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총독부(이하 총독부) 건물은 그야말로 일제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4년간의 설계와 10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설계는 독일인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맡았고, 그가 죽자 일본인 노무라 이치로와 구니에다 히로시가 마무리를 했다. 건축 자재는 국내외 것을 가리지 않고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였는데,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에 있는 총독부보다 훨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으려는 의도였다. 건축 양식은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식이었다. 이 건물은 완공 후 20년간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다. 군정이 끝나자 과도 입법의회가 사용하더니, 제1공화국 때는 정부 청사로 쓰이면서 제헌국회 개회식, 초대 대통령 취임식, 9.28 서울 수복 등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했다. 6.25 전쟁 때는 대파되어 '유령의 집'으로 불릴 정도였으나 완전 복구되어 5.16쿠데타 이후에는 정부 청사로 활용되며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17쪽
제5공화국 때는 거센 여론에도 불구하고 277억 원의 거금을 들여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개관했다. 제6공화국 시절에도 철거 여론이 있었으나 막대한 철거 비용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 5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점에서 이 건물은 첨탑을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총독부 건물이 마땅히 철거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이 건물은 유서 깊은 우리 민족의 심장부인 경복궁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들어섰다. 이때 헐어낸 면적이 경복궁 전체 면적의 1/4에 달한다. 또한 총독부 건물의 위치는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거의 종교와도 같았던 풍수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풍수로 볼 때, 총독부 자리는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 이처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그들은 최대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서를 파괴하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총독 관저의 자리는 사람의 목 부분인데, 그들은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음으로써 조선 정궁이 파괴는 물론 풍수의 관점에서 조선의 숨통을 조이고, 입을 막으려 한 것이다. -18쪽
일제가 우리 풍수사상을 교란하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으로 치면 가장 크고 고약한 쇠말뚝인 셈이다. 게다가 종종 보도된 것처럼 총독부를 '日'자 형태로 지어서 '大'자 형상인 북한산과 '本'자 모양으로 지은 경성부청사(현 서울 시청)와 아울러 '대일본'을 나타내고 있따. 그들은 한복판에 그들의 이름을 거대하게 써놓고 영구 통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19쪽
그들의 잔혹성은 총독부 지하 공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전체 20평 정도의 지하실에는 두께 14cm의 철판 문이 있는 방이 네 개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일제 고문 감금 시설의 형태다. -20쪽
경복궁에 들어서면 유난히 주위의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는 민속박물관이 서 있다. 그 민속박물관을 오른쪽ㄱ에 두고서 계속 가다보면 구박물관이 나온다. 그 오른쪽 구석에 '명성황후 조난비'와 '순국숭모비', 그리고 사당이 단촐하게 세워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진 자리에 표식이라도 하나 세우지는 못할망정 공중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순국숭모비'에는 건립위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대표적 친일파 '모윤숙'이 부회장으로 새겨져 있다. .... (26) 반미(?) 운동까지 하던 그녀는 광복 이후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며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이승만 정권과 손을 잡고 친미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친일 행적을 보호받으려 했다. -23쪽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녀는 군사 독재 안에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는 문단, 외교, 여성계의 대표로 활약하게 되는데, 1970년 국제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이 된 것이다. 그녀는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말로 화려한 이력과 함께 친일에서 친미로, 그리고 친독재로 옮겨 앉으면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보여줬다.
숭모비를 옆에 두고 있는 명성황후 조난비의 비문은 모윤숙이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한 이승만의 친필이라고 한다. -27-28쪽
뒷이야기) 경복궁은 본래의 1/10 정도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철거 당시 총독부 건물의 지하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나무 말뚝 9,388개가 발견되었다. 한겨레 신문에 따르면 "95년~96년 정부가 경복궁 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의 지반 다짐용으로 궁궐 터에 박아넣은 대형 말뚝 수 천여 개를 뽑아내지 않은 채 홍례문과 주변 행각을 복원한 사실이 드러났다."(2002년 10월 4일)고 한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공사 관계자의 말이다. "말뚝을 모두 빼낼 경우 터 자체를 사실상 전면 굴착해야 하므로 공기가 1년 이상 늦어지고 막대한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논란 끝에 전문가 자문을 받아 말뚝 10여 개만 빼고 홍례문과 전각, 개울 등을 복원했다." 시간과 비용문제로 말뚝을 제거하지 못했다니, 이젠 슬그머니 땅속에 감춰놓으면 그만인가?-29쪽
현 서울시청사는 일제가 1926년 경성부청사로 지은 건물인데, 하필 덕수궁 대한문 맞은편에 버티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조선 왕조의 기를 끊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기와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부린 술수였다.
