민들은 세금이 가중되어 견디기 힘든 상황. 설상가상으로 대외적으로 참파가 끊임없이 남쪽 변경 괴롭힘. 쩐 왕실의 쇠퇴로 참파의 침범 빈번.
-154쪽

1371년 참파 왕 쩨 봉 응아가 홍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탕 롱을 침략하여 궁궐을 불 지르고 많은 보화 약탈. 응에 똥은 정치에 더 무관심해져 외사촌 레 꾸이 리, 즉 호 꾸이 리에게 맡겼다.
쩐 왕조가 참파와의 싸움에 휘말려 있는 동안 원을 대신하여 중국의 패자로 군림한 명 태조 주위안장(주원장)이 1368년 즉위하면서 그 사실을 베트남에 통고. 1384년 윈난 지방에서 일어난 소요를 계기로 명은 쩐 조정에게 군량 5천 석 제공 요구. 쩐 조정의 재정상태로는 무리였지만 받아들임. 명은 이듬해 사절을 파견하여 승려 20여 명 및 빈랑과 여지 같은 각종 남방식물의 묘목을 요구. 베트남에 대한 압력 점차 증대. 이런 가운데 참파 왕의 베트남 침공. 베트남 피해 막대. 특히 남부 지방 더 심함. 쩐 왕조의 재정 압박. 이를 보충하기 위해 1378년 인두세를 신설하고 모든 정남은 1년에 전(錢) 3관씩 납부하도록 함. 이전에는 소유 토지의 유무와 다과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토지가 없는 자는 면세 혜택을 받고 적게 소유한 자는 약간만 냈는데, 새로운 정세는 모든 정남에게 일률적으로 부과. 농민층 불만. 각지에서 반란. 승려들 가세.
-157쪽

호 꾸이 리가 베트남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새 왕조 건설의 꿈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 명은 1385년과 1386년의 요청에 이어, 1395년에는 광시 성 룽저우에서 일어난 반란진압을 구실로 군사 5만, 코끼리 59마리, 군량 50만 석 제공 요구. 같은 해에 승려와 여자 안마사 등의 파견도 요청. 그 이듬해 오늘날 랑 썬 지방에 해당하는 몇몇 지역이 중국땅이라고 우기면서 국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국내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신흥 왕조 명과 정면 대결할 상황이 아니었던 호 꾸이 리는 승려와 여자 안마사 등의 파견 같은 손쉬운 요구를 들어주면서 정면 충돌을 피했다.
호 꾸이 리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인 호아 지방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 천도를 감행. 1400년에 선양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쩐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호 꾸이 리는 베트남의 전설이나 불교에 의지하기보다 중국적 관료제와 유사한 방법으로 통치하려 했다.
-160쪽

제위에 오른 호 꾸이 리는 나라 이름을 다이 응우로 바꾸고 자신의 성을 레씨에서 본래의 호씨로 고쳤다. 나라 이름을 다이 응우라 한 것은 선양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찬탈행위를 고깝게 보는 신유학자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 실제로 그는 신유학을 비판하고 이전의 한당(漢唐) 유학을 선호. 호 꾸이 리는 11개월 뒤 쩐 왕조의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위를 아들 호한 트엉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중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력 강화. 국내 개혁이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자신의 지위가 점차 안정되자 호 꾸이 리는 남쪽의 참파로 세력팽창을 꾀했다. 이는 명의 침입 이전에 배후세력을 제거할 목적. 그는 참파 정부를 병합할 생각으로 1403년에 다시 20만의 군대를 보내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공격. 그러나 원정군은 비자야를 포위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식량부족으로 철수. 참파 왕은 베트남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명에 사절을 파견하여 도움 요정. 명은 전쟁 중지를 권유.

-164쪽

당시 명은 영락제가 집권하던 시기로 그는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쳐 1405년에 환관 정허(정화)에게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들을 원정하도록 명, 특히 당대까지 중국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병합을 추진. 하지만 명분 없이 출병할 수는 없어 구실만 노리고 있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옴. 우선 양국 사이의 국경분쟁. 광시 성 쓰밍 부의 타이계 추장 황광핑이 전에 자기의 영토를 호씨가 빼앗았다고 명에 호소. 여기에 참파가 사신을 보내 베트남이 명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시 침범하여 영락제에게 보낼 예물까지 약탈했다고 호소. 명은 곧 호씨에게 문책 사절 파견. 경고성 주의. 그러나 이보다 양국관계를 더 악화시킨 것은 호씨의 찬탈을 둘러싼 시비로, 명이 베트남을 침공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시와 윈난을 출발한 명의 원정군은 1년도 채 안되어 호군을 격파하고 호꾸이 리 부자를 생포. 명의 원정군은 1406년 겨울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공격 개시 2개월 만에 동도인 탕 롱과 호씨의 수도 서도를 점령. 베트남 지방의 말라리아를 걱정한 영락제는 명의 군대에게 서서히 진군하라고 명령했지만 명군은 도망치는 호씨 부자를 남쪽으로 계속 추격하여 1407년 여름에 이들을 하 띤 지역에서 붙잡아 난징으로 압송. 이리하여 호꾸이 리 정권은 7년 만에 무너지고 베트남은 독립한 지 400여 년 만에 또다시 중국 지배를 받게 됨.

-166쪽

베트남을 점령한 명은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알려졌던 이름인 안남을 쟈오 찌로 바꾸고 제국의 일부로 통치하면서 이전 베트남이 중국의 식민지였던 때와 같은 동화정책을 실시. 영락제는 베트남에 명의 지방제도를 도입하여 군사 행정 감찰의 삼권분립. 그러나 명의 베트남 지배는 순탄치 못했다. 명의 무력 점령과 동시에 각지에서 반항세력이 들고 일어남. 여러 반항세력 가운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쩐 응에 똥의 차남으로 알려진 쩐 꾸이를 중심으로 한 집단. 명은 베트남에 지배권을 재확립한 후 이를 영속화하기 위하여 행정체계를 정비하는 한편 문화적으로 동화정책 펼침. 경제기구의 증설은 명의 베트남인 착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베트남을 지배하려 한 가장 큰 이유가 전통적으로 경제적 이득에 있었다. 쩐씨의 반란세력을 진압한 뒤에는 그 수를 더욱 늘려 베트남인을 착취.

-168쪽

베트남인들은 명의 과중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것 외에도 둔전 경작이나 교량건설 및 축성 등에 노역 봉사를 함. 명의 식민정부는 건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베트남인들을 동원하여 통킹 델타의 수많은 수로 위에 다리를 건설했고 전략상 중요한 곳에는 성보를 쌓았는데, 이전 같으면 농한기는 베트남인들은 농사에서 해방되어 축제 등으로 생활의 여유를 즐기던 때. 교량은 명이 베트남을 통치하는 데 있어 교통과 통신의 편의를 위해 건설한 것. 다리 위로는 역마가 달리고 병력이 이동. 보급품이 수송. 명 조정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 문화를 보급시켜 중국식 예의를 익히게 하는 한편, 베트남 고유의 고나습은 ‘이속’이라 하여 금지. 남녀 모두 지난날처럼 머리를 짧게 깎지 못하게 했으며, 모든 여성은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를 입도록 가용. 또한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실시하고 베트남인이 관리로 임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줌.

-172쪽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동화는 명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명의 지배가 시작되어 10여 년이 지난 1419년에도 베트남인 관리나 학생 모두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베트남 고유의 고나습대로 장례 치름. 동화정책 실패 원인 중 하나는 명이 행정체제를 갖추긴 했지만 지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저항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었기 때문. 베트남 내에서 명의 군사력은 이미 약화. 1418년 타인 호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킨 레 러이. 오랜 저항 끝에 마침내 명의 군대를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되찾는데 성공. 이후 그는 베트남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왕조인 레왕조(1428-1788)를 세웠다. 20세기 후반 미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친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우상으로 떠받들 만큼 유능한 전략가였던 레 러이는 방비가 약한 명군의 보급부대나 전진기지를 공격하고는 증원군이 오면 즉시 산 속으로 후퇴하는 전술 구사.

-174쪽

영락제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인종은 베트남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무력 진압보다는 회유하는 방식 택함. 인종 다음의 선종 역시 무력 팽창보다는 문치에 의한 제국의 안정 도모. 군사력은 북방의 변경을 방어하는 데만 집중. 이런 명 정책의 전환을 호기로 삼아 레 러이는 1424년 9월 재차 반기를 들어 응에 안 지방의 명군을 격파. 이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그는 지방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음. 1425년 가을에는 서도와 응에 안 성을 제외한 남부 전역을 탈환하고 병력을 더욱 증강시켜 북방의 델타 지방으로 진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춤. 레 러이는 명의 증원군이 파병되자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함. 양측의 협상에서 명은 레 러이가 쩐 왕실의 후손을 찾아내어 그를 왕위에 앉힌다면 철군하겠다고 함. 명이 베트남을 침공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가 호씨를 징벌하고 쩐 왕조를 재건하는 것이었기 때문. 레 러이 수락. 이리하여 왕위에는 쩐 까오라는 인물이 옹립. 그는 쩐 응에 똥의 먼 조카뻘. 그러나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약속사항은 금방 이행되지 않음. 베트남 군대는 명의 구원군을 격파. 1427년 12월 호약을 맺고 철군.
-176쪽

레 러이는 이때 500척의 배와 수천 필의 말, 그리고 많은 양의 식량을 제공하여 명나라 군대의 철수를 도왔다. 베트남인은 항전 10년 만에 20년에 걸친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 달성.
1428년 봄 레 러이는 동 낀에서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전처럼 다이 비엣(大越)이라 하고 새로운 레 왕조를 세웠으니, 우리의 조선왕조가 창건된 지 36년째 되는 해였다. 쩐 까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도망을 치려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177쪽

명군이 철수한 뒤에 베트남에는 반명투쟁의 지도자였던 레 러이가 레 왕조를 세우고, 360년이란 긴 역사 동안 존속했다. 그러나 레 왕조가 번영한 것은 초기 100년뿐이고, 1527년에는 막 당 중의 찬탈로 일단 멸망했다. 레 왕조는 곧 부흥운동을 벌여 재건했지만 황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나라는 두 권문세가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어 내전이 계속.
새로이 왕조를 창건한 레 러이, 곧 타이 또(1428-1433)는 무엇보다도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베트남 사회를 재건하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행정체계의 확립과 토지제도의 개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행정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레 러이는 당시 심각했던 토지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쩐 왕조 시기, 특히 몽골의 침입 이후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가 크게 성행했고, 따라서 토지 없는 농민들은 농노로 전락했다. 사실상 레 러이가 명과 10년 동안 싸운 목적이 베트남인의 정치적 독립이었던 것과는 달리, 그를 도와 대명투쟁에 참가했던 농민들의 주요 관심사는 대토지 소유와 농노제가 종결되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데 있었다.
-182쪽

레 러이는 왕조의 개창과 함께 촌락의 모든 경작지를 토지대장에 등록시키고 균전법을 제정하여 이들 토지가 촌민들에게 균등히 분배되도록 했다. 인력의 확보는 생산의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건국과 동시에 호적 작성도 실시했다. 불승과 도사도 호씨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특권이 철폐되었다. 인력 확보는 물론 이미 시대가 불교나 도교보다 유교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외정책면에서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명에 사절을 파견하고 예물을 보냈다. 명은 레 러이를 왕이 아니라 ‘권서안남국사’로 임명했다. 이는 안남의 국사를 맡은 임시 통치자라는 뜻인데, 여하튼 양국관계는 이로써 일단 정상화되었다.

