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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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것은 1965년, 철수한 것은 1973년이었다. 8년이나 계속되었고 30만 명이 넘는 한국군이 머나먼 이역만리에 파병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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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게’된 지금 우리는 베트남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좀 더 옳게는 인도차이나에게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이 참전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인도차이나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전쟁이 베트남전쟁으로 호도되기를 바라겠지만 비밀폭격과 군사작전으로 덧없이 스러져간 100만이 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민중의 희생은 진실을 베일 뒤에 가리기에는 너무도 크고 참혹했다.
전후의 캄보디아는 의심할 바 없이 킬링필드였다. 수십만 명의 아사자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야 했다. 1960년대까지 쌀을 수출하던 캄보디아는 전쟁이 끝나자 식량자급률 20%라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누가 수십만 명의 크메르인들을 아사로 몰아넣었는가? 폴포트인가, 곡창지대를 불모지로 만들었던 미국인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승리의 주역이었던 베트남은 미국이 패퇴한 인도차이나에서 스스로 패권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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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에는 한국산 차량들이 많다. 특히 버스와 승합차 그리고 소형트럭은 예외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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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물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이후 통일된 베트남에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사이공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쁘레노꼬라고 불렸다.

베트남을 침략한 것은 중국 독일 포르투갈 프랑스 미국 등이다. 중국을 제외한다면 근대 이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침입이다. 외침의 역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베트남의 역사는 남진(南進)을 시작했던 15세기 이후 줄곧 침략의 역사이다. 지금의 영토는 그 침략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중부베트남은 원래 짬빠 왕국이 지배하던 영토였지만 베트남은 18세기 초에 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의 남부베트남은 원래는 크메르민족의 땅이었다. 베트남이 이 땅을 침탈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홍강(홍하) 삼각주 유역에서 시작해 이른바 수백 년의 남진을 통해 얻은 것이 지금의 베트남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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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 북쪽에 위치한 미토는 원래 타이완에서 박해를 피해온 중국인들이 거주하던 차이나타운이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1680년대이다. 1624년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37년간의 지배 아래 놓였던 타이완은 1661년 대륙의 명나라가 침공하여 다시 한족의 지배를 받았다. 아마도 이후 타이완 원주민들과 대륙에서 건너온 한족 지배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일부 원주민들이 미토까지 와 정착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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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시아에 걸쳐 화교자본과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이나타운이 맥을 추지 못하는 나라로는 단연 베트남과 남한이 으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남한이 차이나타운을 어떻게 요절을 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남한보다 더 참혹하게 차이나타운이 멸절한 시기는 1975년 통일 이후이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후 중국은 인민해방군을 앞세워 베트남국경을 넘었다. 명분은 ‘버릇 고치기’였다. 소련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전면전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소비에트 진영을 자처했던 베트남이 친 중국의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을 중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국경 너무 랑선을 점령하고 버릇을 고쳤다고 선언한 뒤 물러섰지만 베트남의 버릇이 고쳐졌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변변한 실전경험도 없이 뒤쳐진 화력으로 국경을 넘은 인민해방군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렀고 소련제와 미제 첨단무기로 무장한 베트남군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10여일의 전투 끝에 무려 2만여 명의 인민해방군이 전사한 말뿐인 승리였다.
-27쪽

중국이 베트남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벼르게 된 이유는 캄보디아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화교들을 집요하게 탄압한 베트남에 대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베트남은 화교들을 자본주의의 구악(舊惡)으로 몰아 재산을 일방적으로 몰수했고 거주지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펼쳤다. 1975년 남북통일 이후에는 베트남 전 지역에서 화교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는데 남부에서는 상당수의 화교들이 보트피플 신세가 되었고, 북쪽에서는 국경을 넘어 밀물처럼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90년대 이후 화교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하나둘씩 돌아오면서 호찌민에도 차이나타운이 들어섰다.
-28쪽

길가의 포스터가 아니더라도 베트남의 어디에서도 호찌민의 초상 흉상 동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9쪽

