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념관 안에는 밀라이 학살 사건에 대한 사진과 기록도 있다. 1968년 3월 어느 날, 미군 몇 명이 부락에서 베트콩 소탕작전을 하다 사살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은 주민 504명을 모두 모아놓고 학살하고 방화했다. 그 중에서 여자는 182명(임신한 여자 17명), 어린이는 173명(56명은 5살 이하)이었다. 그 사진과 기록 밑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미군을 욕되게 하기 위해 이 사진을 전시한 것이 아니다.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타락시키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끔찍한 학살은 장교들의 지령으로 벌어졌다. 나중에는 장군 이하 모든 장교가 그 사건을 은폐했으나 1년 후 미국에서 마침내 그 사건이 폭로되었는데 오직 켈리 중위 한 사람만 혐의가 인정돼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켈리 중위는 넉 달 보름 동안 복역하다가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그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는 참전 군인들은 1백 50만 명 정도이고, 2만 명은 자살을 했다. -21쪽
용서하지 못할 자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군수품 업자와 그들과 결탁한 정치꾼들. 그들은 피 묻히지 않은 하얀 손으로 전쟁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계산’하고 ‘결정’했다. 그리고 ‘......을 위해’라는 온갖 수사를 동원했다. 그들에게 하늘의 벌이 있기를. 베트남전은 끝났지만 그들의 용서 못할 행위는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22쪽
시클로는 자전거를 개량한 것으로 앞바퀴 두 개, 뒷바퀴가 하나인 삼륜차인데, 시클로 운전수에 대한 평판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좋지 않다. 전후에 시클로 운전수들 중에는 비밀 경찰이 많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베트남 인구 6천 6백만 명 중에 비밀 경찰이 1백 20만 명이니 50명당 하나는 비밀경찰인 셈이다-라는 글을 어느 책에선가 보기도 했으며, 또 외국 관광객들 상대로 바가지를 많이 씌운다는 평판이 있어서 늘 조심해야 했다.
-23쪽
대개 남베트남 정부군 출신들은 직업을 갖기가 힘들어서 시클로를 몰거나 이발사를 많이 한다.
-25쪽
내가 그동안 책을 통해 접한 호찌민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겸손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구한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수레바퀴 속에 끼여 자신의 삶이 다 뒤틀려버린 남베트남 정부군 출신의 운전사로는 호찌민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26쪽
결국 미국은 철수작전을 편다. 미국인, 한국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은 미리 집결지를 통보받아 그곳에 집합한다. 대기한 헬리콥터를 타고 바다에 정박중인 배로 가기 위해서였다. 모든 외국인과 남부 베트남 고위 장성과 관료들은 시시각각 들려오는 포성 속에서 허겁지겁 도주했다. 그래도 이들은 미군의 도움으로 철수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미국인 혹은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공무원, 경찰, 미군 편에 붙어서 일하던 사람 등등 처형이 예상되던 중하위직의 베트남인들이었다. 수백 명이 미국 대사관과 그 외의 외국인 집결지로 몰려들었고, 철조망을 뛰어넘으려 했으며,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무장한 미 해병대에 저지당하면서 절규했으나 그들은 들어올 수가 없어서 생지옥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40쪽
포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군복을 벗고 도주했다. 드디어 4월 30일 새벽, 미국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인이 헬리콥터를 타고 사이공을 마지막으로 떠났고, 새벽 3시 30분, 주베트남 미국 대사인 그레이엄 마틴이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면서 미국은 군사 사절단이 최초로 사이공에 왔던 1950년 6월로부터 25년 만에 베트남에서 물러간 것이다. 기나긴 베트남전은 이렇게 끝났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 패배였던 것이다.
-41쪽
그러나 어느 치하에서 사나 마찬가지인 일반인들은 구경꾼처럼 태평했으며 밤거리의 여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도망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고도 한다. 사이공을 점령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도 예상과 달리 남베트남군이나 관료들을 학살하지 않았고 민심을 무마하여 다음날인 5월 1일 메이데이는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들이 탄압을 받은 것은 그후부터였다.