-183쪽

년 똥의 재위기간 중에 주목할 만한 법령이 반포. 1449년. 사유재산의 소유와 재산의 상속문제 등을 다룸. 이 법령에 의하면 가족재산은 남편의 재산, 처의 재산, 부부 공유의 재산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재산은 부부가 사망하면 자녀들이 서로 똑같이 나누어 갖게끔 했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재산이 가족의 공동소유이며 상속권은 아들에게만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베트남의 제도가 중국보다 훨씬 근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현존하는 베트남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국조형률’을 편찬. 이 법은 이후 레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기본법이 되었다. 그 체제와 내용은 당률을 근간으로 하면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했다.

-186쪽

레 왕조시대 베트남 사회에서 딸은 아들과 똑같이 재산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없으면 딸은 제사 상속도 했다. 또한 부인에게는 일정 기간 동안 남편이 저버리고 돌보지 않을 경우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이런 여러 사항들을 보면 타인 똥의 법에서 유교적인 ‘여필종부’의 관념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효의 관념도 중국법과는 많이 다르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부모 생존시에 아들은 독립된 가정을 이룰 수 없지만, 타인 똥의 법은 이를 인정했다. 결국 베트남 가정에서 가장은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가족성원간의 개인주의적 경향이 상당히 강했고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높았다.
유교는 레 왕조 시대의 베트남 사회에서 지도이념으로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자연히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타인 똥은 민족문화의 창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쪽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확립한 타인 똥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변국가들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했다.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점령, 왕을 생포. 타인 똥은 남방 정벌을 승리로 이끈 뒤 서쪽으로도 정벌을 나섰다. 다이 비엣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했고 인근 주변의 소수민족들은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레 왕조의 영광은 타인 똥 때를 절정으로 하여 그의 사후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후 300년 가까이 존속했지만 왕실의 권위는 명목상일 뿐. 16세기 초에는 막(莫)씨가 제위를 찬탈했고, 막씨가 쫓겨난 다음에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쇼군에 비견되는 ‘쭈어(主)’라고 불리던 ‘찐(鄭)’씨와 응우옌(阮) 씨에 의해 왕조는 남북분열 상태에 빠지고, 레씨는 겨우 황제의 이름만 지켰다. 각지에서 반란 빈발. 1527년, 레 러이 이래 9대 100년 동안 지속된 레 왕조의 정통은 끊겼다.

-196쪽

막씨의 찬탈로부터 18세기 말 레 왕조의 멸망까지 2세기 반 동안 베트남의 국내정세는 분열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막씨가 권력을 장악한 지 얼마 안 되어 찐과 응우옌이 레 왕실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막씨가 쫓겨나자 이들 두 집안은 서로 대립하여 끝내는 나라를 남북으로 분열시켰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농민들. 중앙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대다수 농민들은 세력가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빈번한 자연재해로 기아에 허덕였다. 일부는 땅을 찾아 타향으로 이주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는 도적의 무리가 되어 약탈을 자행.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농민 반란은 격렬해졌으며 결국 레 왕조는 멸망했다.

-200쪽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전쟁은 찐과 응우옌 양씨로 하여금 16세기 후반의 막씨나 레씨와 마찬가지로 군사력 강화에만 전념케 했다. 오랜 전란과 군사 위주의 정책은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찐씨 지배하의 농민들은 고향을 멀리 떠나 장기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고, 인구와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남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진지의 구축 등의 일에 자주 동원되고 또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다. 응우옌씨는 전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개간을 장려하고 토지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 이외에, 인두세를 제정하고 금과 은에는 특산물세를, 그리고 선박에는 상선세를 새로 부과했다. 관리들의 착취도 농민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문제였다. 중앙정부가 전쟁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급한 지방관리들의 농민에 대한 횡포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209쪽

19세기 이전 베트남의 역사는 ‘북거(북(北)拒)’와 ‘남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남으로의 진출, 더 정확하게 말해 ‘팽창’은 베트남 역사에서 북쪽 중국의 침입에 대항하는 것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파는 중국 지배의 초기부터 1470년 레 왕조 타인 똥의 원정 이전까지 끊임없이 베트남의 남쪽 변경을 침입했다. 그러다가 타인 똥의 원정 이후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다. 타인 똥의 꽝남 도(道) 설치는 베트남 영토의 확대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곧 이 지역의 베트남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은 응우옌 호앙이 후에 부근에 정착하여 근거지를 마련할 때까지 베트남인 범죄자의 은신처 또는 유배지에 불과했다. 실제로 타인 똥은 1470년의 참파 원정 이유들 중의 하나를 베트남인 도주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베트남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중부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었다. 북에는 중국이 있고 서쪽은 산간지역에다 말라리아가 극성이었고 동쪽은 바다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216쪽

응우옌씨는 참파를 남으로 계속 압박하기보다는, 우선 점령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주민들을 이주시켜 이들로 하여금 토지를 개간하고 촌락을 이루도록 독려했다.
응우옌 푹 응우옌이 1610년대 말 그의 딸과 캄보디아 왕자의 결혼 제의. 타이의 압력을 받고 있던 캄보디아 왕은 힘의 균형을 위해 제의를 받아들임. 이를 계기로 응우옌씨는 1623년 현 사이공과 쩌 런 일대에 해관(海關)이 설치를 허락받음. 사이공은 당시 이미 중요한 교역 중심지. 이 무렵부터 남북 대립의 피해자인 베트남인 범죄자, 빈민, 부랑자들은 캄보디아인과 더불어 살며 토지를 개간. 응우옌씨가 이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계기는 1658년 캄보디아 궁중의 내분을 빌미로 군사 개입을 하면서부터. 응우옌씨는 군대를 보내 이듬해 왕을 포로로 잡고 도읍인 우동을 약탈. 응우옌씨가 메콩 강 하류지역에 진출하는 데는 중국인들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219쪽

응우옌씨가 남부지방으로 진출한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넓은 평야지대였기 때문. 이 지역의 잠재적 생산력은 홍 강 델타에 경제적 기반을 둔 북쪽 찐씨에 비해 경제력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응우옌씨에게 큰 매력. 그리하여 캄보디아 내정에 간여하여 영토를 할양받은 응우옌씨는 이 지역 개발에 열성을 보임. 남부 개척지에 대한 정착사업은 처음 중국인들에게 맡겨졌다가 곧 응우옌씨 조정에 의해 점차 조직적인 방법으로 행해짐. 중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을 이주. 전쟁이 끝나자 불필요하게 된 병사들을 동원해 촌락을 건설.
응우옌씨의 칭호는 처음 총진으로 일컬어지다가 응우옌 푹 쭈 통치기인 1693년 이후에는 국주(國主)로 개칭되었으며, 응우옌 푹 코앗의 시대인 1744년에는 국왕이라 불렸다. 그러나 응우옌씨는 국호와 연호는 세우지 않고 레씨의 정삭을 전과 다름없이 받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이를 광남국이라 불렀고, 유럽인들은 코친차이나라고 했다.
-224쪽

리왕조 때에는 개국과 동시에 사찰을 창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욯나 일이었고 또 각 지방에는 지방 수호신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는 것이 일반적. 응우옌 호앙의 사찰 창건은 레왕조 이전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듯했다. 레왕조가 도읍인 탕 롱에 사찰을 창건하지 않은 것은 14세기부터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 유교가 호씨와 명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홍 강 델타를 중심으로 강화되어 더 이상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념이 아니었기 때문. 응우옌 호앙이 설정한 불교이념은 후계자들에 의해 충실히 지켜져 응우옌씨 정권 말기까지 변화가 없었다.

