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이안나 지음 / 첫눈에 / 2005년 7월
품절


몽골에는 초원 지대가 70% 정도를 차지.
전체적인 지형을 보면 산악 지대는 주로 서부, (삼림)초원 지대는 중북부와 동부, 사막 지대는 중남부에 걸쳐 있다. -12쪽

몽골의 지하자원은 전 국토의 30%에 걸쳐 분포. 약 80여종의 지하자원을 채굴할 수 있다.금, 은, 구리, 주석, 아연, 형석, 몰리브덴, 우라늄, 인회토, 석유, 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세계 10대 자원부국으로 불린다. 구리 체굴은 세계 1위.
몽골의 광산업은 국내 생산의 50%, 수출 소득의 60% 차지. 그러나 가공기술이 부족해 순이익을 많이 내지 못하는 실정. 외국인 투자의 비율로 보면 광산업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17쪽

1911년 만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찾은 몽골은 제8대 버그드 짜브장담바를 왕으로 추대했으며, <이흐 후레>를 몽골 정부의 중심지로 삼고 그 명칭을 <니이스렐 후레>라고 했다. 다시 1924년 인민혁명이 달성된 후 혁명 영웅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수도명을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타르>라고 개칭했다. -20쪽

연평균 기온은 -2.2도, 1월 평균 기온 -19도, 가장 더운 7월은 17도. 가장 추웠을 때의 기온은 -49도, 가장 더웠던 기온은 38.5도

해마다 10월 9일을 수도의 날로 정해 기념함.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는 한국의 수도 서울과 1995년 10월 6일 우호 협력을 다지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양국의 수도는 역사적 관계를 시작. 이를 기념하여 1996년 울란바타르 시 중심부에 총 길이 2.1km의 '서울의 거리'가 조성. '서울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울란바타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21쪽

울란바타르를 둘러싸고 있는 네 산에는 각기 독특한 상징성을 지닌다. 남쪽의 버그드 항 산은 '정치', 서쪽의 성긴 하이르항 산은 '용기', 북쪽의 칭겔테 산은 '지식', 동쪽의 바양주르흐 산은 '재물'을 각각 상징한다.-27쪽

몽골은 북반구의 건냉 지역에 속해 있으며, 아시아 4대 건조 지역의 하나이다. 사계절이 분명하며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덥다. 그러나 한냉 건조 지대에 속하는 몽골의 기후는 하강 온도에 비해 체감온도가 그리 낮지 않은 편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맑은 하늘(연 평균 250일)과 일조량(연 2,600-3,300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평균 강수량은 230mm 정도이며, 609월 사이에 90%가 내린다. 북쪽 지방은 연평균 250-400mm 정도의 비가 온다면, 남쪽 지방은 100-150mm 정도의 적은 비가 내린다. 7월이 가장 더운 달이라면 1월은 가장 추운 달이다. 몽골은 연중 건조한 편이며 또 연교차도 심해 90도 정도의 교차를 보일 때도 있다. 연평균 기온은 서북쪽의 산악지대는 영하 5도, 초원 지대는 영상 5도의 기온을 보인다.-33쪽

봄은 음력으로 1월, 양력으로는 대개 3월부터 시작되며,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깨어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점차 기온이 풀리지만, 연중 가장 건조한 때이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람에 먼지가 날려 거리가 온통 먼지로 뒤덮이는 때가 많다. 이때는 추운 겨울보다 오히려 지내기가 힘들며, 몽골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계절이다. 봄에는 일정한 기온을 보이지 않으며, 때로 덥다가도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면서 추워지기도 하고, 때 아닌 눈이 오기도 한다. -34쪽