-42쪽
"하노이와 사이공 중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사이공이요. 사이공에는 물건이 더 많고 잘 살거든요." 이 공산주의를 믿는 아가씨도 혁명의 산실인 하노이보다는 자본주의 물결이 흐르는 사이공이 더 좋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43쪽
사이공 북서쪽 75km 지점에 있는 꾸찌 마을. 베트콩들의 근거지로 정글 밑에 총 길이 약 250km의 기가 막힌 땅굴이 있다.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 때 (1948-1954) 48km가 파였는데 프랑스와 싸우던 해방 전사들이 서로 연락하기 위해 만든 땅굴이다. 그런데 프랑스 대신 미군이 들어오고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면서 땅굴은 더 길게 확장된 것이다. 1966년 미군 제25보병사단은 베트콩들을 제압하기 위해 꾸찌 마을에 기지를 세웠다. 몇 개월 후, 땅굴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미군은 그 좁은 땅굴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46쪽
총 길이 200km의 땅굴은 사이공 강변까지 나 있는데, 이곳에서 싸우다 후퇴할 경우 사이공 강변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이 땅굴을 어떻게 팠는지 아세요?" 안내원은 호미와 작은 망태기를 들었다. "이곳의 토질은 아주 연합니다. 그래서 팔 때는 살살 긁어도 쉽게 파지는데, 일단 파이고 나서 공기와 접촉하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시끄럽게 삽으로 팠다가는 금방 들켜서 폭격을 맞을 텐데, 아낙네들이 호미를 들고 매일 몰래 쥐처럼 조금씩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47쪽
대나무 숲 땅속의 작은 구멍. 이 구멍은 바로 공기 구멍입니다. 미군들이 땅굴을 찾으려고 군견을 사용했을 때 우리들은 냄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우 살점을 그곳에 갖다 놓았지요. 그러면 군견은 우리 냄새를 못 맡았어요. 또 나중에는 우리도 미군이 사용하는 비누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군견들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해 매우 혼란에 빠졌지요. 또 정글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놓고, 땅굴 안에도 각종 함정과 폭탄을 설치해놓아서 미군이나 군견이 들어올 경우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중에는 군견도 무서워서 땅굴에 접근을 못 했어요. -48쪽
꾸찌 땅굴 안에는 굴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용도의 사무실, 방, 취사장 등이 있었다. 다시 좁은 굴속으로 기어들어가자 5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약 15평 정도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작전 회의실이라 했다. 책상이 있었고 뒤에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뜻의 구호가 걸려 있었다. 이 말은 호찌민이 늘 주장하던 것으로 그 당시 민족해방전선 투사들의 신조였다고 한다. 이 작전 회의실 구석에 함정이 하나 있었다. 가로 세로 약 1m 정도의 구멍 속에는 날카롭고 길쭉한 죽창이 꽂혀 있어서 바로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오는 침입자들은 모조리 그 함정으로 떨어져 죽게 되어 있다. 죽창이나 쇠꼬챙이에는 파상풍을 일으키도록 동물의 소변 등을 묻혀났다고 한다. 또 구석에는 매우 작은 땅굴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땅굴로 도망가면 베트콩들은 지하 2층, 3층의 통로로 내려가 꾸찌 땅굴의 끝인 사이공 강변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땅굴은 하나고 사방에 있는 다른 땅굴들은 가짜로 그곳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함정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미군들은 땅굴 입구를 발견하기 힘들었고, 발견해도 들어가기 힘들었고, 들어가도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정글에는 각종 함정, 부비트랩 등을 설치해놓았으니 미군들로서는 미칠 일이었다. -50쪽
결국 미군은 고엽제를 살포했다. 이걸 맞은 나무들은 금방 시들어서 잎이 다 떨어졌다. 그러면 정글은 잎이라고는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들만 가득한 음산한 곳이 된다. 이렇게 되면 베트콩들이 숨을 곳이 없어지므로 소탕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후일 이 고엽제 때문에 수많은 베트콩, 미군, 한국군이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온몸이 부르트고 신경쇠약에 걸리며 또 유전이 되어 뇌가 없는 신생아를 출산하는 등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 지금도 한국의 베트남 참전 용사 가운데는 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에 대한 정부의 보상은 미흡하기 그지없다. 고엽제를 뿌렸지만 미군은 베트콩을 근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미군은 꾸찌 마을을 ‘자유 공격 지대’로 선포하고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또 B52 조종사들은 다른 지역을 공습한 후, 돌아오다 남은 폭탄을 이곳에 투하했고 나중에는 융단폭격을 해서 땅굴 자체를 붕괴시키려고 했으며, 움직이는 것들은 무조건 사살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많은 땅굴이 함몰되기도 했고 베트콩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러나 미군은 이 무렵부터 서서히 발을 빼고 있어서 이곳에 있는 베트콩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53쪽
구석에 함정이 있었고 천장에는 지금도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 박쥐는 모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땅굴 속에 숨어서도 모기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54쪽