-226쪽

1771년 응우옌씨 지배하에 꾸이 년 부근 떠이 썬(西山) 마을에서 응우옌씨 3형제가 일으킨 반란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응우옌씨와 찐씨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 세기 반 동안 지속되었던 남북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들은 곧 이어 레씨 왕조도 멸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오늘날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이라고 불리는 떠이 썬 운동, 즉 떠이 썬 당(黨)의 난이 20년도 채 안 되어 베트남을 다시 통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던 농민들이 지배층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
찐씨 지배하의 18세기 북부 베트남에서 농민들은 관리나 귀족의 토지 겸병, 조세의 증가, 자연재해로 인해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왕조 말기에 자주 발생한 자연재해는 관료층의 무능과 부패로 관개시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게 그 원인이 있었다.
-229쪽

응우옌 반 냑, 응우옌 반 르, 응우옌 반 후에의 3형제가 일으킨 반란은 훨씬 조직화되어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판치던 응우옌씨 정권으로서는 이를 진압하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반란 초기의 주축은 농민, 특히 가난하고 토지 없는 자들이었으나 난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산지소수민족, 승려, 도시상인, 하급관리, 학자, 중국 천지회의 일파 등도 가세.
1771년 시작되어 이후 30년간 지속된 떠이 썬 운동.
곤경에 처한 응우옌 푹 아인은 외국의 원조를 생각. 첫 번째로 시도한 필리핀과의 접촉은 실패. 사이암에 군사원조 요청. 방콕 왕조의 창건자인 라마 1세는 2만의 군대와 300척의 전함을 보냈는데, 이들 군대는 약탈을 자행하면서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킴. 응우옌 반 후에는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사이암의 군대를 미 토 부근에서 기습하여 혁혁한 전과 올림(1785). 사이암의 병사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3천에 지나지 않음. 이보다 조금 앞서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이미 늦음.
-234쪽

청의 건륭제는 양광총독 쑨스이의 권유에 따라 베트남에 원정군 보내기로 결정. 청군의 침입에 직면한 응우옌 반 후에는 베트남의 합법적인 지배자로서 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 쭝이라 했다.
레 러이가 명의 군대를 물리치고 세운 레 왕조는 마지막 지배자가 청으로 달아남으로써 막을 내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240쪽

하이 번 관 이북의 주인이 된 꽝 쭝 황제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도읍을 중앙에 위치한 푸 쑤언에 두고 응에 안에도 수도를 새로 건설했다. 오랜 남북전쟁으로 농촌은 기반 자체가 붕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촌락의 재건 없이 정권을 유지하기는 불가능.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에도 주의를 기울여 토산물에 대한 세금을 면제 또는 감면. 상거래가 원활해지도록 새로운 동전을 주도. 유럽과의 무역 역시 장려. 그의 통치기간 중에 가톨릭 선교사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설교를 할 수 있었다. 또 학문과 예술과 문화의 융성, 특히 독자적인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 한자 대신 쯔놈을 공식 문자로 지정. 과거시험에서도 시문은 쯔놈으로 지어야 했고, 사서삼경을 쯔놈으로 번역시킴. 쯔놈의 강조는 전통적 지배계층의 한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18세기의 사회적 혼란과 함께 쯔놈의 사용이 광범위해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로 18세기 농민반란의 격문들은 쯔놈으로 쓰였다. 쯔놈으로 쓰인 문학작품은 주로 인간의 애정과 권선징악을 노래하며, 부패하고 악랄한 권세가나 부자와 가난하고 정직한 농민을 대비시킴.

-242쪽

1792년 9월 꽝 쭝이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떠이 썬 운동에서 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응우옌 꽝 또안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었고, 이듬해에는 형 응우옌 반냑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떠이 썬 정권의 세력은 급격히 기울었다. 떠이 썬 세력의 쇠퇴를 틈타 응우옌 푹 아인이 쟈 딘 지방에서 지주와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계절풍을 이용하여 북쪽의 떠이 썬 군대에 몇 차례 공격을 가하여 1801년 푸 쑤언을 빼앗고, 1802년에는 탕 롱까지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떠이 썬 운동은 발발로부터 30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45쪽

응우옌 푹 아인은 1788년 쟈 딘을 점령한 뒤 14년 간의 투쟁 끝에 1802년 베트남의 통일을 완성하고 최후의 전통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수립했다. 이후 응우옌 왕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까지 명맥을 유지했지만, 왕조의 성립 과정에 참여하게 된 프랑스 세력의 침입에 의해 이미 1860년대에 절름발이 상태가 되었고, 1880년대에는 완전히 주권을 빼앗겨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얼마 전까지 하노이 학계는 응우옌씨 왕조가 외세를 끌어들여 농민운동을 진압했으며, 국가의 주권까지 상실케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이라는 19세기의 어려운 시기에 응우옌 왕조가 80년 동안 독립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존재 의의가 충분하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어쨌든 응우옌 왕조에 이르러 베트남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국가를 이루게 되었고, 지배이념으로서의 유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베트남 사회, 특히 북부와 중부에서 그 영향을 넓혀 갔다는 건 사실이다.

-246쪽

1802년 5월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푸 쑤언에서 연호를 쟈 롱(嘉隆))이라 정했으나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쟈 롱이란 쟈 딘에서 탕롱까지라는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말한다. (용(龍)과 륭(隆) 두 글자의 베트남어 발음은 같다. 또 실제로 그는 얼마 안 되어 랑 롱의 용을 륭으로 바꾸었다.) 응우옌 푹 아인의 북진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진행되어 한 달 만인 7월 20일 탕 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영토를 포괄하는 베트남 최초의 왕조가 성립된 것. 응우옌 푹 아인은 1803년 사절을 청조에 보내 자신을 국왕에 봉해줄 것과 국호를 ‘남 비엣(남월)’으로 해주도록 요청했다. 청조는 남 비엣이란 이름이 예전 번우에 도읍하여 광둥과 광시를 포함했던 쩌에우 다의 남 비엣국을 상기시킨다는 이류로 승인 거부. 이듬해 청은 남과 월의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 월남(비엣 남)이란 이름을 제시했고 응우옌씨도 이를 수락하여 오늘날 베트남이란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249쪽

비엣 남이란 국호가 승인됨에 따라 그는 비엣 남 국왕에 봉해졌다. 수도는 오랫동안 정치의 중심지였던 탕 롱 대신 응우옌씨의 본거지였던 푸 쑤언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곳이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집권화에 유리하고 또 탕 롱에 기반을 둔 구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그러나 응우옌 왕조는 남북 어느 쪽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북부는 이전 응우옌씨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남아 있었고, 남부는 베트남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되어 문화적 이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249쪽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쟈 롱(1802-1819) 황제는 통치기구 정비에 힘씀. 궁극적으로 황제의 권력 절대화, 강력한 중앙집권화 및 통일된 행정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지만, 왕조 초기의 사정을 고려하여 급격한 개혁 단행하지 않음. 응우옌 왕조의 중앙과 지방 행정제도는 청의 제도를 많이 모방함. 대외적으로 쟈 롱 황제도 대대로 추구해 온 남방에 대한 팽창정책을 펼쳤다. 캄보디아는 베트남에서 찐 응우옌 양씨가 대립하는 동안 남쪽의 응우옌씨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베트남이 내란에 휘말려 혼란스러울 때 방콕 왕조의 압력이 거세지자 이번에는 방콕 왕조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쟈 롱 황제는 창업 군주로서 18년 동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그의 치세 동안 주로 북부에서 105건 이상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의 정책은 후계자 민 망 황제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

-250쪽

민 망 황제는 유학을 존중하면서도 중국에 대하여 누구 못지않게 대등한 태도를 취함. 비엣 남이란 이름이 중국의 승인을 받아 지어져서인지, 그는 비엣 남이란 국호 대신 ‘다이남’(大南)을 썼다. ‘다이 남’이란 중국이 북쪽에 위치한 나라라면, 자기네는 남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양자는 동등하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민 망 황제는 대외적으로도 공세를 취해 인접한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하여 침략적인 팽창정책을 썼다. 사실상 그는 중화사상에 기초하여 주변 민족들을 이적시하고 응우옌 왕조를 종주국으로 생각했다. 민 망 황제 치하에서 반란은 230건 이상에 달해 연평균 11건이 일어났다. 민 망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후 유학 교육을 통해 문화적으로 남부를 중앙 조정에 통합시키려고 했다.

-255쪽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이후 대거 동양으로 진출하게 된 유럽인들은 18세기 말까지는 대개 상인이나 선교사였다. 이들 유럽인이 베트남을 처음으로 방문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찐씨와 응우옌씨 두 집안이 남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1540년경 베트남 중부 해안에 이르러 호이 안을 중심으로 교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이 안은 응우옌씨의 대외 무역항으로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명나라의 해금 정책이 1567년에 해제되어 중국인의 남해무역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왔던 것이다. 이들은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된 틈을 타 남북간의 교역에 종사하여 이득을 얻었고, 또한 명과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이용하여 호이 안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266쪽

일본인들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주인선제도의 창설에 따라 해외로 크게 발전하여 호이 안에 일본인 거리를 형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630년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쇄국령의 반포로 베트남과의 무역이 중단되자 일본인들은 유럽 상인의 통역 겸 중개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응우옌씨에게는 대포 제작법을 가르쳐 주었다. 1619년에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건설한 네덜란드인들은 1630년대에 베트남에 등장한 이래 1636년 호이 안에 자기네 대리점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북쪽의 포 히엔과 탕 롱에도 대리점을 두었다. 남부의 무역 중심지가 호이 안이라면, 흥 옌은 각국 상인들이 찾아오는 북부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267쪽

영국은 1613년에 처음으로 응우옌씨와 교역을 시도했다가 불행한 실패를 맛보았다.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은 무역보다도 선교활동에 있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시작된 유럽의 베트남 무역이 17세기 말 이후 크게 후퇴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찐씨와 응우옌씨의 대립이 중단되고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두 집안은 서양인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들을 유치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무역 쇠퇴의 또 다른 이유는 베트남 시장의 협소성이다. 많은 농민들이 빈곤에 시달리는데다가 생활이 질박하여 외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다.