서울시청사는 남대문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통로이자 을지로, 소공동으로 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셈이다.-31쪽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치안유지법은 구대법원 청사(당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시행되었던 대표적 악법이었다. 일제가 자기들의 손으로 지어 제멋대로 우리 민족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판결을 내리던 억울한 역사, 그 역사를 담고 뻔뻔스럽게 서 있는 건물을 우리는 사적이라고 할 것인가?-35쪽
시청 맞은편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 원래는 조선시대 초부터 있던 흥천사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예부터 절터가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았던지 그 오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부민관을 세운 것이다. 이름대로라면 부민관은 '민'을 위한 '관'이어야 하는데 말이 좋아 부민관이지 상류 계급을 위한 시설이었다. 부민관은 주로 공연장으로, 식민 문화의 홍보 창구로 많이 쓰였는데 일제 말기 변절한 친일파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모윤숙을 들 수 있다. 8.15 광복이 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주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 장소로 쓰이던 곳이므로 친일파가 대거 국회의원으로 재등장한 국회의 근거지로 쓰기에는 적격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건물에서 초대 대통령까지 선출하였다. 그후 1970년대 중반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해오다가 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가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37쪽
경성역은 무려 3년여에 걸친 대규모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1922년 6월 1일 신축 착공하고 1925년 9월 30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공사비는 무려 194만 6천원. 당시 돼지 한 마리에 4원 미만이었고, 조선 정부의 1년 예산이 4백만 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총독부가 투자한 경성역 공사가 매우 거대한 국책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2쪽
일제는 철도 공사비를 절약하고, 풍부한 광물과 농산물이 있는 요지를 지나기 위해 논밭, 무덤, 명산들의 혈과 수맥을 무시한 채 설계했다. 백성들의 원성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그들이 측량했던 그 길을 지금의 경부선이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51쪽
철도박물관 어디에도 일제의 철도 침략에 대한 전시물은 찾기 힘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보니 건물 정면에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친일전력이 있는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의 글이다.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낸다.
산을 뚫고 물을 건너 뻗어나가던 철길은 무한한 미래를 지향하는 발전의 길이 아니었다. 끝없는 침략과 수탈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따. 조선을 완전히 자신의 영토로 생각했던 일제는 그래도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래는커녕 과거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61쪽
독립기념관의 대표적인 오류는 친일 인사들을 애국지사로 미화시켜 전시한 부분이다. 탑을 지나 다리 밑 오른편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새겨진 이승만 어록비가 눈에 띈다. 이 유명한 말의 배경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우울한 역사가 숨겨져 있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끝까지 수호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을 만류하며 한 말이 바로 뭉쳐야 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있을 때 이미 그는 서울을 떠나고 있었고, 곧이어 무책임하게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67쪽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후에 극렬한 친일파로 변절하여 학병 독려를 주장한 박희도와 교회 종까지 헌납한 정춘수 등도 미화되어 초상화까지 걸려 있다. 여기에 반민특위 법정에 섰던 최남선과 최린도 민족운동가로 소개되어 있다. 제5관(독립전쟁관)에도 친일 음악인 홍난파를 비롯, 학병 참여를 권유하고 일제에 빌붙어 갖은 반민족 행위를 한 장덕수와 윤치호 등이 민족운동가로 위장되어 있어 알 만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70쪽
우리는 영웅주의 사관에 빠져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역사 기여도를 너무 무시해왔다. 이제라도 이름 없이 쓰러져간 무수한 용사들을 위해 무명독립용사상이든, 광복용사상이든 세우는 것이 오히려 독립기념관의 건립 이념에 맞지 않을까? 유엔군 무명용사상은 있으면서 광복군 무명용사상이 없다는 건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73쪽
PIFF광장이 있는 광복동과 그 인근에 있는 남포동은 부산의 패션, 문화, 젊음의 중심지다. 이곳이 부산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도시 개발이나 행정상의 계획도시 차원이 아닌 침략자의 이권 획득 때문이었다. -92쪽
제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초, 국제 무대에 일본이 다시 등장함을 가리켜 <뉴욕 타임스>가 "벚꽃이 다시 핀다."고 했을 정도로 벚꽃은 일본의 국가정신을 나타내는 꽃이다.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열리기 시작했다는 진해의 군항제는 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왜적을 무찌르고 이 땅을 지켜낸 충무공의 정신을 기리자는 행사가,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벚꽃이 흩날리는 속에서 거행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과 일본 정신,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116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진해는 약 100년 전부터 조성된 계획 도시다. 일제가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항으로 개발한 도시가 바로 진해다.