얼핏 생각하면 베트콩들은 의연하게 미군을 조롱하고 괴롭히면서 싸웠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사실 미군보다 더 많이 죽고 당한 것은 베트콩이다. 1만 6천 명의 꾸찌 게릴라 중 생존자는 6천 명이다. 꾸찌 땅굴은 아니지만 꾸찌에서 멀지 않은 캄보디아의 정글에서 투쟁했던 베트콩의 고위인사인 쯔엉뉴땅이란 사람의 증언을 보면 B52에 대한 공포감이 잘 나타나 있다. -B52의 폭격에 의한 공포는 대단했다. 폭격 중심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어도 B52가 투하하는 폭탄의 작렬음으로 고막이 찢어질 정도였다. 중심지에서 0.5km 이내에 있는 보강공사가 되어 있지 않은 엄폐호의 벽은 모두 무너져서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은 생매장이 됐다. 폭격이 끝난 후 폭탄 떨어진 곳에 가보면 직경 약 10m 정도 되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 B52가 포격할 때는 마치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인류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꼈고 신체의 모든 기능이 지리멸렬되어 수습할 수가 없었다. -55쪽
이렇게 어렵게 투쟁하던 베트콩들은 1968년 1월 말 구정 대공세 때 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지만, 사실 이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미군도 아니고, 북베트남의 정규군도 아닌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사인 베트콩들이었다.
-56쪽
여성 게릴라들은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생리할 때는 옷 냄새 때문에 부끄러웠고 밤이면 몰래 빠져나와 위험을 무릅쓰고 빨래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휴머니즘은 있었다. ‘보티모’라는 베트콩 소대의 여자 지휘관이 땅굴 입구에서 보초를 서다 미군 병사 세 명이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총을 겨누고 긴장 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미군들은 과자와 사탕을 나눠 먹더니 편지를 읽다가 울기 시작했다. 그때 베트콩 전령이 다가와 미군들을 사살하려 했으나 보티모는 조용히 제지했다. 결국 미군 병사를 공격하지 않은 보티모는 이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고 약식 군사 재판을 받았는데, 전령의 열띤 변호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녀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었고 4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열일곱 살의 전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령은 열 살짜리 소년이었다. 열일곱 살, 열 살...... 그리고 고향에서 온 편지를 보며 울던 20대 초반의 미군 병사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면 서로 미소 지을 소중하고 파릇파릇한 청춘남녀들이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이제 마흔이 넘고, 쉰이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보티모라는 여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을까? 열 살짜리 전령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살아난 그 울던 미군병사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까? -57쪽
여행 중 만났던 남부 베트남 사람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거만한 공산주의 관료들이 돈맛을 알고 나자 옛날 관리들보다 더 부패했다고 말했다. 반면 북베트남의 하노이에 가보니 사람들은 남베트남 사람들을 이렇게 깔보았다. "남쪽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퇴폐적이지요." "남부 베트남 사람들은 게을러요. 낮잠이나 자고. 그리고 예전부터 외국 세력에 빌붙어서 사는 근성을 버리지 못했지요." 낮잠, 즉 시에스타는 기후가 더운 남부 베트남에서는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현명한 방법이지만, 북베트남 사람들은 게으르게 보는 것이다. 여행자인 내가 보아도 남쪽과 북쪽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기질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59쪽
2001년 2월, 8년 만에 다시 사이공에 와보니 많이 변해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남주띤(남조선)이 아닌 한꾸옥이라 불렀고 한국 탤런트들과 드라마가 매우 인기를 끌었다.(특히 장동건) 차량과 오토바이는 더욱 많아졌고, 거리의 차량 행렬은 급속하게 빨라져 있었으며, 도시 전체의 건물도 높아졌다. 시클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2005년 4월, 친구들과 사이공에 갔다. 이제 2주일 미만의 베트남 여행은 비자가 필요없다. -67쪽
향락산업은 더욱 번창. 어느 나이트클럽의 풍경. 무대 위쪽에 제복을 입은 경비원 둘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위에는 사회주의의 계몽, 관리, 통제가 상징적으로 있고 밑에서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춤추는 모순적인 풍경. 한국에서도 베트남의 이미지는 전쟁을 탈피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이제 연 8%의 경제 성장을 하며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모든 게 밝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물론 베트남 노동자와 한국 고용주 사이에서 불협화음도 간간이 보이고,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베트남 처녀들의 불우한 결혼 생활도 종종 보도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대세는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수많은 한국 기업과 단체 관광객, 배낭여행자가 베트남을 방문하며 서로 벽을 허물고 있다. -71쪽