-268쪽

상인의 뒤를 이어 베트남에 등장한 유럽인은 선교사였다. 이미 16세기 중엽 이래 몇몇 선교사가 베트남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포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 예수회 선교사들이 파견되면서부터다. 마침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금지되어 마카오에 거점을 두고 있던 예수회는 새로운 포교지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프랑스의 아비뇽 출신인 로드 신부는 베트남에 온 당대의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한 마테오 리치가 포교를 위해서 먼저 중국어 공부를 했듯이 그도 1624년 응우옌씨 지배하의 남부 베트남으로 가서 베트남어 학습에 주력했다. 그런 다음 1627년에 북부 베트남에 들어가 1630년 추방될 때까지 3년 간 머무르면서 6.700명을 개종시켰다. 마카오로 갔던 그는 1640년 남부 베트남으로 되돌아와 부소미의 직을 물려받고 선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645년 응우옌씨에 의해 또다시 추방된 후 로마로 돌아갔다.
-269쪽

그는 포교를 돕기 위해 ‘통킹의 역사’를 쓰고, 라틴어와 베트남어 대역으로 된 교리문답과 ‘안남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사전’을 만들었다. 뒤의 두 책에서는 처음으로 베트남어의 로마자화가 시도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꾸옥 응으(국어)의 모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선교사들은 종교보다 베트남어의 로마자화를 통해서 베트남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새로운 글자를 만든 이유는 자신들이 베트남어를 배우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이를 통해 쉽게 글을 익혀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70쪽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력이 점증할수록 베트남측의 박해도 격렬해졌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베트남에 숨어들거나 아니면 이웃 캄보디아 또는 막씨 지배하의 하 띠엔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17세기 말에는 베트남 내의 정치문제에도 개입하여, 1802년 응우옌씨 왕조가 성립된 뒤에는 마침내 포교의 자유를 얻기에 이르렀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원료의 구입과 생산품의 판매를 위한 시장의 확보가 필요해짐에 따라 유럽의 나라들은 19세기를 전후하여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중대 위협은 북방의 대륙에서 왔으며, 남쪽 바다로부터 온 적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응우옌 왕조는 대(對) 중국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나,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유럽인에 대해서는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따라서 나라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서구와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군사적 침략과 가톨릭 선교사의 포교활동을 꺼려 했다. 동시에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때로는 서양문물을 모방하려는 노력도 했다.
-271쪽

1836년의 칙령에 의하면, 선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았으며, 선교사를 숨겨주는 자는 극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는 계속 늘어갔다. 물가의 앙등, 빈번한 자연재해, 감시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베트남의 긴 해안선과 불교의 쇠퇴 등이 가톨릭 신자의 증가를 가져온 주요 원인이었다. 격렬한 배외사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 망 황제는 서구의 침략을 경계하면서 그 문물과 기술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서양의 근본적인 과학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형만 모방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민 망 황제는 통치 말년에 서구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유럽 국가들과 접촉의 길을 모색했다. 1839년 중국의 아편전쟁은 그에게 서구 제국주의가 베트남에도 곧 작쳐오리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1848년부터 1860년까지 처형당한 사람은 유럽인 선교사가 25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 그리고 평신도가 2만 명 이상에 달했다.
-273쪽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 아래 해외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베트남에 대해서도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 침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가톨릭 교회와 상공업자 및 해군이었다.
1858년 청국과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 방면에 있던 해군의 이동이 가능해진 프랑스는 13척의 전함과 2500명의 병력을 다 낭으로 파견.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음.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 우선 응우옌 찌 프엉의 방어가 예상 외로 견고하여 후에로 진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중부의 강 대부분이 너무 얕아 육중한 유럽의 군함이 항해하기 어려웠다. 때마침 이질과 콜레라 및 괴혈병 등으로 많은 병력을 잃은 데다 우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전투를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베트남 군대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275쪽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대립. 전자는 가톨릭 문제에 강경하면서 현실적 무렵보다는 도덕성을 중시. 후자는 유럽 무기의 우월성과 장기간의 투쟁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을 이유로 가톨릭 문제 때문에 협상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입장. 그러나 이들은 모두 프랑스가 영토는 점령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무렵 통킹 지방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나 후에 조정을 괴롭혔다. 북부는 레 왕조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응우옌 왕조는 이들 반란이 통킹 지방 사람들의 레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들 반란과 프랑스군의 공격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한 응우옌 조정은 우선 내란을 평정하기로 결정하고, 그래서 프랑스와는 협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862년 6월 5일 이른바 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 조약의 주요 내용은 베트남이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과 콘 썬 섬을 프랑스에 할양하며, 다 낭, 바 랏, 꽝 응우옌의 세 항구를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에 개항하고 은 400만 량의 배상금을 10년 내에 지불한다는 것 등 전부 12개 항목.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삼음.

-278쪽

전통적인 보수세력에 의해 지배되면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무감각했던 후에 조정은 코친차이나 6성을 상실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단순히 충격으로 끝나 버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적극적 개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서구 지향적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응우옌 쯔엉 또를 들 수 있다. 그의 개혁의 주요 내용은 첫째가 관료제도의 개편. 관리의 수를 줄이고 대신 봉급을 올려 부패를 막도록 건의. 서구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행정과 사법의 분리 주장. 군사학교를 세우고 외국인 교관을 초빙하여 장교를 훈련시켜 근대식 군대의 창설을 돕게 하자는 것도 주요 건의사항. 이들 계획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조세제도의 개혁 주장. 지주를 포함한 많은 특권층을 과세 대상자에 포함시키고, 사치품에 세금을 부과하며,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자는 것 등 또한 그가 제안한 건의의 주요 골자. 교육방면에서 과거시험에 실용적 기술과목을 추가하고 한자 대신 쯔놈을 사용하여 일반 농민들이 쉽게 깨우칠 수 있게 하고 신문을 발간하여 보급, 유학생 해외 파견 주장. 1868년에는 닌 빈 출신의 딘 반 디엔도 유사한 개혁안 제기. 이들의 주장이 당시로서는 과격한 면. 세력을 쥐고 있던 보수 진영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이런 개혁들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281쪽

후에 조정이 개혁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상황에서 남부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는 두 번째 단계로 이번에는 방향을 선회하여 북부의 통킹 지방에 대한 공략 감행. 베트남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목적 중의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로 올라가 중국 서남부의 윈난 성에 이르는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때마침 통킹 지방에서 응우옌 왕조의 권위가 실추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침입은 한결 쉬워짐.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진압되자 그 일부튼 통킹에 침입하여 약탈. 약체화된 응우옌 왕조는 자력으로 이들을 몰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조에게 토벌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 그러나 파견된 토벌군은 이들 무리를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농민들에게 피해만 입혔다.

-283쪽

1874년 3월 제2차 사이공 조약(일명 갑술조약) 체결. 응우옌 왕조는 코친차이나의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 인정. 1884년 초까지 베트남에 파견된 총 병력은 1만 6500명.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후에 조정은 이에 적극 대처하기보다 오히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혼미상태에 빠짐.
베트남과 프랑스의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베트남의 종주국으로 행세해 온 중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 아르망 조약이 체결된 직후 청조는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는 베트남의 여하한 국제조약도 무효임을 선언.
-286쪽

1884년 5월 리훙장(이홍장)은 청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측의 대표와 톈진에서 강화조약 맺음(제1차 톈진조약). 이 조약에서 중국은 통킹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즉시 철수시키고,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기존의 조약들은 물론 앞으로 체결될 조약들까지도 존중하기로 약속. 반면 프랑스는 중국의 남쪽 국경을 보장해 주고 필요한 경우에는 보호도 해주기로. 청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해 주자 베트남 조정에서는 리훙장에 대한 비판. 마침 쭤쭝탕이 군기대신에 임명되면서 청은 프랑스에 대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 더욱이 중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예기치 않은 충돌 발생. 아직 철군명령을 받지 못한 청군의 공격을 받아 400여 명의 부상자 발생.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한 배상으로 청에게 2억 5천만 프랑 요구. 청나라 거절. 프랑스 선전포고. 전쟁 재개(청불전쟁). 프랑스 함대는 즉시 푸저우(복주)에 정박 중인 청국 함대를 급습하여 전멸. 타이완 공격. 닝보를 봉쇄하는 한편 펑후도 점령. 이후 전쟁은 교착상태. 양측은 협상 시작. 1885년 6월 리훙장과 파트노트르 사이에 수호통상화평조약(2차 톈진조약 또는 월남신약) 체결. 응우옌 왕조는 청불전쟁 후에도 여전히 존속했지만 명목상.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모든 영토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프랑스 관리들의 통치를 받았고 후에의 황제는 의례적인 행사에만 참여.

-293쪽

1885년 청불조약의 체결로 이제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베트남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제일 먼저 점령한 코친차이나는 식민지로, 그리고 안남과 통킹은 보호령으로 하여 베트남을 통치했다. 코친차이나 총독은 본국 식민부의 지시를 받게 하고 안남과 통킹에는 고등 주차관을 두어 외무부 관할 아래 두었다. 1887년에는 세 지역을 보호국인 캄보디아와 함께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만들어 식민부로 이관시키고 총독이 다스리게 했다. 또한 1893년에는 보호령인 라오스, 1900년에는 조차지인 광저우만이 인도차이나 연방에 추가되었다. 이에 앞서 1888년 프랑스는 하노이와 하이 퐁 및 다 낭을 통킹과 안남에서 분리시켜 코친차이나처럼 직할 식민지로 만들었다.

-294쪽

감찰관들 외에 통역관과 무역업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했다. 감찰관과 베트남인 관리 및 소송인 사이에 통역은 필수적이었다. 통역관은 프랑스어에 능통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프랑스인과 인도인이었고, 그 밖에 가톨릭을 믿는 소수의 베트남인도 있었다. 이들은 행정과 재판에서 실제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힘없는 농민들을 착취했다. 무역업자들이란 프랑스 점령 후 쌀 수출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한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1887년 형성된 인도차이나 연방은 이름뿐이고 코친차이나가 거의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한편 통킹이 보호령임에도 불구하고 안남에서 분리되어 플아스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 것은 끊이지 않는 통킹 지방의 저항에 대해 무력행사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296쪽

1900년 이전 베트남인의 저항운동은 전통적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정신과 유교적인 충성심의 결합 속에서 전개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 그러나 1920년대 중반까지도 지도자들은 역시 전통적 지식층 출신.
베트남인의 저항은 프랑스의 침략과 동시에 시작. 당시 대불 항쟁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쯔엉 딘.
1867년 이후 프랑스 세력과 협력하려는 사람들이 급증. 이들 중 많은 수는 가톨릭 신자.
-310쪽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하는 저항의 무대는 중앙의 후에 조정으로 옮겨 감. 이는 근왕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으로 퍼져 나감. 베트남 각지에서 황제의 호소에 부응하여 지방의 학자와 지주들이 농민을 이끌고 항불투쟁을 전개. 그러나 이들 저항은 1888년 11월 함 응이 황제가 체포될 즈음 거의 사르가들었다. 프랑스측은 함 응이 황제가 후에를 탈출하자 4월에 뜨득 황제의 둘째 양자인 응쑤이를 맞아들여 동카인 황제로 삼고, 11월에는 신호(神毫)들을 달래기 위한 조서를 발표, 함응이 황제의 망명정부를 불법으로 규정, 동조자들을 역적으로 몰았다.
프랑스 정부는 강압적인 수단 대신 융화정책 사용. 항복한 문신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자 프랑스 군대의 우세한 무력 앞에 열세를 면치 못했던 저항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투항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함응이 황제는 1888년 11월 산지의 소수민족 지도자인 쯔엉 꽝 응옥의 밀고로 체포, 알제리로 유배.
-312쪽