1920년대 창시된 기불선 종합의 까오다이는 ‘메이드 인 베트남’ 종교이다.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창시되었으니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중국에서 전래된 베트남의 유교돠 도교를 받들고 메콩 삼각주의 상좌부 불교를 혼합하였으니 다양한 종교적 배경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구원하기에는 일면 적절하였을 것이다. 까오다이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가톨릭세력과 행보를 같이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가톨릭세력이 프랑스 인도차이나 식민통치의 첨병역할을 하고 1954년 이후에는 남베트남 응오딘디엠 독재정권의 버팀목이 되어줄 동안에 까오다이는 불교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양대 종교세력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핏줄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30쪽

베트남의 메콩삼각주에서는 대개 석 달에 한 번씩, 삼모작을 한다. 캄보디아는 이모작에 불과하고 그도 못해 일모작에 그치는 논들도 숱하다.
지금 베트남은 태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쌀 수출국이다. 그런 베트남이 1980년대 초반인가 중반인가까지는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는 쌀 수입국이었다. 이제는 메콩삼각주의 소출만 가지고도 베트남인구 전체가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32쪽

짜빈은 메콩삼각주에서 크메르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다. 한때는 이 땅의 주인이었던 그들은 지금은 소수민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현대사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은 1945년 이후 호찌민의 베트민이 캄푸치아크롬의 크메르인들을 살육한 사건과 미군에 협조했던 ‘화이트스카프’라고 불리는 크메르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으로 요약된다.
-33쪽

캄푸치아크롬, 메콩삼각주의 크메르인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 말과 베트남 말을 모두 쓰는 베트남 속의 소수 민족으로서이다.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캄보디아인들을 발뒤꿈치의 때만도 못한 존재로 여긴다. 심지어는 먹고살기 힘들어 캄보디아로 흘러들어간 베트남인들조차 그렇다. 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깜푸치~’라는 말은 ‘깜푸치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조롱 섞인 말이기 쉽다. 베트남 내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약하기 짝이 없지만 해외에서는 캄푸치아크롬의 캄보디아 반환을 목표로 하는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15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해외 단체들은 800만 명에 달하는 크메르인들이 캄푸치아크롬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34쪽

호찌민은 인도차이나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혁명가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한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평생 꿈꿔왔던 혁명은 이루어졌으며 그 영예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호찌민 자신에게 바쳐졌다. 무엇보다 그는 사후의 오욕을 피해간 몇 안 되는 공산주의 혁명가 중의 하나다. 그는 또 자신의 조국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의 존경과 애정을 한껏 누렸으니 혁명가로서 그 이상의 영예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호찌민이 쌓은 위대한 업적으로 조금도 훼손할 의도는 없지만 그를 숭배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결국 불행과 비극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베트남공산당 지도부의 책임이라고 말하겠지만, 절반은 인정할 수 없다. 그 절반은 호찌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호찌민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패권주의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인도차이나공산당의 주도권을 쥐었던 그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공산주의 운동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40쪽

소비에트와 코멘테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스딸린 식 노선을 견지했다. 스탈린의 소련이 동유럽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호찌민 역시 베트남을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비타협적으로 앞세웠다. 심지어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을 각각 공산당으로 분화시킨 것도 베트남혁명의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후일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결과적으로 이 두 나라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것은 호찌민이 생전에 견지했던 노선의 자연스런 계승이자 귀결이었다. 때문에 호찌민 사후 혁명이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폭발한 인도차이나 삼국간의 갈등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소간의 분쟁과 베트남과 중국 간의 역사적 구원(舊怨) 같은 배경을 고려한다 해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의 패권주의는 결과적으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의 패권주의는 결과적으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인도차이나 인민을 형제간의 전쟁에 몰아넣어 피흘리게 한 점에서 혁명의 대의를 비켜간 것이었다.
-40쪽

