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와 보름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69
제인 욜런 지음, 존 쉰헤르 그림 / 시공주니어 / 1997년 1월
구판절판


너무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최근에 정보 저장의 의미 이외에 '감동'의 뜻으로 밑줄긋기를 해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푸른 하늘이, 저 둥근 달이, 하얀 눈 위를 오르는 아빠와 딸의 그림자가 마음에 감겨서 표지도 한 컷 찍었다.
역시나 내가 신뢰하는 칼데콧! 실망을 시키지 않는다.

추운 겨울 밤 아빠는 딸을 데리고 부엉이 구경을 나선다.
너무 추운 밤이었고, 또 무섬증이 일수도 있는데, 게다가 소리조차 내면 안 된다는 규칙!
미국에 이런 통과의례적 풍습이 원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에서 부엉이 구경가는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일종의 관문이다.
주인공 아이의 오빠들도 아빠와 함께 이미 부엉이 구경을 다녀왔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주변에 인가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는 이런 황량한 풍경.
우리나라에선 몹시 드물 모습이지만, 저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지는 어디서든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맨 앞에 아빠 손을 잡고 걷는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보인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아갈 때마다 회색 발자국이 뒤따라 간다.
아빠의 그림자와 아이의 그림자도 그 길을 함께 지나간다.
앙상한 가지, 깊게 쌓인 눈, 그 눈길을 해쳐 지나가는 아빠와 딸.
그리고 그 둘은 침묵을 지킨다. 부엉이 구경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 만남이 성공하려면 아이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 추워도 춥다고 말 못하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옷깃을 여미고 입김을 후 불어야 한다.

아빠는 "부우우우우우우우엉-부우우우우우우엉."
하고 부엉이 소리를 흉해낸다.
첫술에 배부를 수가 없다.
둘은 또 걷는다. 그림만으로도 이날의 추위가, 온도가 어떠할지 독자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조그마한 아이가 얼마나 들떠 있는지, 그리고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도 독자는 대견한 눈으로 지켜본다.

부엉이를 부르는 아빠의 몸짓과, 그 옆에서 목도리로 칭칭 감아맨 입끝으로 벙어리 장갑을 녹이는 아이의 모습이 함께 잡힌다.
아빠는 부엉이를 부르지만, 아이는 아직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진짜 부엉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의식은 아직 끝이 난 게 아니니까.

마침내 만난 부엉이, 큰 날개를 펼치고 위엄있게 날아간다.
아빠는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소리 내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 주신다.
이제 아니는 알고 있다. 웃어도 되고, 말을 해도 된다는 걸.
의식은 통과했고, 아이는 오빠들과 마찬가지로 부엉이를 만났다.
그렇게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서둘러 그 침묵을 깨지 않는다.
부엉이 구경을 가서는 말할 필요도, 따뜻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단지 소망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와 아빠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서늘하고 차가운 이 계절에 꼭 어울리는 책이다.
무엇보다 번역이 훌륭하다. 어린이 책에서 이토록 문학적이고 은유적이고 또 리듬감 있는 번역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만큼 원작이 훌륭했을 것이다. 원문을 보면 시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언니는 조카 책으로 한 권, 조카 친구 책으로 한 권, 이렇게 두 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개인 소장하고 싶어졌다.
시공주니어란 출판사 이름이 맘에 안 들지만, 그 대단한 자본력으로 좋은 책 많이 내고 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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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16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책을 낸 출판사가 시공이라는 사실이 슬플 뿐!ㅜㅜ
정말 네버랜드 시리즈 좋은 책이 너무 많아서~ 마지막 줄에 공감 100배.^^

마노아 2008-11-16 12:01   좋아요 0 | URL
그치요? 이렇게 좋은데 사려고 하면 출판사가 턱!하니 걸리지요. 화딱지 난다니까요. 근데 책은 진짜 너무 아름다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