그러나 판 딘 풍과 호앙 호아 탐 두 사람은 이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에 저항.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위정척사운동을 연상시키는 이 근왕운동에는 종교적 반감과 인종적 대립감이 동시에 작용. 운동의 목표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외래 종교를 타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 이로 인해 수많은 베트남인 가톨릭 신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 근왕령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저항운동이 봇물이 터지듯 일어났지만, 지방의 하급관리나 향촌사회의 지배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저항운동의 지도자들은 맹목적인 충성심만을 내세웠을 뿐, 조직력이 부족하여 지역적인 연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314쪽

1860년부터 1885년 사이에 태어나 1900년경부터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신세대는 유교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자 외부로부터의 영향 아래 점차 근대사상을 흡수하기 시작하는 첫 세대. 이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신서(新書)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민족주의에서 베트남 문제이 해결방안을 찾음. ‘신서’란 1900년 전후 중국에서 들여온 양무사상과 변법자강사상에 관련된 책을 가리킨다. 서구의 언어를 잘 모르던 베트남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서구의 사상에 눈을 뜨게 했다.
-317쪽

반식민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책의 하나로 꼽히는 ‘월남망국사’는 베트남 최초의 혁명적 역사서. 판 보이 쩌우는 여기에서 응우옌 왕조의 무기력과 외세의 위협에 대한 뒤늦은 대응을 한탄하면서 근왕운동 시기의 영웅들에 대해 생생히 기록. 또한 프랑스의 억압적인 사회경제정책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 모든 계층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반식민 전선의 결성을 촉구.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되어 독립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판 보이 쩌우는 학생들과 끄엉 데를 일본으로 데려감. 일본 유학생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1908년에는 200명을 넘었다. 베트남 학생의 이런 일본 유학을 가리켜 동유운동이라고 한다. 당시 유학생의 절반 이상은 남부 출신으로, 이들은 북부나 중부 출신과는 달리 비정치적이며 일본 유학을 프랑스 유학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차이는 이후 동유운동이 좌절되는 한 내적 요인이 되었다.
-320쪽

판 보이 쩌우는 무장봉기를 해야만 베트남이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판 보이 쩌우가 무장봉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해외에서 분주히 활동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문신 집단은 국내에서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다. 이들은 프랑스를 당면의 적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봉건적 군주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정치 경제상의 개혁을 하려 했다. 대표 인물 판 쭈 찐.
판 쭈 찐은 베트남이 근대화하지 못하면 당장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국 또 다른 식민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고 생각. 판 쭈 찐의 주의와 주장은 진보적인 문신들에게 상당한 영향 끼침.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동경의숙.
-322쪽

1907년 하노이에서 문을 연 동경의숙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 의숙을 모방하여 만든 일종의 사립 학교.
성년과 청년을 불문하고 누구나 학생으로 받아들였고 여성에게도 입학 허가. 학생 수는 거의 천 명. 학교 운영자금은 대부분 학부모나 친지의 기부금에 의존. 교과 내용은 전통적인 유교교육과 달리 세계사, 지리, 수학, 자연과학, 체조 등 근대적인 과목이 주류. 수업은 로마자화된 베트남어인 꾸옥 응으로 진행.
동경의숙은 학교교육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선전과 출판을 통한 베트남 사회의 근대화에도 공헌.
프랑스 당국. 1908년 1월 학원 폐쇄명령. 응우옌 꾸옌 등을 체포하여 콘 썬으로 유형보냄.
-326쪽

동경의숙 폐쇄, 동유운동 좌절 이후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일시 소강상태.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 성공으로 다시 활력. 일본에서 추방된 판 보이 쩌우는 홍콩을 경유해 사이암으로 갔다가 혁명 소식을 접하고 광둥으로 돌아감. 그리고 1912년 2월 다른 동지 100여 며 d과 더불이 이미 유명무실해진 유신회를 해산하고 새로이 베트남광복회를 조직. 조직의 결성과 운영에 관해 세세한 점까지 쑨원의 동맹회를 모방. 광복회의 기본 목적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획득하며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 광복회는 또한 처음으로 황색 바탕에 다섯 개의 홍색 별로 도안된 국기 제정. 군대 창설. 그러나 자금문제 봉착. 암살, 테러 등으로 광복회의 성가 높여서 자금난 해결하기로. 1914년 1월, 판 보이 쩌우 체포. 3년 뒤 석방. 광복회 거의 괴멸 상태.
-329쪽

1925년 6월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흔히 ‘청년’으로 약칭)가 조직되고,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결성되면서 민족주의 운동은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됨. ‘청년’은 응우옌 아이 꾸옥, 뒷날의 호찌민이 팜 홍 타이를 배출한 떰 떰 싸의 회원들을 흡수하여 창립한 것. ‘청년’은 이제까지의 베트남 독립운동과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는 당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판 보이 쩌우나 판 쭈 진 등과 같은 저명한 인물의 개인적인 영도력에 치중되어 있어 조직력이 약했던 데 비해 ‘청년’은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단체로 그 조직은 대중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청년’이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고, 경자유전을 주장함으로써 사회혁명적인 슬로건까지 내세웠기 때문. 둘째는 이전의 조직들이 대부분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회원도 일부 계층에만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청년’ 조직은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이남 남부나 중국 등 해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점. '청년‘은 겉으로는 단순한 민족주의 단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베트남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청년‘이란 이름은 조직의 외피이고, 핵샘조직은 9명으로 구성된 ’청년공산단‘

-339쪽

‘청년’을 만든 응우옌 아이 꾸옥은 처음 2년 동안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양성하는데 집중. 혁명요원을 훈련시켜 1925년 말부터 베트남 국내로 잠입하기 시작. 1927년에는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각지에서 또다시 사람들을 훈련시켜 조직을 확대, 1929년에는 당원 수가 800~1000명에 이름. ‘청년’의 기관지인 <청년>을 주간으로 발행. <혁명의 길>이란 책자도 씀. 이는 베트남의 <공산당 선언>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용은 레닌주의를 그대로 수용.
-340쪽

1940년 6월, 일본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 전개. 유럽의 전황에서 프랑스의 열세를 본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총독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충칭으로의 물자 반입로인 중월 국경의 폐쇄와 이것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는 군사 사절단의 입국을 허용하라고 요구. 총독 받아들임. 비시 정부, 총독 해임.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미국과 독일이 일본의 야심에 제동을 걸어주길 바랐으나 희망 없음을 알고 8월 말에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정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해 주었다.
일본 세력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드렁온 지 한 달 후인 1940년 10월 타일랜드 정부는 전에 프랑스의 압력으로 캄보디아에 할양했던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변경을 침입(1939년 사이암은 국명을 ‘타일랜드’로 바꾸었다.)
-353쪽

1941년 5월, 오랫동안 부재 중이던 응우옌 아이 꾸옥의 주재 아래 중월 국경지방에서 열린 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는 베트남독립동맹의 결성 결의. 흔히 베트민이라고 약칭되는 이 단체는 각계각층의 혁명세력을 규합하여 프랑스의 식민주의자와 일본의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베트민이 결성된 지 5주일 뒤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베트민은 연합국에 대한지지 선언. 베트민의 창설과 더불어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배후에서 조정하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베트민은 공산주의가 아직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약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이들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단체였다.

-356쪽

1942년 8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연합군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호찌민이란 가명을 써서 국경을 넘어 중국 국민당 계열의 군벌인 장파구이에게 접근. 그러나 오히려 그에게 체포되어 1943년 9월까지 감금. 그 동안 윈난성과 광둥성에 망명 중이던 일단의 베트남인들은 1942년 10월 장파구이의 도움으로 베트남혁명동맹회 결성.

-358쪽

1945년 3월 9일 일본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켜 베트남에서 4년 이상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 당국과의 불편한 공존과계를 끊어버리고 무력으로 프랑스를 굴복시킴.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 총독을 비롯하여 고위 식민관리들과 군사 지도자들은 거의 다 체포되어 연금상태에 놓임. 이제 80여 년 동안 계속된 프랑스 식민통치는 막을 내리고 일본군 사령관이 지배하는 군정이 시작됨. 그러나 일본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정권을 대체할 어떤 존재의 필요성 때문에 유명무실하던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에게 황제의 지위를 그대로 인정해 줌. 바오 다이 황제는 3월 11일 중부(안남)와 북부(통킹)만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 4월 17일에는 저명한 역사학자 쩐쫑낌에게 내각의 구성을 맡김.

-360쪽

일본군의 쿠데타 직후인 3월에서 5월까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의 환호성이 베트남 전역을 휩쓸었다. 한편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군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많은 베트남인들과는 달리 쿠데타가 결코 베트남에 독립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 주목할 사실은 베트민과 미군 사이에 협력 관계가 성립한 일. 호찌민은 윈난 성 쿤밍에서 미국 제 14공군 사령관을 만날 수 있었으며, OSS와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웠다. 베트민이 베트남 내의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전략첩보부는 이들에게 무기, 통신기구, 의약품 등을 공급.