8천4백만 베트남 국민의 68%가 25세 미만이라고 하는데 공장의 근로자, 음식점 종업원, 상점, 거리에서 코코넛이나 셔츠를 파는 상인, 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매춘부...... 모두 젊은 여인들이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틀림없이 뒤에는 가난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잘 웃는다. 그래서 슬프고, 이들이 존경스럽다. 그렇게 모은 돈을 부모에게 보내고, 남동생에게 교육비로 보내면서 자기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우리의 과거 모습이 아닌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근대화, 자유, 민주, 물질적 풍요의 토대는 구호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처절한 희생으로 다져졌다. 서양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산업화와 그것과 상응해서 발전한 정치제도를 수십 년 안에 이루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빠른 시일 내에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앞장서서 뛰었던 사람들과 바닥에서 일하며 처절하게 희생했던 사람들. 그리고 인갑답게 살아보자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앞장서다 탄압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제 베트남이 그 길을 가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못지않게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은 그후의 일이다. 과연 베트남이 한국처럼 되면 행복할까? 요즘의 한국은 과연 행복한가? 그리고 우리가 뒤좇았던 미국, 일본은 바람직한 나라인가? 그렇다고 독재와 비효율성 속에 망해버린 공산주의가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는 없고. 과연 행복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베트남의 눈부신 성장과 열의를 보면 희망에 차다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며 우울해지기도 한다. -87쪽
베트남은 어느 도시든 아침 6시면 이미 활기차다. 식당은 문을 열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거리를 서서히 메우고, 어떤 이들은 운동을 한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더운 나라의 특성이지만, 특히 베트남은 더욱 그렇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얘기다. 참전 용사든, 기업가든, 여행자든, 한결같이 베트남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정 많고, 체면을 중시하며, 개방적이고, 교육열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한국과 비슷한 모습은 그 외에도 많다. 아마도 역사적 상황이 우리와 비슷하고 같은 문화권이기에 그런 것 같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고 불교도 다른 동남아 사람들이 믿는 상좌부 불교(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다. 그리고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생존했다. 중국의 영향권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프랑스를 물리쳤으며, 세계 최강의 미국에게 패배를 안겨준 나라다. -88쪽
미국과 수교 협상을 하는데 미국이 베트남전에 대해서 ‘보상’해주겠다는 말을 꺼내자, 베트남 측에서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보상이라니! 베트남전은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오. 패자가 승자에게 무슨 보상을!" 미국에 대항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북한도 그렇지만, 미국 앞에서 굽신거리며 도움을 받았으되 이제 크고 나니 미국을 아니꼬워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베트남의 자존심이 쉽게 이해가 간다. -89쪽
베트남에는 까오다이교라는 특이한 민족 종교가 있다. 까오다이교를 한자로 표시하면 고대교(高臺敎)다. 고대는 ‘높이 쌓은 대’를 말하고, 이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하느님, 혹은 상제를 믿는 종교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까오다이교의 목표는 이 번뇌가 가득한 세상에서 해탈하는 것인데, 유일신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까오다이교의 교리적 바탕은 불교, 유교, 도교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절대자 까오다이는 인류사에 걸출한 위인들을 통해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노자, 석가모니, 모세, 공자, 예수, 모하메드 등이라고 한다. 그뿐이 아니라 잔다르크, 데카르트, 셰익스피어, 빅트로 위고, 파스퇴르 등의 서양 인물들, 그리고 중국의 혁명가 쑨원과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 등이 절대자와 영혼의 교류를 했다고 주장한다. 까오다이에 포함된 종교와 인물은 이렇게 너무나 광범위해서 어리둥절할 정도인데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있다. -93쪽
까오다이교는 레반찌에우(응오민찌에우)가 창시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을 공부한 그는 서른두살인 1919년부터 신의 계시를 받은 후, 그를 포함한 12명의 주도로 1925년에 까오다이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6년 10월 24일 떠이닌 시에서 개도식을 가졌다. 그는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교리에 자신들의 조상숭배사상, 그리고 유럽의 과학적 심령주의를 혼합해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는데, 수많은 인류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통합한 것이 바로 자신의 까오다이교라고 선포했다.