호찌민 사후 베트남을 지도한 것은 군사주의였다. 물론 혁명이 장기전의 형태를 띤 상황에서 이는 불가피했다. 초강대국이자 이미 한반도에서 피범벅이 된 손을 인도차이나에 들이민 미국과 싸울 다른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5년 마침내 혁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후 통일베트남이 직면한 과제는 군사주의적 혁명을 건설적 혁명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에 따른 분단에서부터 사이공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호찌민을 포함한 군사 엘리트인 혁명1세대들은 남북문제와 군사적 투쟁에 있어 적잖은 오류를 범했다. 호찌민의 적자들인 통일베트남의 군사 엘리트들은 그 오류를 비판하고 시정하는 건설적 방안 대신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통일베트남을 군사주의적으로 통치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쉬운 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또 가장 익숙한 전쟁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형제간의 전쟁이라 불리는 캄보디아와의 전쟁이었다.
-41쪽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이 같은 군사주의적 대외정책은 인도차이나를 동서냉전과 중소분쟁의 화약고로 바꾸어버렸다. 모든 고통을 인도차이나를 동서냉전과 중소분쟁의 화약고로 바꾸어버렸다. 모든 고통은 인도차이나인민들의 몫이었지만 통일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은 호찌민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41쪽

베트남국기는 붉은 바탕에 큼직한 별이 단 한 개 노란색으로 박힌 황성적기이다. 적과 황의 배색이 강렬하기 짝이 없는 이 국기는 적색바탕에 노란색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전통적인 공산당기와 함께 베트남 어디에서나 펄럭인다. 별은 공산주의국가의 국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이다. 별은 언제나 공산당과 인민을 나타낸다. 중국의 오성홍기는 아주 전형적이다. 붉은 바탕은 혁명을 의미하고 큰 별은 인민을 영도하는 중국공산당을, 큰 별을 반원으로 감싼 작은 네별은 각각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의미한다.
별이 하나만 등장하는 것이 베트남국기만은 아니지만 그저 붉은 바탕에 별이 딱 하나인 것은 찾기 힘들다. 베트남은 이 별이 통일과 승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별은 베트남공산당이며 일당독재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권위인 이 별은 또 호찌민이기도 하다.
-43쪽

쌀국수는 이제 세계적으로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아니고 쌀로 만든 국수여서 한국이나 일본의 국수와도 다르고 조리된 야채가 아니라 생야채를 그대로 얹어 먹는 특이함 때문에 세계 식도락가들의 구미를 당겼을 것인데 쌀국수가 이렇게 세계적 음식이 된 계기는 아무래도 1970년대 말 남중국해를 떠돌았던 보트피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세아니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 등지로 퍼져나갔던 이들 난민은 베트남음식을 세계로 전파한 주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쌀국수와 베트남음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베트남인들도 한국이 받아들인 약간의 난민들이었으니 쌀국수를 세계적인 음식으로 만든 공은 누가 뭐래도 보트피플에게 돌아가야 하겠다.
-53쪽

야자즙의 맛은 그저 밍밍하지만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그만이며 물과 비교하면 짭짤달달하기 때문에 생수 먹는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 먹고 난 야자통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는데 대표적으로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컵 등의 공예품을 만들며 그 중에는 옻칠까지 해놓은 상품(上品) 중의 상품도 있다.
파인애플은 애플처럼 나무에 열리는 것도 아닌 풀의 일종이다. 무와 비슷한데 뿌리는 아니고 엄연한 열매이다.
-61쪽

베트남에서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을 대표하게 된 미라이 양민학살은 1968년 3월에 벌어졌고 504명의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학살을 지휘했던 미군 중위 윌리엄 켈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무고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이 폭로된 만행을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책임져야 할 범죄자들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종신형을 언도받아야 할 범죄자들은 대통령 존슨과 닉슨을 비롯한 위정자와 미국의 군산복합체였다. 물론 그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71쪽

독립의 아버지, 해방의 아버지, 혁명의 아버지 호찌민. 미혼으로 자식을 남기지 않았던 그는 이처럼 베트남 인민이라는 자식을 남겼다. 호찌민 사후 베트남에는 호찌민의 이름과 겨룰 수 있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베트남공산당의 통치는 호찌민의 유훈 통치나 다름없었다. 호찌민이란 거대한 권위를 전면에 내세운 베트남공산당은 일사불란한 일당독재 체제를 완성했고 그동안 문제없이 유지해왔다.
도이머이로 시장경제란 괴물과 대적하고 있는 오늘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정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개방 이후 중국이 겪은 톈안먼 사태는 강 건너의 불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베트남의 대부 노릇을 했던 소련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도이머이로 나아갔을망정 베트남 공산주의정권은 요동도 하지 않았다. 감탄할 정도로 튼튼한 정권이다.
-75쪽

죽은 호찌민을 내세우고 산 자들이 면죄부를 얻었으니 개혁이란 언감생신이다. 호찌민의 적자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으니 고인 물이 썩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보응우엔지압 같은 1세대 전쟁 엘리트들이었다. 베트남이 무력에 기초한 경찰국가가 된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이들은 호찌민을 신격화하고 그를 사상적 통제의 근간으로 삼아 지난 30여 년 동안 체제와 권력을 지켜냈던 것이다.

