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배노? 몽골
루이사 워프 지음, 김옥수 옮김 / 도서출판 오상 / 2004년 3월
품절


"생 배노(안녕하세요)?"

"타이왕(평화롭습니다)."-33쪽

챠강 사르, 오늘은 바로 몽골의 설날인 챠강 사르였다. 몽골의 설날은 5~6개월에 걸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됨을 축하하는 오래된 명절이었다. 설날은 음력으로 정하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보통 2월 초에서 말 사이였다. 울란바토르에서는 챠강 사르 연휴가 3일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방에서는 몇 주일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몽골인 대부분은 연휴가 계속되는 동안 찾아올 손님을 대비해 양고기 만두 스천 개를 만들어 얼려놓는다.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은 어디를 가든지 보오쯔를 먹고 애르흐를 마실 수 있었다. -35쪽

봄은 몽골에서 사계절 중에서 가장 변덕스럽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봄을 싫어한다. 도대체 날씨를 믿을 수가 없다며 마치 '여자의 변덕처럼 예측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봄은 정말 가혹했다. 바람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렸고 태양은 빙판을 뚫기 위해 강렬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땅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얼어붙은 모래처럼 보였고, 혹독한 겨울은 바위에 있던 물기까지 말려버렸다. -63쪽

몽골의 거친 환경은 사람들을 매우 보수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서 했다. 남자는 동물 사냥을, 여자는 식물 채집을 했으며, 각자 맡은 분야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규칙이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부부, 만나거나 이별할 때 얼굴에 키스하는 부부를 한 번도 못 보았다. 아니,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헤어지는 경우가 아닌 이상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냥 말없이 떠날 뿐이었다. '잘 가라'는 의미의 '바야르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는 누군가에게만 하는 인사였다. -66쪽

모자를 쓰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피우며 하루종일 맨 머리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직 바람에 냉기가 실려 있긴 했지만, 오후 내내 태양이 너무 따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질녘이 되자,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그러더니 결국 머리가 깨져나갈 듯 아팠다. 나는 그날 밤에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눈도 잘 안보였다. 간신히 진통제를 집어 몇 알 함께 삼켰지만 곧바로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온몸이 떨리고 어지러웠다. 다음날 아침에 간신히 일어날 수 있기는 했지만 눈알이 여전히 뻑뻑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74쪽

우리 모두가 봄의 파편에 뒤덮인 상태였다. 목구멍에 모래 냄새가 올라오고, 머리와 피부에 모래가 달라붙었다.

"아, 지금이 1년 중에 제일 힘든 시기에요. 오히려 겨울은 괜찮아요. 우리 모두 춥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봄은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해요. 또 공기압력이 낮아서 항상 피곤하지요. 사방이 먼지투성이라 가축이 굶주리기도 하고요. 비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겠어요. 아, 정말 힘들다."-79쪽

몽골 전통에 따르면 선물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 가방이나 주머니에 가만히 넣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에 선물을 풀어야 한다. 선물을 받고 고맙다고 말하는 건 선물을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주 무례한 행동이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물을 꺼내보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말없이 선물을 받아 나중에 혼자 열어야 한다. -87쪽

마을 사람들은 캐시미어를 판 돈으로 상점에서 쌀과 밀가루를 구입하고 게르를 해체해 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사람들은 거기서 여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이제 이 정적인 마을 전체가 약 3개월 동안 예전의 유목민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쳉겔의 거의 모든 가정은 최소한 몇 마리씩 가축을 기르는데, 일부는 마을 주변에서 기르고 나머지는 알타이 산맥에서 길렀다. 산에 있는 가축은 겨울과 봄을 나는 동안 산에서 사는 친척이 돌봐주었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알타이 산맥으로 들어가 직접 가축을 기르며 거기에서 나오는 풍부한 우유와 유제품을 먹으며 살았다. -109쪽

학교는 6월 15일에 공식 일정을 마쳤다. 학생 대부분은 이미 1주일 전에 떠났고 행사 때문에 머물던 소수의 학생들은 최대한 빨리 떠나기 위해 준비했다.-112쪽

어떤 나라이든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공포로 통치하던 시절, '오랫동안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1939년에서 1952년 동안 몽골을 통치한 초이발산 정권. 초이발산 수상은 1930년대에 몽골 전역에 걸쳐 악명 높은 숙청을 단행. 요셉 스탈린을 추종한 초이발산은 10여 년에 걸쳐 반혁명적인 몽골인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 처음 18개월 동안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최소한 2만 명 이상. 야당이거나 공산당 정권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학자와 스님 수천 명이 탄압의 표적. 몽골에는 장남을 라마승으로 키우는 오랜 전통. 1945년경 18,000명 이상의 라마승이 처형. 사원 800여곳 파괴. 화를 피한 곳은 단 세곳. 울란바토르의 간당 서원이 그 중 하나. 선전용으로 남겨둔 것. -119쪽