여름은 5월 말부터 9월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는 비교적 비가 많이 내린다. 고기압에 드는 날이 많고 청명하고 하늘이 드높고 맑다. 30도 이상의 높은 기온을 나타내지만 건조한 대기로 인해 불쾌지수가 높지 않으며, 그늘에 들어가면 더위를 금방 식힐 수 있다. 7월이 가장 더운 때로 지역에 따라 15~40도까지의 분포를 보인다. 산악지대가 시원한 편이라면, 고비 지역은 매우 높은 기온을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도시의 사람들은 고향이나 가까운 도시 외곽으로 나가 주로 1달 정도의 휴가를 보낸다. 도시의 많은 가정들은 도시 외곽에 '조스랑'이라는 여름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춥고 길었던 겨울과 변덕스러웠던 봄을 지내느라 지친 심신의 피로를 푼다. 몽골 사람들은 여름집에 가면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유유히 1달 정도를 쉬는데, 이것은 몽골의 변화가 심한 날씨 때문에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건강법의 하나이다. -36쪽

몽골의 가을은 겨울로 이동해 가는 과도기적인 계절로 비교적 짧다. 9월 초부터 11월 초까지로 보며, 몇 년 전만 해도 10월 정도만 되어도 겨울이라 할 정도로 추웠으나 최근에는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 몽골 사람들은 나담이 끝나는 7월 중순부터 가을이 서서히 시작된다고 본다. 가을은 가축의 젖이 풍부하여 이것으로 유제품인 차강이데를 만들고, 말이나 낙타읮 ㅓㅈ으로는 젖술을 만들어 겨울을 대비한다. 또 양고기나 쇠고기를 말리거나 저장을 시작하며 가축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한다. -37쪽

몽골의 겨울은 가장 길고 추우며 혹독한 날씨를 보인다. 보통 11월부터 3월까지의 긴 기간을 이른다. 겨울에는 눈이 간헐적으로 자주 오기는 하나 그렇게 많은 눈ㄴ이 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하 20도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놀라곤 하는데, 이곳의 기온은 건조한 대기로 인해 체감 온도가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니며 특히 겨울에는 바람이 적기 때문에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바람이 없기 때문에 대기가 정체되어 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도시 주변 게르촌에서 때는 유연탄 가스로 심한 스모그가 발생해 겨울을 지내기 어렵게 만든다. -37쪽

몽골에는 9.9 추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겨울부터 시작하여 추위가 9일 단위로 9번 지나야 겨울이 지나간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9.9 추위는 동지인 12월 22일부터 계산하여 81일 동안의 기간을 이른다. -38쪽

여름에 모기를 쫓기 위해 소똥을 태우기도 한다. 똥은 땔감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겨울에 가축우리의 보온을 위해 우리의 벽면을 똥으로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아 준다.

몽골 사람들은 가축 가운데서도 말을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여, 예전에는 주인이 죽으면 말을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72쪽

몽골인들은 흉노시대부터 국가의 수호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고대로부터 아홉 개의 깃대를 가진 흰 수호기(유승 차강 술드)는 국가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번영과 성장을 상징하는 신앙적 대상물이었다. 9수는 존귀함, 숭고함을 상징하며 여러부족들의 화합을 뜻하기도 한다. -75쪽

마두금은 몽골 남자의 정기가 될 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마두금이 없는 가정, 마두금을 연주하지 못하는 남자는 없었다고 한다. 남이 집에 방문한 남자는 호오르를 연주할 수 있든 없든 악기 소리를 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부터 머링호오르(마두금)는 일반 가정의 악기에서 전문적인 무대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전문 연주가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78쪽

예로부터 몽골에서는 홀수를 길한 수로 여겼다. -99쪽

새해 첫날, 해가 뜨면 식구들은 서로 절을 하는데, 부부는 서로 한 몸이라고 생각하여 절을 하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 절을 하게 되면 헤어지게 된다는 속신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이 어른께 절을 할 때 하득 위에 돈을 올려 드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풍속과는 반대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나 자식들이 절을 할 때는 연장자는 덕담을 하며 한 해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해 준다.
오후가 되면 식구들은 집안의 어른이 사는 집을 시작으로 친척이나 스승의 집을 돌며 새해 인사를 한다. -102쪽

