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 전, 몽골인들은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남쪽까지 진출할 정도로 전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갔다. 난 아직도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만났던 몽골리안의 엉덩이에 박힌 몽골반점을 보던 순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19쪽
몽골의 등장으로 세계는 비로소 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동양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20쪽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빠르게 변하는 모습이 공존하는 나라. 초원 위의 전통 가옥 게르에 발전기와 파라볼라안테나가 달리고, 휴대폰과 위성방송, 인터넷이 몽골인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한국은 2008년이 돼서야 비로소 우주인을 배출했는데, 몽골은 놀랍게도 1981년 아시아 최초로 우주인을 배출할 정도로 우주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작은 상처에도 파상풍이 번져 목숨을 잃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있다.-24쪽
몽골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몽골어는 어휘가 풍부해 다양한 표현과 용법이 가능하다. 한국의 '거무튀튀하다' '노리끼리하다'와 같은 세분화된 표현이 가능한 언어는 흔치 않는데, 몽골어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 -25쪽
유목을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이 없는 몽골은 현재 실업률과 고용 창출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28쪽
사계절이 있지만 그 경계가 뚜렷한 편은 아니어서 10월부터 4월까지 길고 추운 겨울이 이어지며, 5월이 되도 쌀쌀하다. 9월 초순에 첫눈이 오거나 서리가 내리는 경우도 많다. 내 기억 속의 몽골은 1년의 2/3는 겨울로 남아 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가축과 사람이 살아간다. 바람이 세게 불지 않고 건조하기 때문에 몽골의 겨울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체감온도로 따지자면 한국의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다.-30쪽
몽골인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고,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추운 겨울을 보낸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짧은 여름이 오면 대지가 온통 눈부신 녹색으로 바뀐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채는 투명하고 강렬하다. 한여름에는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지만 한국처럼 습기가 많지 않고 건조해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하다. 넓은 땅덩이에 인구는 적어 평소 외지인을 보기 힘들어서인지 처음 본 사람을 만나도 경계심을 품는 대신에 반갑게 맞아주고 집안의 온갖 음식을 꺼내 대접하곤 한다. 자신 또한 언제 어느 곳에서 이방인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화와 공존의 실천, 오랜 세월 환경에 적응하며 찾아낸 생활양식은 그들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들이 사는 집인 게르는 유목 생활이 만들어낸 최고의 주거 형태다. 보기에는 단순한 구조지만 경험을 통해 축적된 몽골인의 지혜와 과학 장치들이 담겨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몽골인은 통풍과 보온, 이 두가지 요소를 조절해 초원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주거문화를 만들어냈다.-31쪽
네이멍구는 청나라 때 청의 속국으로 영토에 편입되는데, 중국 본토와는 달리 몽골 부족장들은 어느 정도 자치가 허용되었고, 만주족과 같은 우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청나라에 순종하는 몽골 부족들의 경우였고, 반항하던 부족들은 철저한 파괴와 학살을 당해야 했지요.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청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각 부족들은 독립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 결과 몽골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몽골인민공화국임을 선포하지요. 하지만 네이멍구의 경우 한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부족들의 내부 분열로 인해 결국 중국 영토로 잔류하게 됩니다. 그 후 중국은 인구 증가로 한족의 이민을 장려하지요. 현재 네이멍구자치구에는 약 2천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중 한족이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얼마 전까지도 독립한 몽골을 중국의 失地로 간주했고, 현재까지도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계속합니다.-44쪽
현재 몽골에는 젊은이들이 일할 만한 직장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네요. 특히나 지식인일수록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어 앞으로 과연 무엇을 더 배워야 할지 걱정이랍니다.-56쪽
원래 몽골은 한 나라였지만 네르친스크조약 때문에 양분된 후 한쪽은 중국화, 한쪽은 러시아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고형.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그야말로 유럽풍의 도시였습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도시에 비해 러시아풍이 무척 강하더군요.-59쪽
1999년 9월부터 몽골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듬해 봄까지 이어져 가축 250만 마리가 얼어 죽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또 2000년에는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차강조드(한파와 폭설을 동반하는 몽골의 겨울 재해)가 발생해 한달 사이에만 60만 마리의 가축이 굶어 죽었답니다. 이처럼 몽골인에게 겨울은 최대의 시련이자 고비인 셈입니다. -60쪽
선반 위의 고물 라디오가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인 듯해요.