-94쪽
까오다이교는 처음 1년 만에 신도가 6만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했고 1935년에는 1백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까오다이 교도는 약 2,3백만 명으로 남부 베트남에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떠이닌 시가 그들의 성스러운 도시다. 까오다이교는 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기본 계율을 외교, 내적인 명상수련을 내교라 한다. 외교에는 자신, 가족, 사회, 국가, 우주 만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며, 자연, 동식물, 인간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살생, 도둑질, 간음, 음주,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한 달에 최소한 10일간 채식을 해야 한다. 또한 매일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자정에 예배를 보며, 집에서 매일 최소한 한 번의 예배를 하도록 가르친다. 까오다이교는 정치에도 휘말렸었다. 일본군이 진주했을 때 플아스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에 협력하기도 하고, 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했을 때 타협하여 핵심 인물이 식민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그후 프랑스와 다시 싸우고, 응오딘지엠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까오다이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응오딘지엠 정권 쪽으로 붙고 나머지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95쪽
결국 그 당시 까오다이교의 지도자였던 팜꽁딱은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1959년에 죽었다. 그 후부터 까오다이교에는 대주교가 없고 지도자들도 공석 상태이다. 그러면서 교세가 위축된 까오다이교는 미국, 플아스, 캄보디아 등과 연관된 3개의 세력으로 분화되고, 베트남전에서는 베트콩을 지원하지 않다가 적화통일이 되자 탄압을 받았다. 사원이 가진 모든 토지를 공산정권이 몰수했으나 1985년 베트남 정부가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펴면서 총본산과 400여개의 사원이 교단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와 노자,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그렇다치더라도, 이태백, 강태공, 관운장은 왜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을 다 통합하려는 시도 같다. 이런 시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통, 종교, 철학, 문학적 기반 위에 프랑스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친숙해진 잔다르크, 빅토르 위고 등이 등장하면서 종교, 철학 등의 통합 못지않게 동서양의 정서적 교류와 만남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참 똑똑하다. 외부의 것을 배척하지도 않고 무조건 맹종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 것을 만든 후, 현재까지 약 2,3백만 명의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99쪽
저 멀리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장장 4,500km를 흘러가는 메콩 강은 중국, 미얀마는 물론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기름지게 하는, 어머니의 젖줄 같은 강이다. 베트남은 그중에서도 이 강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다. 거대한 메콩 강 연안에 있는 메콩 삼각주는 전체 국토의 12% 정도를 차지하지만 베트남 쌀 수출량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비록 가난하지만 어딜 가나 쌀과 과일 등이 풍부하다. 모두 메콩 강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102쪽
베트남 인구는 2006년 기준 8400만 명. 베트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 논에 묘를 만드는 것이 전통. 베트남에서는 불어나 영어를 잘하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 베트남어로 비엣(Viet)은 ‘다시 합친다’는 뜻이고, 남(Nam)은 ‘물’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물이 다시 합치는 나라지요. 즉 베트남은 ‘물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쓰는 원뿔형 모자 논라. ‘논’은 모자, ‘라’는 잎이라는 뜻.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쓰지요. -103쪽
쩌우독을 비롯한 메콩 델타 지역은 한때 크메르인의 땅이었고 지금도 크메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캄보디아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111쪽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중앙의 안방에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반터(제단)라는 것을 설치한다.
-114쪽
달리다 보니 창밖으로 ‘한진 스포츠 센터’ ‘뉴코아 백화점’ 등의 한글이 적힌 대형버스들이 달리고 있었다. 한때 저런 버스들은 백화점에서 많이 운영했는데 금지를 시키자, 이렇게 동남아 등지에 헐값에 팔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한글을 지우면 오히려 값이 안 나가서 일부러 안 지우고 다니는데,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버스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17쪽
속짱 역시 번잡한 도시였다. 이곳은 인구의 28%가 크메르 족이고 그들이 세운 불교 사찰이 있다.
-119쪽
길쭉하게 늘어진 베트남 지도를 보면, 배꼽에서 허벅지 되는 부분에 중부 고원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길고 긴 쯔엉 산맥의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데, 쯔엉 산맥은 바로 호찌민 루트가 있는 산맥으로 북베트남의 수많은 게릴라가 이 루트를 통해 내려왔고, 탄약과 물자를 남부 베트남의 베트콩들에게 지원했다. 이 쯔엉 산맥에는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남쪽 끝의 달랏(Da Lat)이라는 곳에는 랏족이 살고 있다. 달랏이란 랏족의 말로 ‘랏족의 강’이라는 뜻이다. 달랏은 해발 1.475m의 고지대여서 기온이 늘 서늘한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12년부터 프랑스인들이 개발하면서 휴양지가 되었고, 베트남전 당시에도 서로 암묵적으로 전투를 피한 남베트남 고위 관료들과 베트콩 간부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번도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달랏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 계곡, 폭포, 마지막 황제의 여름 궁전과 프랑스풍의 예쁜 집들이 있어서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멈추질 않고,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드는 곳이라 했다.