친지나 은사, 친구들끼리 새해 인사를 위해 집을 방문하는 것은 보통 새해 첫날부터 보름 정도까지 계속된다. 다른 집을 방문할 때는 값에 관계없이 적절한 선물을 가지고 가며, 때로 돈을 선물과 함께 드리기도 한다. 방문한 손님이 돌아갈 때 집 주인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손님에게 주는 풍습이 있다. -103쪽

말경주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대개 5~13세의 어린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6~8세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말경주에는 남자 아이들뿐 아니라 여자 아이들도 참가한다. 경주마는 2세, 3세, 4세, 5세가 된 말까지는 나이 별로 경기를 하며, 6세 이상의 말 '이흐나스'라 하여 나이 제한이 없이 한꺼번에 경기를 하고, 종마는 따로 경기를 한다. 이렇게 6종류의 경기를 하며, 측대말을 타고 단거리를 도는 시범 행사가 있다. 경기의 거리는 말의 나이에 따라 달리 정한다. 2세의 어린 말은 10~14km, 3세 말은 14~18km, 4세 말은 18~22k,, 5세 말과 종마는 22~25km, 나이가 많은 말은 대략 25~28km를 달린다. 어린 기수들은 안장 없이 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안장이 없으면 말에서 떨어지더라도 말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말로 인한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115쪽

몽골의 게르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오늘날의 펠트 게르 형태는 16세기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게르를 주거 형태로 한 민족은 터키, 만주, 몽골의 유목 민족들이다. 몽골의 에스기 게르를 러시아어로는 '유르트', 중국인들은 '바오', 야코트 사람들은 '모걸 오라스', 알타이 사람들은 '아가쉬' 등으로 부른다.

몽골의 왕정 시대에는 일반민이 사는 게르 이외에 왕이나 귀족의 궁궐, 관청 등의 고정 건물이 지어졌고, 정착 도시가 생기면서 고정 가옥이 지어지기도 했다. 도시 아파트는 러시아 기술로 1940년부터 시작하여 점차 소규모로 지어지다가 1960년대에는 상당수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후 계속해서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졌으며, 현재는 건축업이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활기를 띠고 있다. -126쪽

게르의 크기는 재산의 정도나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게르의 면적과 크기는 '한'이라고 하는 벽체의 수로 나타내는데, 보통 4,5,6,8,10,12,15한의 게르가 있다. 15한의 경우 150개의 천정 받침나무가 들어가는 큰 게르인데, 이렇게 넓은 게르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주로 살았으며,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부자들은 대개 6,8한을, 평민들은 4,5한을 짓고 살았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지어지는 크기는 5한으로 평균 5명 정도가 살 수 있다. 일반적으로 4한 게르의 크기는 15~20m2, 5한은 20~30m2, 6한은 30~50m2가 된다.

몽골인들은 길한 모든 것들이 위의 천창을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이를 매우 존숭했다. 또 천창을 게르의 생명이라고 보아 매우 중시하는데, 이것은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기둥의 높이는 5한의 경우 228cm, 6한은 245m 정도가 되며, 일반적으로 천장과 벽체의 높이는 60대 40 정도의 비율을 이룬다. -128쪽

시골에서는 주로 소나 말똥을 이용하여 불을 때고 있으나, 울란바타르의 경우 외곽을 끼고 형성된 고정가옥이나 게르촌에서 나무나 유연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매연이 심하게 나고 이것이 환경 오염의 주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추운 겨울 저녁 시간 때부터 시작하여 울란바타르 시내 공기는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호흡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다. 몽골의 대기가 겨울에는 바람이 없이 정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울란바타르 시가 고분지 지역이기 때문에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은 채 시내에 정체되어 있어 이러한 공해 현상은 더욱 가중된다. -135쪽

몽골 민족들은 광대한 초원에서 수 세기 동안 유목 생활을 해온 민족으로 손님을 맞는 예의가 각별하다. 이것은 인적이 드문 외로운 초원 생활 속에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한 원인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동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는 어려움을 잘 이해하는 데서 오는 미풍양속일 것이다.