-361쪽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이틀 후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 일본의 항복이 임박함을 느낀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회의를 소집하고 즉각적인 총 봉기 결의. 8월 19일 베트민이 하노이를 장악하고 8월 25일에는 이들의 세력이 취약했던 남부의 사이공까지 베트민의 영향을 받음. 이를 두고 베트남 공산당은 ‘8월 혁명’이라고 함. 8월 30일 바오다이 황제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황금 보도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주어 응우옌 왕조 143년의 역사는 막을 내림. 사흘 뒤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그는 국낸외, 특히 미국의 적대감을 사지 않기 위해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선언하지 않음. 서구의 베트남 전문가들은 만일 미국이 그 당시 호찌민의 민주공화국을 승인해 주었더라면 그는 ‘아시아의 티토’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362쪽

1945년 북부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독립은 했지만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한해였다. 전통적으로 부족한 미곡을 남부에 의존하던 북부는 1945년 연합군에 의한 폭격으로 사이공 항국가 사용 불가능하게 되고 후에 이북의 철도가 파괴됨에 따라 미곡의 수송마저 어려워져 대기근을 겪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그해 2월 마닐라가, 그리고 4월에는 오키나와가 미군에 넘어가자 미곡 비축을 위해 더 심하게 착취함. 게다가 6월에는 홍 강이 크게 범람하여 홍 강 델타의 상당 지역이 수해를 입는가 하면 콜레라까지 창궐하여 8월까지 사망자가 2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델타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숫자.

-364쪽

1943. 11. 카이로 회담.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의 3자회담. 루스벨트, 종전 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 반대. 신탁통치 제안. 장제스는 인도차이나에 개입할 의사는 없지만 신탁통치안에 찬성. 동남아 지역은 고무나 주석 등 원료의 주요 생산지일 뿐 아니라 남아시아 진출의 전략적 요충지. 당시 루스벨트는 전쟁이 끝나면 미국 영국 소련 중국과 함께 4강 체제를 구축하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함께 경찰국가의 임무를 담당할 생각. 또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처칠과 너무 가깝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미국의 뜻을 쉽게 따라주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견제. 테헤란에서 처칠, 스탈린과 회동한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전후 상당 기간 동안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 해야 한다고 주장. 스탈린 동의. 처칠 반대. 그는 인도차이나를 프랑스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 인도차이나가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경우 동남아의 영국 식민지에도 여파가 미칠까 우려한 것.

-366쪽

1944.10. 미국 정부는 ‘자유 프랑스 운동’을 장악한 드골 정권을 프랑스 임시정부로 공식 승인. 1945.1. 루스벨트는 자유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작활동을 위해 파견되어야 한다는 처칠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2월에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그는 더 이상 인도차이나 문제를 가지고 처칠을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갑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인도차이나를 중국군의 전략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지만 이전의 프랑스 복귀에 대한 적극적 반대의사와 신탁통치 정책은 많이 퇴색됨.

-367쪽

1946년. 당시 쟁점은 두 가지. 하나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기에 분리된 북부, 중부, 남부의 통합이고 다른 하나는 베트남의 독립. 그러나 국내외 상황은 호찌민에게 불리. 대내적으로 그는 막 출범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도 소련은 베트남 공산당보다 프랑스 연립내각에 참여한 프랑스 공산당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고 중국의 장제스 정부 역시 자신의 국내 문제가 더욱 시급. 미국은 유럽의 상황을 고려하여 호찌민의 혁명정부보다 프랑스를 지지하기로 결정.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은 패전국 독일을 집중 지원하면서 유럽안보공동체의 출범을 모색. 그러나 전쟁 때문에 국력을 거의 소진해 버린 프랑스가 패전국 독일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원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안보공동체 참여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 보임. 세 번째로 바티칸의 역할. 바티칸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력 약화가 가톨릭 교세의 축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 따라서 가톨릭에 부정적인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와 인도차이나에서의 교세 유지가 바티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현안. 결국 바티칸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적극적인 재정적 물리적 지원을 요구.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에 대한 지원 약속.

-370쪽

한편 호찌민을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프랑스가 2월 장제스 정부와 충칭에서 맺은 협약. 지난날 프랑스가 중국에 압력을 가해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포기하는 대신 중국군이 철수한다는 것. 할 수 없이 호찌민은 생트니와 1946.3.6. 잠정적 협정 맺음.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프랑스 연합 내 인도차이나 연방의 일원으로서의 자유국가라는 것. 이는 호찌민 정부가 국내문제에서는 자치권을 갖지만 외교와 국방 및 무역에서는 프랑스가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 또 북부, 중부, 남부의 통합 문제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프랑스는 향후 5년 동안 2만 5천의 병력을 주둔시키기로 함.
4.18. 3월의 잠정협정 시행을 논의하기 위해 다 랏에서 양측이 다시 만났으나 인도차이나 연방의 지위 및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주권을 둘러싸고 회담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회의는 9.10 결렬.
-371쪽

호찌민과 프랑스 사이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긴장관계는 하이 퐁 항구의 관세권을 둘러싸고 고조. 11.20. 프랑스 초계정이 중국 밀수선을 나포한 것을 계기로 총격전.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작. 23일, 프랑스 함대는 하이 퐁에 대대적인 포격. 여러 차례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성과x. 당시 프랑스 여론은 1940년 독일에 훼손된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 협상 중에도 전쟁은 계속. 전쟁 초기 남부 증원군의 확보와 화력의 절대적 우세로 프랑스군은 3월 남딘까지 점령. 그러나 7만 5천 명에 이르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아득. 당시 프랑스군의 전략은 인구 중심지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다음 주변 각지로 군대를 보내 적군을 평정한다는 것. 모로코와 같은 사막지대에서는 은폐물이 없어 적군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이 작전이 성과 있지만 산악과 정글이 많은 홍 강 델타에서는 적합x. 그 사이 산악과 정글에서는 베트민이 농민을 규합하여 세력 커짐.

-372쪽

프랑스군은 1947. 10. ‘레아 작전’ 작전의 목적은 8천km2에 달하는 호찌민 정부군의 거점인 험난한 산악지대 점령하는 것. 프랑스군 1만 2천 명 병력 투입. 호찌민 정부군 피해 막심. 그러나 병력부족으로 점령지에서 철수하는 프랑스. 전쟁은 교착상태. 프랑스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은 반공정책을 취하고 있던 로마 교황청과 100만 명 정도의 가톨릭 교도뿐. 그 밖의 많은 베트남인, 특히 농민들은 전쟁에 비교적 무관심. 레아 작전 실패. 정치적 해결 모색하는 프랑스. 호찌민 정부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정권 수립하여 이와 협상한다는 것. 이때 등장한 것이 ‘바오다이 해결책’

-375쪽

협정안에 실망한 바오다이는 베트남의 완전통일과 실질적인 독립이 이뤄지기 전에는 제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유럽으로 돌아감. 1949. 3. 프랑스는 엘리제궁에서 바오다이와 협정을 맺어 베트남은 코친차이나까지 통합한 하나의 국가임을 인정. 그러나 이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이 확대된 형태에 지나지 않음. 이 협정을 계기로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을 식민지 전쟁이 아닌 자유 베트남과 공산주의의 대결 구도로 끌고 감. 이때 새 정부 내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던 민족주의자들이 불만을 터트림. 프랑스가 여전히 모든 제도를 통제하고 약속한 베트남 군대의 창설도 훨씬 뒤에야 추진되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찌민 정부 아니면 프랑스라는 두 가지 선택의 길만 남음. 이로 인해 적잖은 민족주의자들이 싫든 좋든 호찌민 정부측에 가담.

-376쪽

1949.10. 중국 대륙 공산화. 미국은 이제까지의 미온적인 태도를 바꾸어 프랑스군을 적극 지원. 호찌민 정부군은 중국 공산당의 후원을 받으며 총공세 시작. 1950. 1.18.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계에서 최초로 공식 승인하고 군사원조에 합의. 소련도 1.30.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공식인정하고 정식 외교관계 맺음. 미국 내에서 중국 대륙을 잃었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하면서 곤경에 처했던 트루먼 정부는 소련의 호찌민 정부 승인으로 호찌민이 공산주의자임을 확신한 듯 지체 없이 2월 7일 바오다이의 베트남 정부를 공식 승인. 여기에 더하여 한반도에서 6.25전쟁의 발발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경각심을 더욱 촉발. 중국은 적잖은 무기 공급처인 동시에 필요한 경우 도피처가 되었고, 또 군사훈련 장소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377쪽

1950. 1. 호찌민 정부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총공세. 장기전으로 인해 프랑스 경제는 어려웠고, 바오다이 해결책 또한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본 호찌민 정부군의 총사령관 지압은 총반격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 12월까지 프랑스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는 1만 6천 명에 달함. 1953.11. 프랑스의 나바르는 베트남 서북 변경 산간지대의 디엔 비엔 푸에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1만 1천 명의 병력 주둔. 이 요새의 약점은 비행기로만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나바르는 1개 사단 정도의 지압군이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 경우 우세한 화기와 공군력으로 이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믿음. 지압은 디엔 비엔 푸를 비밀리에 포위. 여기 투입된 병력은 5만 명에 달함. 4개 보병 사단과 1개 기갑 사단으로 이루어짐. 이 대규모 전투부대가 필요로 하는 중화기와 식량은 동원된 수만 명의 농민이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부터 등짐으로 날랐다. 이는 프랑스와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상상을 초원한 것. 여기에 중국 공산당 정부가 지원한 수백 대의 화물 자동차도 큰 도움.

-378쪽

프랑스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긴급사태 해결하고자 합참의장을 워싱턴에 급파. 독수리 작전 감행 결정. 독수리 작전이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 비엔 푸를 공격하는 지압 군대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비롯한 매파는 이에 동조했지만 육군 참모총장은 한반도의 예를 들어 별 효과 없을 것임을 경고. 마침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이 지지하면 참전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영국 즉각 반대의사 표명. 영국의 불참을 구실삼아 미국은 프랑스의 제의 거절. 외부의 지원이 전무했던 프랑스군이 5월 7일 항복. 포위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군은 1,600명이 전사하고 4,800명이 부상당했으며, 1,600명이 실종. 포로가 된 8천 명의 프랑스군은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지만 귀환한 숫자는 절반에 못 미침. 지압군 전사자는 7,900, 부상자는 1만 5천 명에 달함. 지압군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장비가 빈약하여 주로 인해전술에 의존했기 때문.