창경궁에 심어진 벚나무도 그렇지만 진해의 벚나무 역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민족정신 말살을 기도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117쪽
광복 후 거의 사라졌던 벚나무가 부활한 이유는 무엇인가?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우리나라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무궁화연구회 박춘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주도에 있는 벚나무와 진해에 있는 벚나무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진해에 심어진 나무는 일제에 의해서 일본에서 가져다 심어진 나무죠. 정복의 의미로 심어진 겁니다. 사쿠라를 진해나 군산에 심은 것은 단순한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혼'을 심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쿠라를 누가, 왜 심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벚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단지 그 나무에 인간의 속성이 묻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벚나무를 내세우고, 그 나무와 같은 속성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벚꽃놀이만 해도 우리 고유의 풍습이 아니라 일본의 풍습이다. 우리나라는 전래의 진달래 화전놀이와 국화놀이가 있었을 뿐이다. -118-119쪽
1952년 4월 13일 진해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제막되고, 해군 통제부가 주관하는 군항제가 시작되었다. 군항제는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을 추모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행사를 펼치며, 민과 군이 화합을 다지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군항제가 열리는 시기는 일제 때 심어진 왕벚꽃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인 만큼 충무공의 추모제는 흩날리는 왕벚꽃 속에서 진행되게 마련이다. 지금은 오히려 군항제보다 벚꽃놀이에 더 많은 고나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군항제가 마치 벚꽃놀이를 정당화시키는 구실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 방사선 도시 계획이 특징인 진해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 개의 광장을 두고 있는데, 태양은 일본의 상징이다. 중워노강장에는 거북선 모형과 분수 시계탑을, 북원광장에는 이 충무공의 동상을, 남원 광장에는 충무공의 시비를 세워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일본의 상징인 태양과 그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충무공의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120쪽
벚꽃의 가지는 충무공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이락사에까지 뻗쳤다. 일제는 이락사에도 왕벚나무를 심었고 그것이 지금은 거목으로 성장해 있다. 호국 영령이 통탄할 일이다. 북원광장에 있는 충무공 동상은 당시 한국 조각계의 권위자인 윤호중 씨가 만들었다. 윤호중 씨는 모형 제작을 마치고, 이 방면의 권위자들에게 감상, 비평하게 한 결과 만족할 만한 평을 얻지 못하고 세 차례에 걸쳐 수정한 끝에 완성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방면, 즉 충무공에 관한 권위자들이라는 사람들의 면면이다. 친일 변절자 최남선, 친일 신문 만선일보에서 활약했던 이은상, 그리고 친일 미술가의 대부 김은호 등이 이 방면의 권위자들이었다. 충무공의 정신이 친일 변절자들에 의해 더럽혀지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충무공 동상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상 이승만 근서'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은상의 찬문이 적혀 있다. -121쪽
진해에 벚꽃이 부활하게 된 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가 크다. 그는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사쿠라같이 훌륭하게 죽을 각오를 한 그에게 있어 한 도시를 벚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의 국화인 왕벚꽃을 전국에 심기 시작한다. 전주-군산간 번영로에 심어진 왕벚나무 가로수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이기도 한 이 길로 일제는 호남 곡창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한마디로 '수탈의 길'이었다.-122-123쪽
벚꽃 길은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한복판,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이사당을 감싸고 있는 '윤중로'라는 길이 그곳이다. 봄이 되면 국회의사당은 활짝 핀 벚꽃에 묻혀버린다. -124쪽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맞은 일본은 진해를 기지로 하여 전투를 벌였다. 해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한 일본은 이곳 진해 탑산에 기념탑을 세웠다. 도고 헤하치로 사령관이 대마도 해전에서 기함으로 사용한 삼립의 함교 모양을 본떠 세운 탑이었다. 이 탑은 광복 후 이곳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보기 싫다.'는 말을 던지는 바람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진해향토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황정덕 선생님, "벚나무는 공해와 병충해에 약하고 어린 나무에서도 이른바 미친병(천구소병, 빗자루병)에 감염되는 개체들이 많은 단점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만 상처가 나도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죠." 벚나무는 가로수로는 적합한 나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125쪽