용기를 내서 바깥으로 나가보니, 도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우중충한 상점과 가판대, 나이트클럽과 술집 등이 중앙 엥흐 타이왕(평화의 거리)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고, 진열장마다 최신 상품이 번쩍이고 있었다. -124쪽

모든 유목민은 여름과 가을 내내 유제품을 먹기 때문에 요구르트와 크림, 치즈를 많이 만들었다. 또 겨울에는 먹을 게 없기 때문에 미리 지방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했다. 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거품과 크림이 많은 암말에게서 짠 젖이다. 암말에게서 젖을 짤 수 있는 시기는 약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유목민들은 그 유명한 아이락(발효시킨 암말 젖)을 몇 통씩 만들어 놓는다. -132쪽

내가 게르에서 여자들과 일하는 동안, 산사르후우를 비롯한 남자들은 바깥에서 밧줄과 나무로 만든 여름용 임시 축사를 손질하고, 말에게 낙인을 찍고, 양에게 이름표를 붙이고 양털을 깎았다.
남자들은 손톱깍이 같은 조그만 가위 두 개로 150마리 이상의 양털을 깎았다.

양털 깎기가 모두 끝나자, 남자 아이들은 웃통을 벗어던진 채 모두 강으로 들어가서 양털을 깨끗하게 빨릴 때까지 맨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그런 다음에 비틀어 짜고 쭉 펴서 우중충한 양털을 모아놓았다. 양털은 마치 민들레 꽃씨처럼 보송보송 일어났다. 쭉 늘어놓은 양털은 마치 수많은 거미 떼가 밤새도록 짜놓은 은빛 거미줄처럼 보였다. -135쪽

내가 여름 캠프에서 작성한 일지는 주로 유목민의 작업 방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일하면서도 상호 보완이 되는 방식, 다양한 유제품을 만드는 방식, 끝없는 방목과 젖 짜기, 가축을 잡아서 운반하기 등이었다.
"여름에는 산에서 할 일이 아주 많은 법이야. 오랜 겨울을 지낼 양식을 지금 다 만들어 놓아야 하거든."
그들은 식량을 모으기 위해 산으로 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여름은 식량을 수확하는 계절이며, 순간이나마 풍요로움을 누리는 기간이었따. 나른하게 보내도 되는 휴가기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함께 외출한 적이 있었다. 7우러 중순경에 근처 계곡에서 열리는 나담 축제에 참석했다. -136쪽

가장 중요한 나담 축제는 울란바토르에서 매년 7월 11일과 13일 사이에 열린다. 7월 중순경에 열리는 나담 축제는 작은 규모로 전국 수백 곳에서 열린다. 지역에서 열리는 나담 축제는 가축을 하루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 당일에 끝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활쏘기 대회는 대부분 생략했다.

언뜻 보기에, 나담 축제는 오랜 전통의 소박한 여름 축제 같았다. 마당에 하얀 천을 길게 깔고, 그 위에 버르척과 아롤, 치즈, 크림 등을 잔뜩 쌓아놓았다. 젊은 여인 10여 명이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수테채(우유차)를 따라주는 모습도 보였다. 남자와 여자는 따로 떨어져 앉았으며, 아이들은 맨발로 양쪽을 오가며 뛰어놀았다. -137쪽

몽골에서는 결승선을 그려놓지 않아, 언제나 두세 마리가 똑같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판은 우승자를 정확히 가려냈고, 사람들은 우승자 주변으로 몰려갔다. 우승마에게는 존경을 상징하는 파랑 비단 하딱(스카프)을 씌워졌다. 그리고 아이락과 쉬밍애르흐를 정중하게 부어주었다. 어린 기사에게는 왕관을 씌어줬다. 그러나 우승마보다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139쪽

나는 데르후우가 차와 음식을 게르 바깥에 있는 낮은 식탁에 준비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몽골인과 투바인은 언제나 집 안에서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기 때문이다. 나담 축제처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어떤 유목민이든 결코 바깥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저속한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42쪽