-382쪽

디엔 비엔 푸 전투는 서양에 대한 동양의 승리로, 탈식민화과정에서 유래 없는 일.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모든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전투에서 민족해방운동에 패배를 당한 것. 1953년 8월까지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4만 8천 명에 달함. 여론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 맹데스 프랑스 수상은 7월에 재개된 제네바 회담에서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협정에 조인. 프랑스는 1858년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0년 만에 물러남.

-384쪽

제네바 협정의 내용은 첫째,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300일 이내에 호찌민 정부군은 이북으로, 프랑스군은 이남으로 이동. 둘째 민간인도 자유의사에 따라 17도선 이남과 이북으로 거주 이전. 셋째 군사경계선은 잠정적일 뿐이며 정치적 통일문제는 1956년 7월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결정. 넷째, 이후 일체의 외국군대는 증원될 수 없으며 프랑스군은 총선거 때까지 주둔할 수 있다. 다섯째, 캐나다 폴란드 인도 3개국으로 구성되는 국제감시위원회를 두어 협정의 이행을 감시한다.
미국은 베트남의 절반이 공산화된 데 불마을 품고 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은 채 무력개입만은 하지 않겠다는 성명 발표. 바오다이 정부도 휴전조약에 반대하면서 서명 거부. 제네바 협정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기간 동안 입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인명피해는 막대. 프랑스와 프랑스 연방의 군대는 17만 2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호찌민 정부군의 사상자는 프랑스의 3배, 베트남 민간인의 사망자도 1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됨.
-387쪽

프랑스군은 1954년 10월 초 하노이를 호찌민 정부군에 넘겨주고 17도선 이남으로 철수를 시작하여 1955년 5월 중순, 마지막 부대가 하이 퐁을 떠났다. 이때 프랑스군을 따라 남하한 민간인은 80~90만으로 추산. 그 중 60만 가량이 가톨릭 신자. 남쪽에서 활동하던 호찌민 정부군과 게릴라 부대들은 17도선 이북으로 올라갔으나 이들과 함께 북으로 간 순수 민간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음. 호찌민과 그의 동지들은 1954년 10월. 프랑스군으로부터 하노이를 이양받고 8년 만에 돌아옴. 새로이 합법화된 베트남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정치권력은 베트남 노동당이 장악. 정책결정은 정치국에서. 10여 명의 정치국원이 정부의 요직 독점.

-388쪽

호찌민의 하노이 정부의 당면 과제는 경제의 안정. 8년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남부로부터의 식량 유입 중단은 북부 경제에 치명타. 다행히 첫해는 소련의 재정원조에 힘입어 버마로부터 쌀을 수입함. 토지개혁을 북부 전체로 확대. 토지개혁이란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과 소작농에 분배하여 이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려는 것. 그 결과 1957년까지 81만 헥타르의 토지가 800만 농민에게 분배. 그러나 문제점 많음. 토지개혁을 현장에서 실행에 옮긴 공산당원들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들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태반이다 보니 촌락의 토지개혁이 부유층에 대해 보복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곤 함.

-390쪽

지주와 부농 및 중농을 막론하고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소유 토지를 빼앗김. 심지어 프랑스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해방의 공을 세운 지주들조차 혁명을 방해하기 위해 그랬을 뿐이라며, 반동분자라 낙인 찍혀 온갖 박해에, 처형되기도. 프랑스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 또는 프랑스어 사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제국주의 문화의 숭배자로 간주되어 농업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인민재판에 회부되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에 처형된 사람은 1만 명 정도로 추산. 이처럼 무차별적인 토지개혁으로 인해 1956년 11월에는 응에 안 지방에서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농민반란 발발. 정부군 진압. 6천 명에 달하는 농민들은 다른 지방으로 추방되거나 처형. 호찌민은 1956.8. 토지개혁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지주와 부농의 재분류 및 혁명을 지지한 지주들에 대한 고려를 약속.

-391쪽

1958년경에 이르러 토지개혁에 의한 농촌의 불안이 거의 해소되자 하노이 정부는 다시 농업 부문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를 도모. 기아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하자 정부는 1961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합작사 규모의 확대와 농업기술의 향상에 주력.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공업발전에도 관심 기울임. 하노이 정부는 폐허 위에서 우선 기존의 시설들을 재건하고 확충하는데 노력. 막대한 복구 비용은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들이 원조. 1955년부터 1961년까지 하노이 정부가 이들로부터 받은 액수는 무상원조와 차관을 합쳐 10억 달러에 달함. 이 원조로 제철공장, 비료공장, 제당공장, 제지공장, 화력발전소 등이 세워짐. 높이 평가되어야 할 점은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전시용 아파트를 지은 것과는 달리 하노이 정부는 철저히 경제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주력.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남부 해방전쟁이 본격화되어 인력과 자원이 전쟁에 투입되고, 미국의 공습으로 공장들이 파괴되어 공업발달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음

-393쪽

남부 베트남의 주요 관심사는 정치문제로서 북에 대항할 수 있는 반공정권의 창출. 1954년 6. 바오다이는 응오 딘 지엠을 수상에 임명하여 새로운 내각 구성. 가톨릭 교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지엠은 민족주의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인물. 아이젠하워는 즉시 지엠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 이에 앞서 10월, 미국은 모든 베트남 원조는 프랑스 당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엠 정부에 주겠다고 함으로써 남부에 그나마 남아있던 프랑스의 권위를 완전히 약화. 1956. 4.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사령부의 폐쇄를 공식 선언. 9월에는 마지막 군대가 사이공 항구를 떠남. 미국의 지엠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 다이 비엣같은 민족주의 정당과 까오다이 및 호아 하오 등의 종교단체, 그리고 사이공 경찰을 장악하고 있던 빈쑤언이란 폭력집단 등이 그를 반대하고 있었던 것. 지엠은 뇌물로 죵교단체 매수. 정규군을 이끌고 빈 쑤언 집단과 정면 대결하여 소탕.

-395쪽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지엠은 바오다이를 축출할 목적으로 1955.10.23. 남부의 정치체제를 군주제로 할 것인지 공화제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 실시. 공명선거를 하더라도 승리할 것이 분명했지만 지엠은 부정선거로 98.2%의 지지 얻음. 사이공의 유권자는 45만 명이었는데 실제 투표자 수는 60만 5천명. 1955.10.26.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 초대 대통령에 취임. 베트남 공화국 정부는 처음부터 미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 1955년 사이공 정부의 재정수입은 세출의 1/3. 나머지는 미국의 경제원조로 충당. 미국의 원조는 군사 분야에 집중.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총 원조액 70억 달러 중 2/3가 군사 예산에 쓰임. 비군사 원조의 상당부분은 군사적 목적의 도로건설이나 교육문제 등 필요한 소비재 수입에 집중. 지극히 적은 액수만이 농촌의 토지개혁이나 농업발달에 사용.

-396쪽

지엠의 정책 중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는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위해 혁신적 토지개혁을 하지 못한 것. 1956. 10. 사이공 정부는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소작농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토지개혁법을 반포했지만 현실과 괴리된 것. 결국 사이공 정부는 대다수 농민들을 소외시켜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함. 농민들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그에 따라 정부에 대한 비판도 거세짐. 1960년에 이르면 농민들은 좋든 싫든 혁명 쪽으로 기울어짐. 미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지엠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56년 총선거를 치르자는 하노이 정부의 제의를 거절. 사이공 정부는 제네바 협정에 조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에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선거가 치러질 경우 하노이 정부가 압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

-397쪽

지엠은 하노이 측의 남북 총선거 제안을 거절한 후 남부에서만 선거를 치름. 임기 5년의 막강한 대통령 권한 행사. 합법적으로 독재정치. 언론과 결사의 자유 제한. 정권 비판자 임의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냄. 중앙집권화된 행정부는 지방의 말단 공무원까지 임명. 고위 관료나 고급 장교의 승진에서는 능력보다 정권에 대한 충성을 척도로 삼음. 지엠 정권하에서 특혜를 받은 사람은 가톨릭 교도, 특히 북에서 남하한 이들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 거의 독점. 지엠 정부의 권력은 그 자신과 그의 일족에게 집중. 다른 누구도권력의 핵심에 근접할 수 없었다. 지엠의 족벌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은 1960.1.11. 응우옌 짜인 티 대령이 주도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쿠데타로 표출. 48시간 만에 끝남.

-399쪽

지엠의 독재정치와 그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0년대 후반 이래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이지 않음. 이유는 그의 철저한 반공정책 때문.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실현보다는 반공정책이 더 중요. 1956년부터 지엠은 제네바협정 후 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에 남아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실시. 당시 검거 대상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이었지만 경찰과 군대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들은 물론이고 지엠정권에 반대하거나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예컨대 소수정당의 당원과 언론인 및 노동조합원까지 구속. 체포된 사람들의 숫자는 5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

-400쪽

지엠의 독재정치와 토지개혁의 실패로 인한 농민들의 소외가 바로 민족해방전선과 그 군사적 전위부대인 베트콩 세력을 급속히 키워 준 주요 요인. 지엠은 농촌의 보이지 않는 저항에는 거의 손을 쓸 수 없었다. 낮에는 농민이었다가 밤에는 게릴라가 되는 사람들을 구분해 내기란 불가능. 남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는 사이,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섬. 전임자의 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미국의 목적이 남부 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 케네디의 미군 개입 확대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자는 것이었지만, 1949년 민주당 정부의 중국 대륙 상실 책임이라든가 그의 취임 전날 흐루시초프가 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지지 연설 및 그 자신의 쿠바 침공작전 실패 등과도 밀접한 관련. 결국 베트남의 공산화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 뻔했기 때 문에 남부 베트남의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403쪽

아이젠하워가 1961년 초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 남부 베트남에 있던 미군사요원의 수는 875명이었으나 1963년 말에는 1만 6,263명으로 증가.
그러나 1963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케네디 행정부로 하여금 더 이상 지엠을 옹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함.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지엠의 불교도 탄압. 5월 8일 후에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는 불교도들의 시가행진이 당국에 의해 저지를 당하자 평화스런 행진이 반정부시위로 변함. 정부군 발포. 6월 11일 틱꽝득 스님의 분신자살 모습이 생생히 전세계로 전달되면서 국제여론은 지엠 정권의 야만성 규탄. 곤경에 처한 케네디 행정부는 지엠의 불교도 탄압을 완화하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지엠에게 동생 뉴 부부를 정권에서 배제하도록 권유. 미국과 군부의 변화를 포착한 뉴는 극단적인 밥으로 국면 전환 모색. 민족해방전선과 하노이에 접근하여 베트남의 중립화를 시도.
-404쪽

1963.11.1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장성들이 쿠데타 일으켜 대통령 관저 장악. 지엠과 뉴의 국외추방을 원했던 미국의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은 이튿날 아침 살해됨. 쿠데타 성공 후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고 의장에는 즈엉 반 민 장군 취임. 11.22. 케네디가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암살되면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은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부통령이 떠맡게 됨. 민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는 통치력 결여되어 있었음. 1964.1.30. 응우옌 카인 장군은 새로 쿠데타를 일으켜 2.7. 민 장군을 형식상의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고 자신이 수상이 됨. 미국은 신정부를 승인했지만 카인을 별로 신뢰하지 않음. 하노이 정부는 남부 침투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 등을 의결. 미군의 즉각적인 반격이 뒤따르겠지만 사이공 정부와 군대가 큰 타격을 입으면 미국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리라 예견. 하노이 정부의 계산 착오.