주변에 다른 인가가 없을 경우 주인이 집을 비울 때는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가기 때문에 나그네가 들어가 쉴 수도 있었다. -137쪽

드넓은 고비의 집

먼 여행길을 걸어
피곤에 지친 나는 한 잔의 차를 갈망하여
끝없이 광활한 고비의 인가를
보석 찾듯 살피며 갔다.
한참을 헤매다 어느 집에 이르니
게르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주인 목자는
먼 초지에 가축 떼를 방목하러 간 듯
오 한의 게르 안에는 가구며 그릇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원하는 어떤 이를 위해 준비해 놓은 뜨거운 차
갈증으로 찾아온 어느 누군가가 차를 마시고 갔다면
집 주인이 기뻐하는 고대 풍습을 나는 안다.
태양과 바람이 스며든 육포로
체력을 보충하고 떠난 이가 있다면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을 이루었다 자랑하는
소중한 풍습을 나는 안다.
진한 향기의 차로 갈증을 풀고
의심 없는 믿음의 깊이에서 나는
마음의 갈증을 풀었다.
펠트 게르 문은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채
믿음을 잃지 않은 주인이
가축 떼를 이끌고 초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의 광활한 고향을 찾는다면 당신은 잘 안다,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사구가 펼쳐진 고비, 몽골인의 마음에는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
"몽골 현대시선집"에서-139쪽

몽골에서는 술을 뿌려 올리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고시레 풍속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약지를 사용하여 3번을 올리는데 이것은 푸른 하늘과 대지, 인간(천지인)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약지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지는 다른 사물에 닿지 않는 가장 깨끗한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147쪽

부족이나 한 나라의 지배자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철저히 숨기는 것은 아마도 적으로부터 시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칭기스칸이나 쿠빌라이칸 등 ㅁ오골 대칸들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장례행렬 도중에 만나는 모든 생명체를 죽음에 처했다.

왕족은 매장을 주로 했으며, 왕족이나 귀족, 고승의 경우 때에 따라서 화장을 하여 뼈를 날리거나 탑에 넣어 모시기도 했다. 어떤 때는 미이라로 만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몽골의 가장 보편적인 장례법은 풍장이었다. 그 후 매장 방식이 바뀌었으며 현재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법이 되었다. -166쪽

장지에 가는 길에 유가족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간다. 눈물을 흘리면 죽은 이의 영혼이 물에 빠져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속은 곡을 하고 소리를 매기며 슬픔ㅇ르 표하는 우리의 풍속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169쪽

흉노인들은 한 해를 4계절 12달로 나누고, 봄은 호랑이, 토끼, 용
여름은 뱀, 말, 양
가을은 원숭이, 닭, 개
겨울은 돼지, 쥐, 소 달이라고 했다.
12동물이 각각 단위가 되는 역을 흉노에서 한나라가 받아들여 사용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했다. 몽골에는 12지지 이외에 10간지가 함께 사용된다. -173쪽

일반적으로 한 가정에 세 명의 아들이 있는 경우 맏아들은 정치적인 일에 힘쓰고, 둘째 아들은 지식이나 종교적인 일을 위해 집을 떠나고 셋째인 막내는 집안에 남아 부모의 일을 도우며 갈 걸럼트를 계승한다는 말이 있다. -225쪽

쿠빌라이칸 시대부터는 무당들 대신 국사에 승려를 앉힘으로써 무교는 통치의 기반에서 물러나게 된다. 불교는 무교의 의례를 불교화 했으며, 이러한 불교적 영향 밑에 들어간 무당을 '샤링 버어' 즉 황무당이라 한다. 원나라 시대에 비록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고 정치적인 주된 역할을 수행했으나, 일반 민중들의 대다수는 무속에 의지해 살았다. 쿠빌라이칸과 원나라의 칸들은 불교를 존중하고 전파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역시 무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생활 속에서 여전히 무속의 지배를 받았다. -244쪽