-77쪽

1912년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부가 다랏에 도시를 건설하기 전까지 이 고산지대에는 이름처럼 랏족이 살았다. 도시가 건설된 후 비엣족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다랏의 원주민들은 소수민족이 되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다랏과 주변의 농민들 대부분은 남부에서 이주한 비엣족들이다. 투어의 첫 번째 기착지인 랏마을은 다랏 주변의 랑비안 산기슭에 있는 랏족의 마을이다. 가이드는 랏족에 대해 피부가 검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명쾌한 설명을 건넨다. 그 뉘앙스가 마치 열등한 종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 흔쾌하지 않은데 문득 얼굴에 복면을 두르고 팔까지 긴 장갑으로 덮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던 호찌민의 여인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살면서 기를 쓰고 그을리는 것을 피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메콩삼각주의 크메르인들이나 지금 이 랏족들과는 달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다.

-86쪽

현재 베트남의 가톨릭인구는 전체 인구의 8~10%를 헤아린다. 가톨릭만큼 베트남의 근현대사와 밀접한 종교는 없을 것이다. 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통해 뿌리내리기 시작한 가톨릭은 17세기 말엽에는 80만 명의 신자를 가질 만큼 세를 확장했지만 왕조의 박해를 받았고 중국에서처럼 제국주의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인도차이나에서 가톨릭은 국교처럼 번성했고 그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프랑스의 퇴장과 함께였다.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북베트남에 정권을 수립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가톨릭을 탄압했고 무려 90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북위 17도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응오딘디엠 정권의 절대적인 지지층이 되었다. 1975년 이후 남베트남에서 가톨릭의 운명은 정해진 수순을 밟았다.
1990년 이후 가톨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예전의 영화를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3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이처럼 쉽사리 부활할 만큼 가톨릭의 뿌리가 깊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88쪽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는 않았지만 인생이야 그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던 바오다이는 1945년 호찌민에 의해 퇴위 당했지만 홍콩으로 망명한 후 1949년 프랑스가 코친차이나와 안남, 통킹을 합병하면서 세운 베트남국의 꼭두각시 국가수반으로 세워져 돌아왔다. 결국 바오다이는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1955년 8월의 총선으로 남베트남에 응오딘디엠 정권이 수립되면서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응오딘디엠은 말뿐인 바오다이 정권에서 실세인 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91쪽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남쪽에서는 응오딘디엠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그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독재자였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남베트남에서 그 응오딘디엠정권에 대항하던 세력들 중 하나는 불교승려들이었는데 후에의 티엔무 사원은 그 본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기 전 세계의 해외토픽란을 장식했던 사진 한 장이 있다. 남베트남의 승려인 틱꽝득이 응오딘디엠정권의 폭정에 항거해 가부좌를 틀고 분신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결국 1963년 11월에 남베트남에서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디엠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116쪽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나뉜 베트남은 그 위도를 따라 비슷하게 흐르던 벤하이 강 남북으로 한시적인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한반도가 그랬듯이 베트남의 그 누구도 이 비무장지대가 20여년의 분단으로 이어지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었고 베트남은 한반도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1956년으로 예정되었던 남북베트남 총선은 한반도에서처럼 단독선거로 귀결되고 분단은 고착되었으며 결국은 전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 결과 300만 명의 베트남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118쪽

호찌민트레일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잇는 군수물자와 병력의 보급로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뚫린 수많은 루트의 총칭이다. 미군은 호찌민트레일의 존재를 명분 삼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폭격하기도 했다. 전쟁 후 호찌민트레일의 일부는 도로로 개발되기도 했고 다리가 되기도 했으며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

-120쪽

벌어진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울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전쟁지도자들은 손쉽게 전쟁을 결정하고 국민과 인민을 선동하고 민족과 민족을, 종교와 종교를 이간한다. 그 뒤에는 언제나 비열하고 무책임한 호전주의자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오직 승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처참한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땅과 집과 논들을 불태울 뿐이다.