-124쪽
베트남의 절에는 언제나 꽃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138쪽
베트남 커피는 로부스타 종이라 매우 쓰다. 커피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우리가 늘 마시는 대부분의 원두커피는 아라비카 종이다. 해발 약 8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부드러운 맛의 이 고급 커피는 중남미와 에티오피아,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반면 베트남 커피는 로부스타 종으로, 해발 600m 이하에서 재배되고, 카페인이 많고 맛이 쓰다. 아프리카나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인들도 그곳에서 주로 생산되는 로부스타 종을 많이 마시는데, 쓴맛을 없애기 위해 우유를 많이 탄 카페오레 등을 개발했다고 한다.
-141쪽
냐짱은 현재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다. 투명한 바다, 고운 백사장, 그리고 카이트서핑, 보트서핑,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등의 해양 스포츠, 그리고 온천까지 있어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153쪽
쏨봉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산 위에 뽀나가르 참탑이 나왔다. 이곳을 지배하던 참 왕국은 힌두교를 믿었는데 그 유적지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승불교를 믿고 있지만 이렇게 힌두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154쪽
3월 말인데 벼 추수를 하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탈곡기로 벼를 추스른 후, 바닥에 볏짚을 깔아놓았다. 어떤 곳은 낫으로 벼를 베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보통 2모작, 3모작을 한다니 먹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165쪽
한국군은 주로 중부 지방에 주둔했다. 야전군 사령부가 냐짱에 있었고 병참부대인 십자성 부대가 냐짱의 북쪽 근교에 주둔했다. 그리고 뜨이호아 지역에는 전투부대인 백마부대가 주둔했고, 조금 더 올라간 뀌년에는 수도기계화사단인 맹호부대가 주둔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간 다냥 근처의 호이안과 쭐라이에는 해병대인 청룡부대가 주둔했었다. 이 중부지역은 서쪽으로 쯔엉 산맥이 있고 그 산맥 속에 호찌민 루트가 있어서 이 지역의 베트콩들은 북부로부터 병력을 비교적 풍부하게 공급받고 있었다 한다. 사이공 시내에서 폭탄 투척이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북에서 교육받고 온 정규군 같은 베트콩이어서 처음에 전투 경험이 없던 한국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한다.
-166쪽
어쨌든 이럭저럭해서 알아낸 바로는 풀람은 넓은 지역 이름이고, 구체적으로 사건이 일어난 곳은 푸니에우란 곳인데 약 50km 정도 떨어진 산골 부락이란 얘기였다.
-169쪽
눈치로 보니 엉뚱하게 통역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 사람이, 한국군 아버지가 여기 와서 싸우다 죽어서, 그 현장을 찾아왔나봐요!" 분명히 그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당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아버지가 여기 와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게 되는 건데...... 짧은 순간이나마 입술이 바짝 탔는데 사태는 계속 예상치 않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여든 사람들이 "아하"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참 안됐다’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173쪽
고마웠다.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전사한 줄 알고 나서 더 친절하게 해주었던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국군의 아들이라고 해코지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174쪽
호이안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제3의 도시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도시인데,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양복점, 혹은 양장점이 많으며 어떤 디자인이든 주문하면 하루 만에 만들어주어서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 했다.
-197쪽
호이안 역사박물관은 과거 찬란했던 호이안 역사를 느끼기에는 부족했는데 그 옆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1653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사당이었는데 관운장이란 인물은 중국 문화권에서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든, 화교들이 사는 곳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종종 보인다. 1539년에 만들어진 ‘일본 다리’는 중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 사이에 만들어졌다. 16세기에 많이 활약한 일본 상인들은 이 다리를 만들었지만 1637년 도쿠가와 막부가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면서 일본인들은 다시 나타날 수 없었다. 그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로 상인들이 아닌 군인이었다.