어워는 유목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충분한 초지를 제공하는 대지와 그 초지를 가능하게 하는 태양, 비 등을 내려 주는 하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드러내고, 앞날의 삶을 가호하고 축복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며 어워를 세웠다. 또한 먼 길을 떠날 때 높은 산이나 고개 위에 어워를 세워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자가 되게 했으며, 어워는 초원의 험한 여행길에서 여행객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전쟁을 떠날 때에도 어워에 제의를 드림으로써 하늘에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했다.
현재 몽골에서 어워제를 드리는 곳은 800여 곳에 이르며, 신성이 거하여 제의를 드리는 어워는 420여 개가 된다.
어워는 큰 산이나 언덕, 고개 위나 강, 호수, 샘물 옆에 또 초원 등에 만들어지며 몽골의 어느 지역을 가든 쉽게 볼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돌을 쌓고 맨 위에 기나 하득을 묶은 버드나무나 나뭇가지 등을 꽂아 놓은 형태이다.-256쪽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에 인도에서 발생하여, 7세기 경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 불교를 일명 라마교라 하는데 라마란 티베트 불교에서 '정신적 스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래는 사원의 지도자나 위대한 스승에게만 붙일 수 있었던 '라마'라는 명칭이 오늘날에는 일반 승려에 대한 경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몽골에 들어온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한 이유는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개혁 종파가 경전보다는 스승의 가르침 즉 '라마'를 존중한 데서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263쪽

개혁파 불교에서 스승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불교를 곧바로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라마교라는 것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몽골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불교가 몽골에 강하게 전파된 것은 16세기 말 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몇 차례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흉노 시대부터 간헐적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본다. -264쪽

불교가 몽골에 들어온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계 정복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나라의 종교 문제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전통적인 무속을 신봉하여 결정적인 사건에 마주치면 영원히 푸른 하늘의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하고 무당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의 용한 점쟁이나 점성가들의 예언이나 조언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아해나 야율초재와 같이 양의 견갑골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을 주위에 데리고 있었으며, 원정을 떠나기 전 점을 쳐보게 하기도 했다. 또한 도교 교단의 장로인 장춘진인에게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장생의 비법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265쪽

원나라 시대에 몽골의 칸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와 도교를 금지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융화적 태도는 매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중국인들 가운데 큰 명성을 얻었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가 혹은 도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특별히 도사들에게 공적인 세금을 면제해 주고, 유교 사당을 부흥시키고 제를 드리게 하는 등의 일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몽골 지역에 전파되는 것을 보이지 않게 엄격히 규제하는 이중 정책을 썼다. 일반적으로 그 시대 몽골 칸들은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 확산과 영향력을 막기 위해 티베트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상적으로 중국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의 한 방편이었다.-271쪽

불교가 통치자들의 야심에 의해 몽골에 전파되긴 했으나 그 시대 상황에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귀족과 봉건 영주들 간의 투쟁과 위기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고, 한 집단의 정치인 결집을 확고히 하며 민중들에게 문자를 전파시키고 불교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발전,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방 통치자들과 귀족들은 불교의 서로 다른 분파를 옹호하면서 불필요한 경쟁을 하고,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굳히기 위한 일환으로 가능한 한 불교의 높은 칭호를 얻기 위해 애썼던 것은 마침내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잃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277쪽

몽골의 유목 문화는 자신들의 수천 년 역사 중 외래 종교, 문화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만주가 1644년부터 150년 이상 정책적으로 불교를 몽골에 전파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1800년대 초에는 몽골에 1,000개 이상의 사원이 생겨났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주는 불교의 지도자를 비롯해 일반 승려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279쪽

하르호름 시는 122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1238년(어떤 학자는 1235년이라고도 함) 이곳에 어거대칸의 궁전을 세움으로써 하르호름은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어 몽골 대제국의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이 도시에서 몽골의 여러 나라들을 통치했으며, 이곳을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400여 년 동안 유라시아와의 상업이 이루어졌다.-291쪽

하르호름은 140년 간 존속하지만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시기는 32년간이었다. 1215, 1268년 큰 화재가 있었으며 1380년, 1466년 중국인에 의해 파괴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구되었다.

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거리에 위치해 있고 울란바타르에서 차로 6~8시간 정도 걸린다.-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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