사천은 최초로 거북선이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천도 일제의 손길을 막지는 못했다. 일제는 임진왜란 전승지마다 벚나무를 심어 민족정신의 식민화를 유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를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던 이곳을 아예 성역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구축한 '선진왜성'이라는 곳은, 1963년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총독부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된 선진왜성은 해방이 된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역시 사적 제50호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천읍성은 우리가 쌓은 성인데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반면, 선진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다.-126쪽
우리에게 한밭(太田)을 대전(大田)이라 부르고 표기하도록 강요한 이는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히로부미가 태전이라는 지명을 없애고 대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은 <조선대전발전지>(1917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토는 왜 태전을 대전으로 고쳤을까? 역학과 풍수 등 동양학에 능했던 그가 한밭 주위의 산천 경계에 흐르는 상서롭로 강렬한 지기를 꺾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은옥 간사, "우리 말의 '한'은 크다는 뜻 외에도 밝다, 동쪽이다, 중심이다, 하나다, 통일하다, 희다, 처음이다, 으뜸이다, 높다, 하늘, 임금.... 등 20여 가지 이상의 뜻이 있죠.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한'이라는 말을 '대'라는 글자로 번역하여 대전으로 쓰면 그저 작은 밭이 아닌 큰 받 정도의 의미 밖에 나타내지 못해요." -130쪽
"그럼 太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태'자는 창조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시작한다(태조, 태치 등)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하다는 의미(태황제, 태상황 등)도 담고 있죠. 가장 작고 가장 큰 데 걸림이 없으며, 질적으로 양적으로 커나가는 과정과 가장 커버린 경지까지 포함하고 있어요." -131쪽
지명은 곧 그 땅의 역사요, 혼이다. 1991년 8월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들어서자마자 레닌그라드라는 지명을 없애고 원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원시킨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엑스포를 치른 국제 도시 태전은 하루빨리 이토가 지어준 부끄러운 이름을 처분해야 한다. 태전을 고향으로 둔 모든 이에게 이토와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름 한 자 한 자에 생명을 부여한 우리 민족이 침략의 원흉 이토가 오래 전에 지은 반민족적 지명을 고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록 행정기관에겐 귀찮고 돈이 좀 드는 일이라도 말이다. -134쪽
물론 부끄러운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철거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역사의 고발 없이 건축사에 의의가 있다고 보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139쪽
1920년 수탈 사업을 시작한 이후 조선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151쪽
예부터 일본은 호시탐탐 제주도를 노려왔다. 제주도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여덟 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1,845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갖는 제주도의 중앙 경위선은 127도 27분E, 33도 22분N이다. 이것은 한반도와는 59km의 폭을 갖는 제주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해남반도의 해남곶과 가장 가까우면서, 일본과도 불과 260km 떨어져 있고, 중국과도 제주-서울간과 비슷한 거리의 420km 떨어진 상하이와 가장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제주도의 위치가 한반도, 일본 열도, 중국 대륙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속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3국의 문물을 교류하는 데 가장 유리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163쪽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작전으로 제주도를 자신들의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관동군 등 일본군 정예병력 7만여 명을 제주도에 주둔시켰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만여 명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164쪽
서길수 교수,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할 때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바로 정신적 문화적 전통과 유산이죠. 첫째, 자국의 언어 사용을 강요합니다. 언어는 정신 침략의 무기라고들 하죠. 둘째, 역사적 자료를 없애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그 나라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사를 없애서 그 국민이 가진 성취 동기를 없애는 것이죠. 셋째, 전통적 풍습이나 민간신앙을 통해서 패배감을 심어나갑니다. 말과 글을 없애고 역사를 없애는 작업이 그 나라 상층부나 지식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또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습이나 민간신앙이죠. 그래서 일제가 조상을 명당에 묻으려는 묘지풍수사상을 비롯한 풍수지리학을 이용하여 패배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 풍수 침략으로 나타난 거예요."-175쪽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이라는 개념은 금세기 초 일본 지질학자들이 땅밑의 지질 구조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산맥들은 실제 눈에 보이는 산줄기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지표상의 실제 산줄기의 흐름과 일치하고,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져서 중간에 강이 나오는 일이 없는, 독특한 인식 체계인 '산경표'를 사용하였다.