이렇게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몽골인에게 "지금 행복하세요?"라고 물어보면 80%가 "예"라고 답한다 합니다. 이들보다 경제적으로 10배는 더 잘산다는 우리에게 같은 물음을 했을 때 35%만이 "예"라고 답했다지요. 역시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은 별개인가 봅니다. -61쪽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부모의 이혼, 또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아이들이 거리를 떠도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의 지하에 거주합니다. 과거 울란바토르를 건설할 때 지하에 온수를 공급하는 대형 파이프 고나을 매설했지요. 그래서 거리를 걸으면 곳곳에서 맨홀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이런 곳에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둥지를 틀고 사는 거지요.
정부는 아이들을 재활 기관으로 보내 기술교육을 시키고, 건강이 안 좋은 아이들은 치료하려 노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커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동네 깡패가 되거나 매춘부가 되어 거리로 나가는 것뿐이지요. -66쪽
울란바토르는 현재 치안 부재와 급격한 빈부차, 전통 가치 체계의 혼란 등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전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더군요. 몽골은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의 영향으로 칭기즈칸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체제 전환을 하면서 칭기즈칸을 복권했지요.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칭기즈칸을 아직 잘 모릅니다.-67쪽
게르 안의 난로에 장작과 말똥을 넣고 계속 때워도 들여놓은 생수병이 돌처럼 꽁꽁 얼었습니다. 초가을부터 내리는 눈은 겨우내 쌓여 이듬해 여름까지 녹지 않습니다. 얼어붙은 눈은 돌보다 단단하고, 그 날카로운 단면은 쇠창 끝보다 예리합니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를 둘러봐도 하얀 눈과 푸른 하늘밖에 안 보일 때도 있습니다. -77쪽
사랑은 알아야 생기는 감정입니다.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땐 즉시 후회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신기해 보였으며, 한 달 째엔 매력을 느꼈고, 1년 후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라, 바로 몽골입니다.-85쪽
아르항가이는 달느 지역에 비해 강수량이 풍부해 풀들이 잘 자라는 너른 초지가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몽골 역사에 대해 말하려면 이곳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여기가 칭기즈칸의 서역 정벌 출발지거든요.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주도 체체를렉 주변 지역은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몽골 정부는 현재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과거 몽골제국의 중심지였던 이곳으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선조들의 영화와 영광을 현재에 재건한다는 상징적 조치라 보아도 좋겠지요. 아르항가이 지역을 돌아보니 소문대로 풍요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습지가 있는가 하면 토흥강이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어 건조함을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야트막한 연봉들이 어우러진 초원의 풍광은 여느 몽골 지역의 척박함과 비교되기 십상입니다. 차강 솜에 있는 노천온천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온천이 다 솟아나다니! 오래 전부터 이곳이 몽골 지배층의 휴양지로 사용된 이력은 당연해 보입니다.-89쪽
거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건 가축과 사람만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몽골의 식물들은 짧은 우기에 몸을 흠뻑 적시고 일제히 그 생명력을 드러냅니다. 노란 꽃이 지면 긴 줄기의 하얀 꽃이 피고, 곧 보라빛 라벤더 꽃이 진한 향기와 함께 이어집니다. 초원에 꽃이 피는 시기는 아쉽게도 무척 짧습니다. 짧아서 더욱 강렬한 대지의 축제는 운 좋게 그 시기를 맞춘 사람만의 전유물이지요.-93쪽
현재 몽골 국토의 1/3은 지하자원 개발 붐에 파헤쳐진 상태라 합니다. 외국 자본이 몰려와 100여 개의 채굴 회사를 설립했고, 경제 발전을 원하는 몽골 정부는 이들에게 초원의 사용권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초원의 원래 주인이던 유목민들은 갈 곳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닥쳐온 기상 이변으로 유일한 생계 수단이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불법 채금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지닌 채 금이 나는 지역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107쪽