-121쪽

전쟁주의자와 군사주의자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명이란 군수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에도, 비무장지대에도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을 이끌었던 북베트남의 군사 엘리트들은 평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캄보디아와의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그들 군사주의자들이었고 라오스에 베트남군을 주둔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베트남전쟁의 영웅은 누구인가? 유감스럽게도 승리의 실질적인 주역은 미국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한 미국 민중과 세계의 민중, 그리고 세계의 민중을 반전운동으로 몰아넣은 베트남민중의 참혹한 죽음과 참상이었다. 전쟁의 비극을 막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123쪽

말이 달라도 이렇게 다른 베트남과 한국은 모두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탓에 문화적 공감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문자만 해도 한자를 빌려 쓰다 지금은 꾸옥응우라는 표음문자를 사용한다. 한글도 표음문자이지만 다른 점이라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시한 것이요, 꾸옥응우는 로마자를 빌려 표기하는 것이다. 이래서 조금만 애를 쓰면 의미를 눈치 챌 수 있는 단어들이 적지 않다.

-124쪽

같은 한자문화권이라고는 하지만 베트남이 한국보다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더 수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발음에 성조랄 것이 없는 한국어에 비해 베트남어의 6성조는 고작(?) 4성조의 중국어쯤은 소화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한자로 표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베트남에서는 한자의 음을 빌리거나 고유어의 음을 표기하는 한자와 그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합성하거나 한자의 의미를 합성한 쯔놈이란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 문자를 쓴 문학작품들은 13세기에 들어 등장하는데 프랑스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문자는 베트남의 고유문자로 발전했을 것이다.
-125쪽

하노이의 사람들은 호찌민의 사람들보다 여유가 있고 표정도 덜 각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이머이 초기 베트남에 질린 외국기업들은 차선으로 북부를 버리고 호찌민으로 몰려갔으니 체제의 배타성은 하노이가 위에 서는 것인데 체제에 대한 자부심도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노이, 베트남의 혁명수도. 베트남의 모든 권력은 하노이에서 나온다. 총과 사상이 하노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지난 반세기 이상 베트남을 지배해온 상징이며 실체이다. 읻 h시는 또 세계사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전쟁과 혁명의 진지였다.
-129쪽

몰락 이전 소련에서 레닌이 차지했던 위치를 고스란히 재현한 이 거대한 묘는 레닌과 마찬가지로 방부 처리된 호찌민의 시신을 경배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호찌민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은 자들 탓이다. 생전의 호찌민은 화장을 원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유언조차도 널리 선전하고 있다. 죽은 자에게는 매우 가혹한 일이다. 머리는 아프더라도 살아서 책임을 지는 피델 까스뜨로가 더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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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베트남의 국화(國花)이다.
연꽃은 두루두루 의미심장한 꽃이니 인도에서는 다산(多産)과 힘 그리고 생명의 창조를 의미하고 영원불사를 상징하며 부처의 탄생을 알리는 꽃이다. 중국에서도 불교의 전래 이전부터 연꽃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으로 속세에 물들지 않은 군자를 상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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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는 호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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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역사에서 영웅의 칭호는 대개 중국과 싸워 이긴 황제나 장수에게 헌정된다. 명(明)과 싸워 이긴 레왕조의 시조 레러이도 그렇고, 박당강에서 당(唐)을 물리쳐 중국의 1천년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응오꾸엔, 장군 쩐응엔한 등은 모두 중국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승리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베트남역사에서 중국이란 존재를 떼려야 뗄 수 없다. 베트남이 중국과 치른 마지막 전쟁은 1979년에 일어났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으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도 베트남은 판정승을 거뒀다. 전쟁으로는 베트남을 당할 수 없었던 중국은 도이머이 이후 막강한 화교자본으로 베트남에 밀려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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