같은 대간, 정맥 등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같은 물을 쓰기 때문에 문화가 동일하고 하나의 경제권을 이룬다. 그래서 '산경표'에 따른 지역 분류는 등산이나 여행에 도움을 주고 과거 우리의 역사와 인문지리학과 향토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8쪽
서울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고 김세중이 만들었다. 그런데 왜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그는 충무공 이순신 상(충무, 1953년/부산, 1955년)을 세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상, 맥아더 상, 김활란 상, 김성수 상 등의 동상을 세웠다.-255쪽
'애국지사 정춘수' 이 말은 그의 묘 입구에 써 있는 글귀다. '변절자', '친일파', 이것만큼 적합한 이름이 따로 없는데 애국지사라니.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전도사로서 원산지역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중, 1907년 같은 고향 출신인 신석구를 만난다. 신석구 역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정춘수와는 달리 끝까지 민족신앙과 지조를 지키는 대조를 보인다.
정춘수는 3.1운동으로 인해 1년 6개월을 복역한다.
정춘수 동상, 2.8 독립선언 77돌에 맞춰 철거하다. -259쪽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감신대에 가면 대학원 현관 안에 정춘수 부조물이 있다. 3.1운동 감신교 출신 민족대표라는 이름 아래 일곱 명의 부조물이 있었는데 현재 여섯 명의 부조물이 있었다. 없어진 한명은 김창준 목사다. 광복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벌였는데, 6.25전쟁 때 북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었고 감신대에 새겨진 부조물마저 철거당했다. 월북한 것은 월북한 것이고 민족대표로 3.1운동한 것은 3.1운동한 것이다. 역사는 역사로서 평가되고 사실은 사실로서 기록되어야 한다.
정춘수는 감리교 출신 목사였지만 감리교를 떠났다. 감리교는 버젓이 천주교인이 된 그의 부조물을 두고 있다.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정춘수 부조물을 철거하지 못한다면 김창준 목사 부조물 역시 역사적 현실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269쪽
우리 전통적인 양식에 의하면 사당에는 영정이 걸리면 안 된다고 한다. -277쪽
남도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일컫는 진주는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거두이자 의병의 정신적 원천을 제공하였던 남명 조식이 있었고 조선 말에는 동학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났고, '형평운동'의 거대한 불꽃이 백정들의 '형평사'(1924년) 결성으로 타오른 곳이기도 하다.-283쪽
단지 그림 한 장 때문에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분개해야만 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이완용이 아무리 당대 최고의 조각가라 해도 그가 3.1절 기념 조형물을 조각하겠다고 나선다면 여론은 분명히 그가 저지른 과거의 죄를 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은호 역시 스스로 붓으로 논개를 담아낼 자격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봤어야 했다.-284쪽
고 임종국 선생, "유치환의 '수' 역시도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은 가성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세력의 총칭이었다. 침략적 잔인 행위의 고발이 아니라 항일하다 죽어 효수당한 '머리 두 개'를 꾸짖은 친일시가 바로 '수'인 것이다. 이런 거짓말들이 고쳐져야 민족의 혼이 바로 선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된다. 유치환과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리고 있으므로 아직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289쪽
월탄 박종화 선생은 비슷한 전력이 있는 유치진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입영의 아침'에서 일제의 학병 참여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종화는 유치진보다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발표된 수필 2편과 담화 1편이 현재 발견된 박종화의 친일 행적의 전부이다. 당시 그의 비중으로 볼 때 그 정도밖에 쓰지 않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친일 행위자를 다시 추앙하는 글을 쓴 행위는 또 다른 형태의 친일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292쪽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 박중양.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9년 1월 21일,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감된지 일주일 만에 폐렴에 걸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 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공문서에서 박중양에 대한 처리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바, 아마도 그 당시의 다른 반민족 행위자와 같이 별 처벌 없이 석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친일 행적을 기념한 일소대는 후손들에 의해 자진 철거되는 신세가 되었다.-306쪽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혀 있는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 -일생을 항일 독립 투쟁과 민족적인 삶으로 일관해온 백강 조경한 선생이 1993년 10월 7일 타계하며 남긴 말이다. -317쪽