무분별한 개발로 산림과 초원이 훼손되면서 사막화되는 지역이 빠르게 늘어나고, 폭설과 한파 등 이상 기온 현상도 나타납니다. 초원에 폭설이 내려 보름 이상 눈이 녹지 않으면 풀을 뜯지 못한 가축들이 굶어 죽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초원도, 가축도 잃어버린 유목민들은 살길이 막막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닌자 광부가 되어 돈을 법니다. 이들은 때로 큰 금맥을 발견해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결국 초원의 주인이었던 유목민들이 금광 산업의 틈새에 끼어 불법 채금자로 전락해 노다지를 건지는 꿈만 키워가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불합리한 현실을 타개하고 자녀의 교육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스스로 닌자 광부의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123쪽
몽골에서는 누구나 칭기즈칸 초상을 상표권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137쪽
과거에는 낙타나 말을 타고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이제는 자동차에 일용품을 싣고 지방 소도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다.-141쪽
게르 안은 예상과 달리 너무 개끗했습니다. 나름의 질서에 따라 가족의 자리와 살림살이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세간은 붉은색 반닫이. 가족의 소중한 물건을 보관한다고 합니다. 게르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양털을 깎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인근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더군요. 일종의 품앗이라고 합니다. (수백 마리의 양털을 깎아야 해서 인근 게르에 머무는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145쪽
바롱오르트에서 또 하루를 달려 다리강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길도 제대로 없는 초원을 1시간 정도 더 남쪽으로 달리면 거의 국경인데, 그곳에 고구려 양식의 적석총과 고구려 성터가 있습니다. 고구려가 몽골의 고아대한 초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증거지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그저 고구려 기와편이 널려 있을 뿐이었습니다.-152쪽
최근들어 초원에도 차량이 제법 늘어났지만 말을 타고 가면 3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차로 가면 서너 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155쪽
이곳 사람들은 양을 도축할 때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체하는데 정말 놀랍더군요.-156쪽
하늘이 낮은 나라, 바람의 나라, 풀과 똥, 먼지의 나라. 길 없는 길이 존재하고 그 위로 구름이 마구 달리는 나라. 밤이면 불빛 하나 없는 땅 위로 한가득 별들이 쏟아지고, 가축이 주인인 초원에 사람이 끼여 사는 나라. 아! 말로만 듣던 지평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봐도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저 끝없는 초원,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한 땅 저 끝, 그 벌판에 마치 지구본 위에 덩그마니 혼자 튀어나온 존재처럼 홀로 서 있어. 도대체 몽골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잡아끄는 것인지.-161쪽
게르 안엔 오직 하나뿐인 창과 하나뿐인 문이 있었어. 그 창으로 몽골의 신들이 드나들고, 사람들은 밤마다 천장 밖 별들을 보며 다음날 날씨를 가늠하더라. 땅에 뚫은 세 개의 기둥 구멍에 의지해 누울 잠자리를 설치하고, 언제든지 그 기둥을 접어 떠날 준비를 하는 유목민들이야말로 하늘에 뿌리내리고 사는 천상의 사람들이지 싶어. 그러기에 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소 없이 사는 게 아닐까?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주소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164쪽
몽골인들은 생선과 나물을 먹지 않아.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라 생선 먹을 일이 드물고, 나물을 먹는 순간 가축들이 먹어야 할 먹이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먹이가 줄어들면 굶주린 짐승들이 울타리를 넘나들 수 있고, 이를 막으려는 사람과 짐승 사이에 전쟁이 선포될 것이기에 그들은 나물을 먹지 않아. 야생동물과 가축, 사람이 모두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음식 문화를 가진 그들이 내겐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던지. -165쪽
몽골인들은 물을 생명처럼 여긴다고 해. 칭기즈칸이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전에는 절대 빨래를 하면 안 된다'고 명을 내릴 정도였다니. 타문화에 관대한 몽골이지만 모든 종교를 허용해도 이슬람교의 목욕 의식만큼은 금지하고 있어. 물과 불은 그들의 공동체를 지켜내는 최후의 수단.