몽골에서 에스기(양모 담요)를 만드는 건 곡식을 추수하는 것과 비슷했다. 양모 담요는 게르를 덮는 벽과 좁은 침대의 매트리스나 담요로 사용했다. 염색과 바느질을 거쳐 멋진 양탄자나, 남자들이 겨울에 신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로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부츠는 잘 젖지 않아서 눈길을 걷는 데 아주 좋았다.
데르후우와 마니크가 아주 촘촘히 짠 갈대 돗자리에 양털을 고르게 깔자, 강수흐가 따듯한 물 두 통을 가져왔다. 데르후우가 잘 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쭉 편 손바닥에 물줄기가 가느다랗게 되도록 부었다. 물방울이 잘 마른 양털에 뚝뚝 떨어졌다.
"먼저 양털을 충분히 적신 다음에 이걸 말아서 에스기로 만드는 거야. 골고루 충분히 적시지 않으면 서로 달라붙질 않아."
양털이 축축하게 젖자, 우리 네 사람은 돗자리와 양털을 기다란 소시지처럼 천천히 단단하게 말았다. 그러자 데르후우가 거기에 기다란 회색 밧줄을 돌려서 꽉 묶었다. 그 일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마른 풀밭에 무릎을 끓고 앉아서 소시지 모양의 돗자리를 앞뒤로 밀었다.
-153쪽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딱딱한 돗자리를 천천히 펼쳤다.
"양털이 잘 엮이지 않았으면 오늘 오후에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할 거야."
마니크는 밧줄을 풀면서 말했다. 모습을 드러낸 양털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신선했으며, 조직이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잘 됐어요. 좋은 에스기에요. 보세요."
우리는 하얀 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머지 양털은 겨울용 델이나 담요에 넣고 바늘로 꿰맸다. -153쪽

남자들이 풀을 베고 돌아왔다. 살갗은 까맣게 탔고 몸은 더 수척해보였다. 벌써 8월 중순, 여름은 어는덧 끝나가고 있었다. -158쪽

알타이 산맥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는 동안 폭우는 내리기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끝났다. 이제 앞으로 아홉 달에서 열 달 동안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기온이 밤사이에 갑자기 내려갔고 계곡 비탈면에는 드문드문 눈발이 스며들었다. 유목민들은 짐을 싸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가을을 보낼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에게는 기온의 변화가 삶의 나침반이었다. -158쪽

여름은 가장 바쁜 계절이야. 겨울에는 일이 약간 쉬워지지. 남자들이 건초를 저장해 놓았고, 통나무집은 따듯해. 하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쉴게가 양 떼를 데리고 갈 수 없는 날이 많아. 그리고 야크한테서 우유가 안 나오는 날도 많아. -159쪽

게르를 해체하는 과정은 정말 예술이었다. 우선 바깥에 덮은 천을 벗기고, 그 다음에 벽을 형성했던 양모 담요를 벗겼다. 그러면 단단한 나무 골조가 나오는데, 마름모 격자를 지탱하는 장대를 서너 개만 남기고 천장을 내렸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침대를 모두 꺼내고 옷과 가재 도구를 나무 궤짝과 포대와 여행 가방에 담았다. 게르를 해체하는 작업은 약 두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게르가 있던 자리와 난로가 있던 자리에 남은 약간의 잿더미를 바라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다음에는 당연히 차를 마셔야 했다. 몽골에서는 서로 이별하기 전에 항상 차를 마신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시간보다 항상 늦게 출발한다. 우리가 트럭에 올라탄 건 이른 오후 시간이었다. -161쪽

나는 몽골인과 카자크인과 투바인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가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이고, 보수적인 문화도 거의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세 민족 가운데에서 카자크인이 가장을 존중하는 문화가 특히 강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여자들이 앉아 있다가 남편이라도 들어오면 모두가 깜짝 놀라 그 집 안주인을 제외한 모든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장은 집안일을 결코 거들지 않고, 부인이나 딸에게 명령만 내렸다. 그리고 몽골 여자나 투바 여자와 마찬가지로 카자크 여자들도 차나 음식을 남편에게 제일 먼저 대접했다. -175쪽

2주일이 지난 후에 아바이는 아들들을 데리고 풀베기 작업을 마쳤다. 건초를 높이 쌓아올린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들들이 그 꼭대기에서 빙그레 웃으며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건초를 게르 주변과 하샤 뒤편에 널었다. 몽골의 가을은 대체로 아주 짧아서, 겨울을 알리는 짧은 예고편이고 기나긴 추위로 들어가기 직전의 불꽃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난 봄이 아주 길고 여름은 늦더니, 이제 가을을 보세요. 더웠다 춥더니 이제 다시 더워졌어. 이건 문제가 있어요. 올해는 아주 힘든 한 해가 될 거예요, 박쉬."-176쪽