-201쪽
호이안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이유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8년 북쪽의 하노이에서 일어난 레러이는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16세기 중반 실질적으로 북쪽은 찐씨가 중부는 응우옌 씨가 지배하게 되면서 남북이 분단됐다. 유럽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이 무렵이었다. 1511년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레이시아의 서부 해안 도시 멜라카를 점령했고, 1540년에는 베트남 중부 해안의 호이안으로 와 교역했는데 이곳을 파이푸라 불렀다. 당시 호이안은 응우옌 조의 대외 무역항으로 포르투갈 사람들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 프랑스 사람, 영국 사람들이 들어왔으며,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호이안의 전성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였다. 이 시기에는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되었는데 외국에서 온 상인들은 남북 간의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고, 또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호이안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명나라의 무역 금지 정책이 해제되어 중국인의 남해 무역이 자유로워졌고,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외무역을 크게 장려하여 호이안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거주지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투본 강에 실려온 침적토가 해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바다가 너무 얕아져 큰 선박이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 호이안의 명맥은 끊기고, 대신 부근의 다난ㅇ이 국제무역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2쪽
호이안은 등불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가들이 많다 보니 전기가 없던 옛날, 넓은 집을 밝히기 위해 등이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구시가지 곳곳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했다.
-208쪽
베트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무역항이 호이안인데 그곳이 쇠락하면서 19세기말부터 다낭이 그 명성을 이어받았다. 항구도시로 발전한 다낭에 미군이 최초로 상륙하고 주둔하면서 남부 베트남에서 제2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 도시가 북베트남의 대공세인 1975년 3월 말 지옥으로 변했다. 다낭 북쪽에 있던 후에가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고, 뒤이어 바로 남쪽의 호이안이 3월 27일 함락되자 다낭은 고립되면서 극심한 공포 속에 빠졌다. 3월 28일 아침부터 모든 남베트남 정부의 공공기관은 기능을 상실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폭도가 되어 민간인들의 돈과 시계, 카메라를 강탈하기 시작했으며 시민들은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거대한 심리적 공황 상태가 온 것이다. -213쪽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찍자고 하면 늘 기뻐했다. 그들은 나에게 주소를 적어주며 사진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217쪽
우메노와 함께 다낭 시내에 있는 참파 왕국의 유적지 조각을 모아 놓은 박물관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참파 왕국이 믿었던 힌두교의 유물들이 있었는데, 창조의 신 바르흐마, 보호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와 죽음의 신인 시바 들의 신상이 있었고, 남근을 형상화한 링가, 비슈누 신이 타고 다녔다는 전설상의 새 가루다, 시바 신의 아들로 코끼리 머리를 한 재물신 가네샤 신상, 인도의 신화 라마야나와 관련된 조각 등 많은 전시물이 있었다. 중부 지방은 원래 참 족의 무대였다. 참파 왕국을 일으킨 참 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의 사람들로, 2세기 말경 럼업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훗날 참파 왕국이 된다. 이들은 인도문화를 수용하며 힌두교를 믿었고, 한때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앙코르 왕국을 공격해서 앙코르 유적지에 있는 바욘 사원의 벽에는 참파 왕국과의 전투가 부조로 새겨져 있을 정도다. 참파 왕국은 중부와 남부 베트남을 지배하며 14세기 중반까지도 북베트남과 치열하게 싸웠고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13세기 후반에는 중국을 통일한 원이 동남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만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려고 해상으로 공격해 참파 왕국의 수도 비자야를 점령하였으나 게릴라전 때문에 고전했다. 이에 원나라는 육로를 통해 참파 왕국을 멸하기 위해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쩐 왕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2백여 년(1225-1400)동안 존속한 리 왕조의 뒤를 이어 등장한 쩐 왕조(1225-1400)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과 싸웠는데, 여기서 민족의 영웅 ‘쩐훙다오’ 장군이 원군을 격파했다. 이렇게 몽골이 공동의 적이었지만 북베트남의 쩐 왕조와 남베트남의 참파 왕국은 서로 적이었다. 14세기 중반 강성해진 참파 왕국은 약 30년 동안 끊임없이 북베트남의 쩐 왕조를 침략했고 또한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223쪽