양과 염소떼들이 게르 바로 앞에서 무리지어 조용히 잠들어 있더라. 무척이나 편하게 잠자는 모습들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어. 나는 지금 사람과 가축 간에 별다른 경계 없이 그냥 무리로서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나라에 와 있구나.-169쪽
방목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말이 풀을 먹고 지나가면 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가 풀을 뜯는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몽골 생태계가 흔들리게 된다.-171쪽
사람들은 게르에서, 가축들은 게르를 둘러싼 바깥에서, 비록 잠자리만 달리할 뿐 이들의 관계는 가족과도 같았어. 양이나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독수리가 채가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무게가 나갈 때까지 게르 안에서 기른다고 해. 게르 안에서 아이들과 새끼 양들이 함께 자라고, 아이들은 어린 양들을 장난감 삼아 친구 삼아 가족 삼아 그렇게 생명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알아가는 것이지. 이른 아침 녀석들의 풀씹는 소리가 자동 알람이 되는 곳, 바로 몽골의 초원이었어. -174쪽
그나저나 몽골인들은 정말로 합창을 좋아하더라. 혼자 나서서 노래 부르는 법 없이 남녀노소 모두 입을 모아 배가 꺼질 정도로 몇 시간 동안 부르더라고. -182쪽
몽골에서는 아들과 딸이 있으면 대학 교육은 먼 곳으로 유학을 보내서까지 당연히 딸을 시킨다고 해. 사내들은 막노동을 해서라도 살 수 있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배워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래. -186쪽
이 나라는 공산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싸. 재래시장을 가도 우리네 시장처럼 야채와 생선이 즐비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각종 공산품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지. -187쪽
염소를 게르 안으로 가져와 일단 가죽을 벗기는 거야. 가죽을 다 벗기면 그 자체가 아주 훌륭한 작업대가 되는 거지. 그 위에서 배를 갈라 위를 꺼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제거하고, 피는 그릇에 따로 담아. 창자는 여인네들에게 전달되고, 창자 속 내용물은 화로 잿더미에 고루 섞어 흙으로 돌려보내면 한 방울의 물도 필요 없이 요리 준비가 완료되며 상황이 끝나. 원래 물이 귀한 나라여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붉은 피로 신성한 대지를 얼룩지우지 않는다는 풍습과 피 냄새가 불러올 맹수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지혜가 섞여 탄생한 허르헉 요리법과 그 신속함에 정말 감탄했어. 이들은 어린 동물은 절대 잡지 않고, 또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잡는 일도 삼간다고 해. 교미 시기에도 도축을 피하고 말이야.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철저히 자연에서 얻어야 했던 전통적 습관에서 나온 또 하나의 지혜겠지. (염소를 잡아 해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20분이 넘지 않았다.)-187쪽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어. 동양과 서양을 만나게 해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켰고, 선진적인 법률과 제도를 만들었지. 칭기즈칸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존중해 주었다고 해. 그가 탕조한 통합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교류하고 무역을 했다지. -199쪽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잃고 지배를 받아야 했던 몽골제국과 청나라 시대를 인정하기 싫을 법도 한데 도리어 자신들의 역사라고 당당하게 우기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단 말밖에 안 나와. 대한민국 국정교과서에도 중국의 주장이 사실인 양 실려 있으니 한족의 떼쓰기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지. -202쪽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 시민권을 땄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조상까지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지금 네이멍구가 중국 자치구가 되고, 이곳에 사는 몽골인들이 중국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조상 칭기즈칸까지 중국인으로 만드는 건 정말이지 이해가 안 돼. -203쪽
하얼빈 북쪽 치치하얼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납하시 납모이하 주변에 북부여 유적지가 있다.
건조한 초원을 적셔주는 고마운 강, 시라무렌.-231쪽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는 똑같이 위라는 글자를 나라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우리는 왜 200년 가까이 영화를 누렸던 선비족의 위는 북위라고 폄하하고, 고작 수십 년 존속했던 조조의 위에 더욱 정통성을 부여할까요? 이후에 등장한 통일 왕조 수와 당의 뿌리도 알고 보면 북위 아니던가요?