국립묘지 안에는 가이즈카 향나무, 리기다 소나무 등 일본산 나무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 풍속에서는 묘지에 향나무를 심는 것을 금기로 했다. 왜냐하면 묘지는 음기가 강한 곳인데 향나무는 양기가 강하기 때문이다.-322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들춰보면 이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1899년 10월 대구 출생으로 1919년 최연소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자료들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항일 경력들과 함께 친일의 경력 또한 화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3.1운동 후 이와모토 쇼이치로 창씨개명을 하여 상하이에서 일제의 고급 밀정으로 활동한 것이 임시정부 서무국장으로 있던 임의택, 의열단원이던 김성수,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씨 등의 증언으로 밝혀지고 있다. -325쪽
대통령 특사로 면죄시켜준 사람에게 다시 법원이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이 프랑스 국민의 정신이며, 민족정기인 것이다. 부끄럽게도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만이 예외였다. -331쪽
대전 국립묘지. 백범 김구 선생의 실질적인 암살범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애국지사를 탄압했던 친일파 김창룡의 묘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333쪽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지만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쉽사리 구분하기가 어렵다.-337쪽
나라를 생각하던 선열들은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홀대를 받고 있는 반면, 친일 경력이 있는 김기창의 집은 당국의 지원과 비호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세교리에서 한봉수 의병대장 묘소에 이르는 길은 확장은커녕 포장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운보의 집을 잇는 길은 2차선으로 확장, 포장을 해주었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1만 원권 지폐에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과 을지문덕 영정, 김정호 영정 등 국가 표준 영정에서 김기창의 그림을 폐출하라!-365쪽
1940년 나치의 침공을 당한 프랑스는 개전 6주 만에 완전히 무너졌다. 나치는 프랑스를 직접 합병하지 않고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를 세웠다. 겉으로는 "프랑스는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부가 통치한다."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군대를 사실상 해체하고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와 비슷한 양상의 강압 통치가 실시됐다. 나치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비시정부에 참여했던 프랑스 인사들은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비시 정부 아래 프랑스는 더욱 황폐해졌으며 당신들은 나치에 협력한 범죄자들이다."라며 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 ㅂ라전을 위해 일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른바 '공과상쇄론'을 들먹이며 친일인사의 죄를 희석시키려는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이후 프랑스는 비시 정부 참여자와 나치에 동조한 언론인, 문인 등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과 처벌에 들어갔다. -374쪽
반민특위는 이광수, 최남선 등 682명을 조사해 이 중 221명을 기소했다. 이 중 실형을 선고받은 친일 인사는 일곱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모두 풀려났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맥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376쪽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385쪽
'누구는 친일파다'라고 문서로 남기고 끝내기에는 그들의 죄가 너무 크다.-387쪽
민족 전체가 일제 하에서 신음할 때 일신의 안위를 추구했으며, 해방 후에는 과거를 속이고 민족주의자 행세를 했던 그런 인물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이루어지려면 지금까지의 청산 노력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저항이 거세고 시간이 걸려도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적어도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우국지사로 돌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보여줄 수 있고, 만의 하나 민족과 국가가 어려울 때 부모 형제를 팔아먹는 반역자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388쪽
변화는 어렵지만 변절은 쉽다. 수많은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변절 행위를 변화라고 변명했다. -필자 조현경-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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