나는 쳉겔에서 영어 수입이 아주 중요하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마을 사람은 벌써 세 개(러시아어를 포함하면 네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울란바토르까지 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도시에서는 영어를 원활하게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지방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갈 거라면 영어가 중요하겠지만, 대학에 들어갈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180쪽

토야는 몇 달 전에 얼어 죽은 게렐휴의 조카이자 자신의 먼 친척이 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몽골인은 죽은 자의 이름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가난한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죽음에 익숙할 거라고, 사람이 죽어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죽은 자를 슬퍼하는 건 여유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강바타르와 벌러르마의 게르에서 나는 그렇게 깊은 슬픔을 생전 처음 느꼈다.-183쪽

몽골인은 상대방이 술잔을 안 받는 걸 대단한 모욕으로 여겼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계속 술잔을 부어대는 이곳의 문화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190쪽

여름이 되면 타왕 벅드에 야생화가 만발하며, 목초지마다 물과 풀이 풍성했다. 1년에 3~4개월 동안은 목초지에 풀이 많기 때문에 가축을 거느린 유목민들에게 황금기다. 하지만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목초지는 꽁꽁 얼어붙고 가축은 먹이를 찾을 수 없었다. 거세게 몰아닥친 눈은 커다란 야크까지 빠져서 질식할 정도로 쌓인다. 그래서 '짧은 황금의 계절'이 겨울에게 밀려날 즈음이 되면 유목민들은 왕들의 왕관을 포기한 채 말을 타고 높은 절벽이나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는 통나무집에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타왕 벅드로 돌아간다.-204쪽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지금 굉장히 많은 군중이 수흐바토르 중앙 광장으로 몰려나와 이흐 ㅎ ㅗ랄 앞에서 항의하고 있어요. 몽골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러시아처럼 마피아가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국민은 지금까지 우리 정치인들이 안전하게 일한다고 생각했어요. 초이발산 정권 이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전혀. 민주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죽은 사람은 물론 감옥에 간 사람조차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이 나라는 자유국가에요. -222쪽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평상시라면 담요를 둘러쓴 채 깊이 잠자고 있을 시간에, 나는 여전히 난로 옆에 앉아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촛불이 타들어가고 어깨에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델이 걸쳐 있었다. 나는 두 손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손바닥과 손가락을 바라보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피부가 마르고 거칠었다. 손바닥에 딱딱하고 노랗게 굳은살이 박혔고 이리저리 갈라졌다. 손톱은 울퉁불퉁하고 더러웠으며 손가락 끝은 문드러졌다. 내 생전 처음으로 일하는 손을 가져본 것이다.-227쪽

"받으세요, 박쉬, 나는 발라크(물고기)를 먹지 않아요."
쳉겔에서 만난 사람 대부분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생선은 보오쯔(양고기 만두)나 염소고기, 또는 쇠고기 대신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고기 대신 먹는 창피한 음식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강가에서 놀이삼아 낚시하는 아이들을 아주 많이 보았지만, 어느 집을 가든 생선 요리를 대접받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233쪽

이곳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나이가 몇 살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남편은 언제 사망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239쪽

"당신이 사는 나라에도 가축이 있소?"
아팜이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똑같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240쪽

"생 배노, 박쉬. 우리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 여기에서 아주 가까워요."
이것이 몽골 방식이다. 모두가 사람을 너무나 친절하게 반긴다. 내가 "챠뜨씅(배가 부르다)."하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41쪽

1990년 말에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어요. 우리는 나자르바에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자마자, '잘됐다, 이제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가자'고 말했지요.

나자르바에프 대통령과 카자크 정부는 몽골 카자크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면 살 만한 집과 직장을 주고 노인에겐 연금도 주겠다고 홍보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벌써 몽골 카자크인이 수천 명에 달했고 그들은 묵을 짋과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애를 스고 있었어요. -244쪽

카자흐스탄과 몽골 사이에는 물리적인 국경선이 없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려면 그저 러시아 일부 지역을 지나기만 하면 된다. 유목민들은 국경선에 신경 쓰지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 국경지대를 넘나들었으며, 게르를 세웠다. -245쪽

쳉겔 카자크는 자신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천대를 받고 심지어 쫓겨나기도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러시아 카자크들이 자신들을 이민자로 여긴다는 사실도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은 정말로 살기 좋다는 말만 되풀이했다.-249쪽

유목민은 계절의 지속성에 극단적으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겨울이 이렇게 오다가 가고, 그러다가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들에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지금은 눈과 얼음이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은 이 스텝지대를 뒤덮을 눈이 필요해요. 가축들이 싹을 모두 갉아먹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지금 가축이 계속 싹을 갉아먹으면 내년 봄에 자라날 풀이 없어질 거예요. 지금 모조리 먹어치우면 스텝지대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예요. 여름이 되면 다시 자라겠지만 그땐 이미 늦어요."-254쪽