-408쪽

사이공 정부를 믿을 수 없었던 미국은 이제 베트남 문제를 직접 떠맡기로 함. 8.2 통킹만 사건. 사이공의 카인 정권은 독재정치를 하면서 민간인 정치가들에게 권력을 이양할 생각 하지 않고 새로운 개혁도 거부. 자신의 권력 강화에만 집중. 결국 미국의 묵인 하에 1964.12. 젊은 공군 장성 응우옌 까오 끼와 육군의 응웅옌 반 티에우는 카인을 축출하고 1965.2.17. 민간인 의사인 판 후이 꽛을 수상에 앉힘. 그러나 끼와 티에우는 꽛 정권을 단명으로 끝내고 6월 권력 장악.

-409쪽

1965.7. 존슨은 전쟁의 ‘미국화’를 결정. 1965년 말 미군의 수는 18만 4천 명 이상에 달함.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 파병에 대한 국내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한편, 사이공 정부에 대한 국제적지지 확대에 골몰. 1965년 말까지 한국은 2만 620명,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1,700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파견. 필리핀과 타일랜드는 1966년과 1967년에 각각 몇백 명씩만 파병.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박정희 정부가 자진하여 군대 파견. 파병계획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61년 11월 당시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가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났을 때. 그 이후 박정희 정부는 계속하여 베트남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회 있을 때마다 파병을 언급. 미국이 전쟁을 떠맡은 다음 지상군을 투입하고 제3국들도 군대를 파견하고 있을 때 사이공 정부는 권력싸움. 1965.6.11. 응우옌 까오 끼가 수상으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응우옌 반 티에우는 명목상의 국가 원수 자리에 오름.

-412쪽

1966년과 1967년에 걸쳐 북폭의 증가와 지상군의 증강으로 전쟁은 확대되었지만 교착상태. 1965년 18만 4천 명이던 미군 병력은 1966년 36만 명에 이르렀고, 1967년에는 48만 5천 명에 달했다. 미군의 수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에는 약 54만 명이었다. 제3국의 군대도 1966년 5만 2천 명 이상으로 증가하고 이후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6만 9천 명 가까이.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한국군은 1970년까지 연평균 4만 8,500명 정도의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

-415쪽

북부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폭격은 하노이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속셈이었지만 오히려 하노이의 저항만 고조. 철저히 통제되고 잘 조직되어 있던 북부 베트남 사회는 북폭을 계기로 더욱 단결. ‘국가방위’라는 슬로건으로 인민대중을 쉽사리 동원 가능. 더욱이 근대 산업사회와는 달리 베트남은 여전히 농업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하노이를 굴복시킬 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당시 일인당 5천 달러 가까운 소득의 생활수준을 향유하고 있던 미국인들로서는 연간 일인당 소득이 5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20여 년 전 프랑스군이 디엔 비엔 푸에서 실패한 이유도 이와 유사.
소련과 중국의 군사원조 역시 하노이 측에 상당한 도움. 이렇게 들여온 무기의 대부분은 호찌민 통로를 경유하여 베트콩에 전달. 하노이 정부의 병력은 징병제도를 통해 충분히 공급. 매년 20만 명이 징병 연령에 도달했으며, 이들 중 상당한 수가 1968년까지 남으로 파견.
-416쪽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워싱턴의 환상은 1968.1.31. 베트콩의 ‘뗏 공세’(구정 공세)로 무너짐. 전에는 뗏을 전후하여 2주일 가량 휴전하는 것이 관례. 이를 이용하여 베트콩과 하노이 정규군 약 8만 명은 사이공 정부와 미군의 세력기반이었던 남베트남의 거의 모든 도시를 공격대상으로 삼음. 공산주의자들은 4만 명의 인명손실. 대부분은 베트콩. 미군은 1,100명 가량, 사이공 정부군은 2,300명 정도 전사. 민간인 사망자도 1만 2,500명에 이름. 단순히 인명피해만 본다면 하노이 정부군과 베트콩이 패배. 그러나 미군이 전술적인 승리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타격 입음. 미국 국민들은 존슨 행정부에 등을 돌렸고, 비난 여론 빗발.

-417쪽

하노이 정부가 일단 미군의 공습을 중단시키기 위해 평화회담에 응함으로써 1968년 5월 파리에서 예비접촉이 이루어졌으나 별다른 진전 없음. 이 무렵 호찌민은 건강악화로 정치에서 손을 뗀 지 오래. 그는 1969.9.2. 사망. 이 날은 독립기념일. 미국은 196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이 당선. 그는 패배의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서서히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키고 그 공백은 사이공 정부군의 증강으로 메우려 함. 1968년 말 54만 5천 명이던 미군 병력은 1969년 48만 명, 1970년 28만 명, 1971년 17만 5천 명(그 중 7만 5천 명만이 전투병력)까지 대폭 감소. 문제는 사이공 정부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

-418쪽

1969.3. 닉슨은 캄보디아에 주둔해 있는 하노이측의 병력과 물자 공급로 및 탄약고 등에 대한 폭격을 단행하여 14개월 동안 계속. 1970.3. 주읿적이던 시아누크 왕이 쿠데타에 의해 추방되고 친미적인 론 놀 장군이 정권 잡음. 론놀은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성역을 파괴하도록 사이공 정부에 요청. 전쟁 확전 양상. 캄보디아 침입은 미국측에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줌.
1972.3 지압 장군은 이른바 ‘춘계 대공세’, 일명 ‘부활절 공세’를 감행. 미군은 공습으로 맞섬. 4.16. 닉슨은 북베트남 폭격의 재개 지시. 5.8. 다시 수뢰를 설치하여 하이 퐁 항구 봉쇄 명령.
-420쪽

1972.7. 파리 평화회담 재개. 10.8. 하노이측 대표인 레득토는 처음으로 휴전 후 티에우 정부의 존속을 인정. 그란 이번에는 티에우가 회담 내용에 반발. 11월재개된 협상은 12월에 결렬. 닉슨은 다시 ‘크리스마스 폭격’을 재개하여 하노이측을 회담장으로 끌어냄. 1973.1.23 키신저와 레득토는 잠정적인 협정에 합의. 1.27. 미국, 사이공 정부, 하노이 정부, 그리고 남베트남 임시혁명부(1969년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명칭)의 대표가 공색적으로 평화조약에 각각 서명. 동맹군은 곧 철수를 시작하여 미군은 3월 말까지 전원 베트남을 떠남. 한국군은 1971년부터 1만 명씩 병력을 감축하여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2,500명 정도만 남겨놓음. 이 병력은 1975년 4월 말 남부 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직전 철수.

-422쪽

전투는 휴전 중에도 여전히 계속되었고, 양측은 서로 상대방이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에 대응했을 뿐이라고 함. 국내외 정세는 사이공 정부에 불리하게 전개. 문제는 군사적인 것만이 아님. 10년 가까운 동안 베트남 경제는 미군과 다른 외국군의 소비에 의존. 이들의 철수는 도시의 소시민들 가정경제에 큰 영향. 사회적 불안감 증폭.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8. 대통령직 사임. 이로써 티에우는 그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 잃어버림.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하노이 정부는 1975.1. 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전면전 돌입. 닉슨의 뒤를 이은 제럴드 포도 대통령은 의회에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추가 원조를 요청했지만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힘.

-423쪽

티엥우는 4월 21일 대통령직 사임. 부통령인 쩐 반 흐엉이 물려받음. 흐엉은 곧 북베트남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4.26. 다시 온건파인 즈엉 반 민에게 대통령직 위임. 민 역시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 당함. 4.30. 사이공마저 하노이 군대에 점령됨에 따라 베트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게 됨.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 피해만 해도 사이공 정부군이 11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49만 9천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민간인도 41만 5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 1995년 하 노이 정부는 정부군과 베트콩을 포함하여 110만 명이 사망하고 60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 여기에 산업시설의 파괴까지 고려하면 베트남 전역은 거의 황폐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424쪽

전쟁의 복구뿐 아니라 하노이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 무엇보다 남부사회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것. 모든 상공업 부문은 국영화. 농촌경제는 집단농장체제로 바꾸어야 했다. 또 타락한 서구 부르주아 문화는 뿌리 뽑고 대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뿌리를 내려야 했다. 아울러 남부를 북부와 통합하는 일 역시 시급한 과제였다.
승리한 북부 지도자들은 공산당 간부와 군대를 중심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으나 이들은 유능한 전략가요 전사이긴 했지만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행정가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문제점 많이 발생. 적잖은 수의 임시혁명정부 지도자들이 급격한 남북통합에 반발하여 망명길에 오름. 또 공산화 뒤에 일어난 농업생산력 저하와 그로 인한 빈곤은 수십만의 베트남인을 이른바 ‘보트 피플’로 국외로 내몰았다. 하노이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미숙함을 깨닫기까지는 거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1986년 마침내 ‘도이 머이’ 정책이 채택되면서 베트남 사회는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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