선비족과 우리는 알고 보면 적지 않은 인연이 있습니다. 한족은 선비족을 동호(東胡)라고 불렀지요. 사실 동호는 한족이 우리 민족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북위의 중흥 군주인 효문제의 부인 문소황후 고씨는 고구려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요.-242쪽
저는 지금 네이멍구자치구 바얀 호트에 와 있어요. 옛 오르도스 청동기 문명이 꽃을 피웠고, 서하제국이 지배를 했던 이 땅을 며칠간 거닐었지요.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웠고 실크로드 교역로에 위치해 무척이나 융성했던 서하제국은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제국에 합병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에 의해 자치구로 편입이 되었어요. -253쪽
우리는 몽골의 불교를 흔히 '라마교'라 합니다. 티베트 불교의 일종으로 들리는데 과연 정확한 표현일까요?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몽골인이 자신의 불교를 별도로 라마교라 부르지 않는데 굳이 우리가 그렇게 칭하는 데는 약간의 편견이 있어 보입니다. 먼저 몽골이나 티베트와 같은 유목민의 불교문화보다 더 나은 불교문화를 지녔다는 우월감일 것이고, 다음은 티베트와 몽골의 불교가 밀교라 불리는 데서 오는 성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몽골 불교는 정통 티베트 불교로 한국 불교와 같은 대승불교에 속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초기 경전에 대한 연구가 많아 우리보다 훨씬 풍부한 교리를 담고 있답니다. 남녀 교합을 표현하는 불상이나 탕카(불화)로 연상되는 성적인 이미지는 고려 말에 수입된,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인도 후기 좌도밀교에서 나온 것으로 실상 티베트 불교와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282쪽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고,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광활한 몽골 초원에서 어워는 길잡이나 경계의 역할을 합니다.-284쪽
울란바토르의 한 사원에서 승려가 신도에게 점을 쳐주고 시주를 받고 있다. 몽골식 샤머니즘이 불교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신조가 시주로 가져온 한국산 박카스가 눈에 띈다.-289쪽
1940년대 몽골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이자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위해 간단 히드의 청동관음상을 총알 제조용 고철로 선물했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부처가 제 몸을 녹여 독일과 일본군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니! 반파시즘 전선에 선 부처라! 역사의 비극이라 해야 할지 아이러니라 해야 할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293쪽
몽골의 공산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몰아친 불교 숙청 과정에서 간단 히드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당시 간단 히드는 몽골에 주둔하는 소련군의 막사와 마구간으로 쓰였다니 그 참담함이 눈에 선합니다. 그나마 간단 히드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1944년 미국의 부통령이던 헨리 A. 월리스의 몽골 방문 때문이었습니다. 몽골이 불교 국가임을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그는 스탈린을 통해 몽골 불교의 정수를 보고 싶다고 전합니다... 나름 국빈이라 생각했던 몽골 정부는 부랴부랴 폐허가 된 간단 히드를 복원하려고 씨가 말라버린 승려들을 수소문했지요. -294쪽
명나라에 의해 원나라가 멸망한 후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의 부족들은 분열되어 이전투구를 벌입니다. 이때 초원을 다시 통일하려는 세력에 의해 불교가 부활합니다. 1578년 칭하이 호수 근처에서 몽골 최강 투메트족의 수령이자 몽골 유목민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알타칸은 티베트 불교 교단의 중심인 겔룩파 대표 라마 소남 갸초와 역사적 회담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몽골인들이 불교를 신봉하도록 규정하는 법령을 선포하는 한편 소남 갸초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선사합니다. 소남 갸초는 자신의 스승을 2대 달라이 라마로, 스승의 스승을 1대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99쪽
겔룩파 교단과 몽골 지배층들은 기존 신앙 체계를 억압하고 이를 불교에 통합시키기 위한 강온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에 대한 몽골인들의 반발도 만만찮아 소남 갸초는 몽골인에 의해 결국 살해되고, 불교는 샤머니즘과 기나긴 투쟁에 돌입합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전후에 와서야 불교의 우위가 확보되고 두 세력 사이에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몽골인들이 말에서 내려와 삭발을 하고 라마승이 되었고 초원의 곳곳에 사원이 들어섰습니다. 20세기 초반 몽골 초원에는 약 1,000개의 사원들이 있었답니다. 몽골의 남성 절반이 승려가 되어버린 것이죠. 덕분에 그 야수같이 용맹하던 몽골 전사들이 모두 순한 양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몽골이 역사에서 퇴조하는 시기와 불교의 중흥기가 일치하다니, 정말 표현하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299쪽
네이멍구자치구 지역의 불교는 역사적으로 한국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흔히 교과서에서 중국의 대승불교를 수입했다고 가르치기에 티베트의 불교나 몽골의 불교와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궁예가 자주 외던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에서 네이멍구자치구 지역을 거쳐 전해진 것입니다. 몽골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불교국가였던 고려 때였답니다. 당시 세계적인 강국이었던 몽골은 13세기 티베트와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전파되고, 그것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이때 수많은 티베트어로 쓰인 경전이 수입되었고 만다라와 괘불, 탱화, 단청 등이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가끔 그 전에 우리 절에는 단청 대신 어떤 문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10쪽
몽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동시에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역사적인 주권마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와 동병상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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