그런 가운데 북베트남의 쩐 왕조는 내부에서 몰락했고, 새롭게 권좌에 오른 호뀌리는 국호를 다이응우로 바꾼 후, 참파 왕국을 밀어붙이며 공격했다. 그러자 참파 왕국은 새롭게 일어난 중국의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명나라 군대가 1407년, 다이응우를 멸망시킴으로써 북베트남 지역은 독립한 지 4백여 년 만에 또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러나 명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다. 21년 후인 1428년 레러이는 명나라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1470년에는 참파 왕국을 침입해 수도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으며 참파군 6만을 살해하고 군민 3만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제 참파 왕국은 냐짱 부근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가 되었고 다이비엣의 속국이 되었다. 참 족은 그러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비엣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을 다스리던 응우옌 씨가 주민들을 이주시키며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해오자 1611년과 1653년에 응우옌 씨 정권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그후부터 참 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냐쨩의 뽀나가르 탑이나 다낭의 참 족 박물관은 그들의 융성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빈약하기 찍이 없었다. 또한 호이안 부근 미선에 있는 참파 왕국의 유적지도 베트남전 당시에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패자의 설 자리란 그리 넓지 않았다. 참 족은 계속 남으로 옮겨가는데 응우옌 씨는 점령지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더욱 세력을 다지고 수도를 후에로 옮긴 후, 18세기 중반에는 메콩 델타 지역까지 지배하게 됐다. 그후 응우옌 씨 집안의 응우옌푹아인이 1802년 전 베트남을 통일하면서 최후의 전통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수립했고 참파 왕국은 소멸되었다. 그후 참파 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225쪽
늘 후텁지근하고 건기와 우기로 두 개의 계절밖에 없는 호찌민 시에 비교해 하노이는 4개의 계절이 있다. 겨울에는 높은 산에 눈도 온다는데 4월 초의 바람은 서늘했다. 호찌민 시도 그렇지만 하노이 사람들 역시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아니, 전 베트남에서 아침 6시만 되면 길은 이미 흥청거렸다. -234쪽
(1993년)도대체 이게 뭐지? 베트남의 수도이며 베트남 공산주의 심장의 현실이 이거였나? 내가 공산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래도 걸출한 지도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 이긴 나라의 심장이, 그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업신여기던 사이공에 비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후유증, 소련의 붕괴,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공산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비효율성, 관료들의 경직성, 그리고 시민들의 무기력이 하노이 곳곳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244쪽
내 경험에 의하면 유독 공산권이었던 중국, 동유럽,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가 만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은 그 순박하던 동남아의 라오스, 캄보디아 사람들조차 돈맛을 알아가고 있다. 이런 것은 민족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자본의 갭에서 오는 문제 아닐까? 공산권 국가들은 그들이 무너진 후 갑작스럽게 그들의 빈곤함을 깨달았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웠고 그런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무너지고 그들의 빈곤은 처참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외국 관광객들이 갑자기 들어와 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허탈감 속에서 ‘자본의 갭‘을 충격적으로 느낀 것 같다.
이런 자본의 갭을 메우려는 현상들은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중국은 처음에는 국가에서 이중가격제를 시행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발전하자 그것을 철폐했고 내외국인 차별 없이 정가로 받는 분위기로 변했다. 물론 그만큼 물가는 비싸졌다. -256-258쪽
(2005년) 여기가 하노이가 맞는가? 역사는 멋지게 바뀌었고 그 앞은 수많은 차량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59쪽
11세기 초, 약 1천 년간 계속된 중국의 지배를 벗어난 리 왕조는 오늘날의 하노이 땅에 도읍을 정하고 ‘탕롱’이라 불렀다. 그 이래 하노이는 약 1천 년간 베트남의 수도였다. 용이 승천했다는 뜻의 ‘탕롱’은 리 왕자가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금색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또한 15세기 초 북부 베트남 지역은 중국 명나라의 침입을 받고 백성들은 신음했다. 이때 비엣 족의 영웅 레러이는 명나라를 물리치고 1428년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그가 명을 물리치기 위한 비검을 받은 곳이 바로 하노이의 호안끼엠 호수였다. 이 호수는 구시가지 부근에 있는데 우리 식대로 읽으면 환검호다. 레러이가 이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거북으로부터 비검을 받아서 명나라를 물리쳤는데 전쟁이 끝난 후 거대한 거북이 다시 그 비검을 돌려받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265쪽
할롱 베이, 즉 할롱 만은 1,500제곱 킬로미터 넓이에 약 3천 개의 암석이 떠 있으며 1994년에는 유네스코가 보존해야 할 인류의 자연 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이어서 유명해졌고, 한국에서도 어느 항공회사 CF의 배경이 되어 익숙한데 중국의 구이린과 비슷한 풍경이다. 할롱은 ‘하룡’의 베트남식 발음으로 용이 내려왔다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바다로 내려와 해안을 달리면서 꼬리를 휘저어 계곡과 협곡이 파이면서 지금과 같은 풍경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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