"강물이 얼어붙으면 우리 모두 산으로 가서 가축을 잡아올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겨울 초입에 가축을 도살한답니다. 여름 내내 풀을 뜯어먹어 살이 통통한데다 날씨도 고기를 냉동하기에 적당하거든요. 겨울과 봄이 지나고 풀이 다시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 우리 모두 고기를 충분히 저장할 수 있어요."
가축을 도살하면 부위대로 나눈 후, 마을 통나무집마다 옆이나 뒤편에 만들어 놓은 오랜 방식의 조그만 저장소에 넣고 얼린다. 이것은 냉장고 역할을 하는데, 여름에 먹고 남은 유제품 역시 이곳에 저장한다. -255쪽

가을이 지나가고 몽골 특유의 앞이 보이지 않는 강풍과 함께 겨울이 몰려왔다. 기온은 곤두박질쳤으며, 얼어붙은 호브드 강에서 물을 길어오기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얼음물은 두 손을 마비시키고, 얼음조각은 물통을 때렸다. 밖에 빨래를 널어도 곧바로 얼어버려, 하루생활이 갑자기 너무 힘들어졌다.-259쪽

아바이는 항상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카자크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불만이었다. 이들의 언어는 산사람 특유의 굵고 그윽한 후음이 가득해 정말 듣기가 좋았으며, 구슬프고 애처로운 덤버르 가락은 아무리 가혹한 싸움꾼이라도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슬람 종교는 실용적이고 편안했으며, 사람들도 모두 관대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아바이네 집에 들어가면 매번 폭소를 터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힘들고 귀찮은 일은 모두 여자의 몫이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59쪽

나는 굴짱의 따듯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양가죽 장갑을 벗어 오른손으로 자물쇠를 잡았다. 그런데 얼어붙은 쇳덩이에 따듯하게 메마른 손이 아교풀처럼 달라붙고 말아, 나는 깜짝 놀랐다.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피부가 천천히 찢겨나가는 걸 느끼며 그냥 손을 잡아당겼다. 피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떨어져 나간 가느다란 피부가 쭈그러든 실타래처럼 쇳덩이에 얼어붙었으며, 오른손은 불에 댄 것처럼 콕콕 쑤시고 간지러웠다.-273쪽

1주일이 지나자, 남자 10여 명이 식은 땀으로 뒤범벅 된 말을 탄 채 산에서 양떼와 염소 떼를 몰고 내려왔다. 짧은 낮 시간에 남자들이 가축을 몰고 얼어붙은 호브드 강 빙판을 건너오자, 쳉겔 전역이 죽을 때만 기다리는 가축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에 가축을 모두 도살하기 위해 온 가족과 이웃이 달라붙었다. 그리곤 모두 신선한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 암소 두 마리, 양과 염소 열 마리, 낙타 한 마리와 갈기가 무성한 말 두 필을 몰고 우리 하샤로 들어왔다. 낙타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모두 도살할 예정이었다. -275쪽

우리가 음식을 다 먹고 손가락을 닦았다. 크아츠가 아들에게 채찍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기름기가 잔뜩 묻어있는 손으로 채찍을 받은 후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가죽에 먹여 부드럽게 만들면서 그는 다른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마을에서는 무엇이든 버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유용하게 사용했다. -277쪽

이곳 몽골의 변방에서는 결코 개를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물론 번개가 칠 때는 예외였다. 몽골인은 번개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공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실내에 들어올 때마다 발로 내차고 먹이도 찌꺼기만 주었으나, 번개가 치는 동안에는 겁에 질린 개에게 동정을 베풀기도 했다. -284쪽

강수흐-쇠도끼
산사르후우-우주의 아들
얄타-승리
어피아-약초 이름
어뜨게렐-별빛
부타커즈-낙타 눈알
아마르후우-힘이 매우 강한 소년
쇼뜨락-주먹
쪌빙-무숙자
사스트-독한 냄새
엥흐쟈르갈-커다란 행복
네르구이-이름이 없다
보그-소
제를렉-야만인
엔비쉬-이것이 아니다
바토르-영웅
후우-아들
수흐바토르-도끼 영웅
엥흐바토르-위대한 영웅
나랑체첵-해바라기
뭉흐체첵-은빛 꽃
알탕토올-황금빛 불꽃
게렐휴-빛의 아들
아메르후우-위대한 힘의 아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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